NHK 디렉터로서 1995년 시인의 50주기(일본에서는 종전, 한국에서는 광복 50년이기도 했다)를 계기로 KBS와의 공동 제작으로 윤동주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윤동주 시인의 조카인 윤인석 댁에서 자필 시집 원본을 촬영하게 된 것이다. …… 표지를 촬영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시집 표지 중앙에 만년필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라고 적힌 곳 왼쪽 옆에 연필로 ‘病院(병원)’이라고 한자로 썼다가 지운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윤인석은 윤동주가 정병욱에게 자필 시집을 헌정할 때 시집의 제목이 원래 『병원』이었다는 것을 밝히며 연필로 썼다가 지운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 p.25
시인의 27년 생애에서 나를 다시 사로잡은 부분은 『병원』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이르는 시인의 내면 변화다. 그것은 한 청년이 불멸의 시인으로 성장한 농밀한 시간 드라마이자, 윤동주라는 시인의 특질을 가장 집약적이고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핵심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단순한 제목 변경으로 끝날 만한 사소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의 「서시」가 완성된 동시에 행해진 이 변경은 시집 전체, 더 나아가 윤동주라는 시인의 생명에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암흑의 시대에 신음하며 고통의 늪 속에서 시를 잉태시키고 시어를 자아낸 청년은, 이 변경을 경험했기에, 시대적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거나 ‘병원’에 갇힌 사람처럼 움츠리는 일 없이, 시대와 나라, 민족을 넘어 빛나는 영원한 시인으로 승화한 것이다. --- p.27
내가 더욱 ‘mortal’에 집착해 윤동주의 「서시」와 관련지어 생각하는 것은 제목이 『병원』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바뀌는 과정에서 이 ‘mortal’, ‘immortal’이 매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서, 자필 원고를 처음 접했을 때의 인상으로 표지에 남은 ‘병원’의 흔적에 관해 썼는데, 그 뒤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사진판)』을 상세히 살펴보던 중에 외관상으로도 매우 마음이 쓰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또 다른 한 곳의 뚜렷한 ‘상처’(수술 자국)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별 헤는 밤」이 현재 알려진 마지막 4행 앞에서 일단 완성되어 완성 날짜인 1941년 11월 5일이라는 날짜까지 적혀 있는데도 그 후에 원고지 여백에 끼워 맞추는 식으로 4행이 추가된 점이다. --- p.32
「별 헤는 밤」의 마지막은 ‘immortal’을 노래한 것이다. 그에 반해 “죽는 날까지”로 시작하는 「서시」는 ‘mortal’로서의 삶의 각오, 다짐을 선언한 내용이다. 앞에서 인용한 고린도전서가 대비를 이루며 그린 양자의 세계를 두 시가 훌륭하게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 둘은 서로 대립하거나 반목하지 않는다. 조화 속에 호흡을 하나로 모으며 큰 생명체를 이룬다. --- p.41~42
원래는 『병원』이라는 제목으로 사회와 시대의 음화(陰畵: 네거티브)로 구성된 시집이, 이 마지막 단계에서 극적으로 비약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서 우주로 통하는 맑은 빛 속으로 자유로워졌다. 조선의 민족문화를 말살하려 하고 모든 것이 멸망으로 향하는 것만 같던 암흑의 시대에 모든 죽어가는 것, 유한한 생명을 사는 것,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향한 사랑을, 윤동주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여긴 것이다. --- p.42
월도 프랭크의 이 글을 접했을 때 윤동주는 그냥 읽어 넘기지 않고 적어둘 필요를 느낀 것이다. 더구나 수첩이나 강의노트 등이 아니라 졸업 시집 정서용 원고지에 기록한 것이다. 윤동주의 감동, 공감이 강렬했던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시 세계에 미친 중요한 말이라고 여겼던 것이리라. 흥미로운 것은 윤동주가 반파시즘 문학전선의 국제회의 보고서와 같은 책 속에서 정치적 주장이 강한 부분이 아니라 미와 생명의 일체감을 말한 대목을 선택한 점이다. 짧은 인용문 중에 ‘생명’이라는 단어가 세 차례나 등장한다. 윤동주가 ‘생명’에 이끌려 메모를 남긴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 이는 ‘mortal’, ‘immortal’에 의해 시집이 최종 단계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이루기 전부터 윤동주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솟구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생명’에 대한 공감이었다. --- p.52
나는 KBS와 NHK가 공동으로 제작해 1995년 3월에 방송한 윤동주 스페셜 다큐멘터리의 취재와 구성, 연출을 맡았다. KBS 측과 합의해서 취재를 시작한 것은 그 전년도 초여름 무렵이다. 문헌적 자료 조사와 함께 윤동주와 관련된 한국과 일본의 산증인들을 찾아 취재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기울였다. 그러자 취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곧 놀랄 만한 정보를 접했다. 생전의 윤동주를 만나 친분을 나눈 일본 시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우에모토 마사오(上本正夫)였다. --- p.61
일찍이 시에 눈을 떠 고명한 시인 김소운에게도 사숙했다는 우에모토는 전 조선 중학생 시인들을 모아 『녹지대』라는 초현실주의 모더니즘 동인시지를 만들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일본어로 된 시지이기는 하지만,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인 학생도 함께하기를 원했다. 시에 조예가 깊고 우에모토의 재능을 알아본 부산중학교 모리 도루(森亨) 부교장(1936년부터는 교장)은 그 계획에 동참했고, 어느 날 “멋진 시가 있다”며 조선인 학생이 썼다는 시를 보여주었다. 평양에서 나온 YMCA 잡지에 실린 시였는데 우에모토는 그 시를 일본어로 읽었다. 그는 그 시가 분명 「공상」과 같은 제목이었다고 기억했다. 그 시의 지은이는 윤동주였다. 우에모토는 계획 중인 시지 『녹지대』에 꼭 참여해줄 것을 권유하기 위해, 마침 수학여행으로 만주까지 갈 기회가 있어 가던 도중에 평양역에서 윤동주와 만났다.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대화는 일본어로 이루어졌고, 우에모토는 시지에 참여해줄 것을 열심히 호소했다. 하지만 윤동주는 “나는 한글로 시를 쓰고 싶다”라며 『녹지대』 참여를 고사했다. “한글을 정말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라고도 말해 민족 언어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주었다. --- p.70
윤동주는 누마타를 찾아갔다. 7년 전에 단 한 번 평양역에서 만났을 뿐인 ‘시우’를 문병했다. “백의를 입고 있던 나를 그는 연민이라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꽉 안아주었다.” 우에모토의 기억 속 윤동주는 어떻게 해도 윤동주답다. 너무나도 윤동주 그 사람의 모습이다. “연민이라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미소”에서, 윤동주의 마음에 넘쳐나던 진심이 무언중에 드러난다. 우리는 이 시기 윤동주가 지은 미소의 깊이를 알고 있다. 마지막 귀성이 되어버린 1942년 여름, 친지들과 용정에서 찍은, 삭발한 머리에 교복 차림으로 시원한 미소를 띤 사진은 여러 윤동주의 사진 중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며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을 것이다. --- p.96~97
NHK 디렉터였던 내가 윤동주 다큐멘터리 리서치를 시작한 것은 1994년 봄이었는데,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떻게든 윤동주를 기억하는 사람을 일본에서 찾아내는 것이었다. …… 1945~1946년 무렵에 두 대학을 나왔으리라 생각되는 영어영문학 관련 학과 졸업생들에게 빠짐없이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윤동주는 쉽게 다가와 주지 않았다. 기억에 없다, 모른다는 답변만 듣게 되면서 헛수고가 되풀이되었다. 한없이 깊은 어둠처럼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역시, 어차피 또 같은 답변을 듣겠지라는 묘한 예감으로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역사의 어둠을 뚫기라도 하듯 뜻밖에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라누마 씨 말씀이지요. 네, 기억합니다. 조선에서 왔던 히라누마 씨!” --- p.136
기타지마는 조용한 ‘히라누마 씨’가 했던 한마디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영어영문학과 학생으로서 프랑스어 수업을 들은 이는 두 여학생 외에 윤동주뿐이었는데, 어느 날 모리타가 아파서 결석했을 때, 수업 시작 전 잠시 동안 교단 앞에 나란히 앉았던 ‘히라누마 씨’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고 한다. “둘뿐이면 틀렸을 때 부끄럽습니다.” --- p.138
기타지마 마리코가 전하는 윤동주에 관한 추억은 상기의 증언에 머물지 않았다. 자택에 있던 낡은 앨범에서 영어영문학과 학생들이 ‘히라누마 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 나온 것이다. 담뱃갑 절반 정도 크기의 작은 사진이었는데, 교토 근교의 우지시(宇治市)를 흐르는 우지강에 달린 아마가세(天ケ瀨) 현수교 위에서 두 여학생을 포함한 아홉 명의 학생의 모습이 담겨 있고(촬영한 남학생을 포함하면 일행은 10명), 윤동주는 그 중앙에서 조금 눈이 부신 듯한 쑥스러운 얼굴로 서 있다. 그때까지는 일본에서 윤동주를 기억하는 인물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찍은 사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랬던 것이 증인과 동시에 사진까지 나온 것이다. 기쁨은 컸다. 하지만 당시에는 기쁨에 들떠서 통찰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했다. 무언중에 사진이 말해주는 몇 가지 중요한 부분을 간과했었다.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은 방송이 나간 지 15년 가까이 지나고 나서였다. --- p.141
사진이 나옴으로써 기타지마의 기억도 점차 세밀해졌다. 그에 따르면, 윤동주는 이날 점심식사를 한 후에 급우들의 부탁대로 강가에서 조선 민요 〔아리랑〕을 모국어로 불렀다고 한다. 송별 소풍이었다고 한다면 주인공인 ‘히라누마 군’이 노래 한마디 선보이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으리라. 〔아리랑〕을 부른 것은 고국의 노래를 불러달라는 학우들의 요청이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고, 혹은 조선에서 온 유학생으로서 귀국 인사로 들려줄 노래로는 민족을 대표하는 노래가 어울린다고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 p.146
윤동주에 관한 글에서 한글로 시를 쓴 것이 죄가 되었다는 내용을 가끔 접하게 되는데, 경찰과 사법기관에 남은 자료에 따르면 이는 바르지 않다. 세 가지 자료 중에 한글로 된 시 쓰기를 언급한 부분은 한 군데도 없다. 사건의 핵심이 된 것은 독립을 위해 조선에서의 징병제 시행을 역으로 이용하는 무장봉기론이었는데, 이는 아무리 봐도 송몽규가 주체가 되어 부르짖고 윤동주는 열심히 논리를 펴는 송몽규 옆에서 수긍하며 앉아 있었다고 생각된다. --- p.152
너무나 안타까운 점은 교토 시절에 쓴 시 작품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릿쿄 시절의 시는 「쉽게 씌어진 시」를 포함해 다섯 편이 서울의 친구 강처중에게 보내져 간직되었다. 하지만 교토 시절의 작품은 어떤 시였는지 단서조차 없다. 1994년 취재 당시 윤동주를 체포한 시모가모(下鴨) 경찰서에 조사를 신청했지만, 유고를 비롯한 자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답변을 받았다. 민족주의가 노골적이고 반일·항일적인 기분을 부추기는 것이었다면, 경찰은 시를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학과 인연이 먼 형사가 틀림없이 일본어로 번역시켰을 시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물을 만하지 않다고 판단된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도달점으로서의 그 시를 알고 싶다. 교토에서의 나날, 윤동주의 시는 쉽게 씌어진 것이었을까? --- p.160~161
전국 총수를 보면 사망 복역수 수는 1350명에서 7201명으로 5.3배로 증가해, 후쿠오카 형무소는 전국 평균 상승률보다 조금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4배로 불어난 후쿠오카 형무소만의 숫자를 보고 윤동주의 죽음과 관련지어 이것이 형무소 내에서 인체실험이 있었다는 증거라고 논하는 경우가 여기저기에서 보이는데, 다른 형무소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후쿠오카만의 숫자를 그 근거로 다루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 p.184
면회실에 들어가기 전 멀리서 눈에 띈 것인지, 면회 후에 실제로 복도를 걸어가 의무실 앞에서 목격한 것인지, 어쨌든 50명의 푸른 죄수복을 입은 젊은 복역자들을 본 것은 틀림없으리라. 다만 이를 모두 ‘조선인’ 수형자라고 기술해버린 것은 윤영춘의 선입견 내지는 문장의 지나친 비약일 것이다. 면회실에서 주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송몽규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 인상을 안은 채 의무실에 줄지어 있는 복역자 역시 그 주사를 맞는 사람들이 틀림없다고, 그렇다면 윤동주, 송몽규와 같은 조선인일 것이라고 굳게 믿어버린 것 같다. 실제로 그곳에 줄지어 선 수형자들은 조선의 독립운동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푸른 죄수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일반 죄수였던 것이다. 즉, 절도나 폭행 등 일반 범죄로 수감된 복역자이며, 붉은색(감색) 죄수복이 의무화된 엄정 독거 치안유지법 위반 수감자와는 수감된 이유도, 수감 후의 대우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 p.201~202
거듭 말하지만, 자료나 증언을 통해 아무리 조사해보아도 후쿠오카 형무소 전체적으로 아우슈비츠 같은 형태의 학살 행위는 발견되지 않는다. 윤영춘의 회상에 있는, 송몽규가 교도관의 눈을 피해 짧게 조선어로 말했다는 주사 관련 부분 이외에는 투약실험, 인체실험을 의심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규슈대 의사는 ‘연구’를 목적으로 후쿠오카 형무소에 들어갔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사정이 양인현이 복역하고 있을 무렵과 다른 것은 당시 형무소 내 식량 사정의 악화로 병사자가 급증했다는 점이다. 형무소에서의 사망자 통계는 1943년에 64명, 1944년에 131명, 1945년에는 259명이나 된다. 너무 지나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이는 다시 말해서 매일같이 병사자가 나오는 상황을 이용해 생명에 관계되는 터무니없는 실험을 행했다 하더라도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도 된다. --- p.216
동생 윤일주에 의해 전해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보내왔다는 엽서의 내용이 유일하게 만년(이라 말하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젊지만!)의 윤동주의 마음에 닿을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1944년 초가을, 윤일주가 형무소에 있는 형에게 “붓 끝을 따라온 귀뚜라미 소리에도 벌써 가을을 느낍니다”라고 써 부친 편지에 대해 윤동주가 답장을 보낸 것으로,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 준다. 고마운 일이다”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 p.226~227
다카오키가 주장한 논지에서 이 부분이 중요하다는 것을 윤동주도 충분히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곁줄이 그어져 있다. 인용한 내용의 시작 부분 위쪽 여백에는 ‘◎’도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윤동주는 그 위에 의문부호 ‘?’도 써넣었다. 이 부분은 주목을 요한다. 중요한 곳에 표시해두는 차원을 넘어 윤동주의 심리가 미묘하지만 분명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본질, 예술의 가치를 읽으면서 깊이 공감한 듯한 모습을 보인 윤동주였으나, 어느 의미로는 유물론자인 다카오키 요조의 면모가 가장 생생하게 드러나는 이 대목에서, 논지상에서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의문부호를 표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카오키의 계급사관적인 견해에 대해 의문이 들었던 것일까? --- p.255~256
윤동주는 왜 『맹자』의 이 대목을 인용해 메모를 남겼을까? 이 인용을 근거로 윤동주가 맹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하는 연구자도 있다. 「서시」의 첫머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을, 맹자가 말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仰不愧於天)”(「盡心 上」)의 문맥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방향까지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그러한 방향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맹자의 영향보다 여기서 훨씬 중요한 것은 왜 이 구절이 다름 아닌 다카오키 요조의 『예술학』 표지에 적혀져야 했는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하나의 추정 자료가 되는 것은 다카오키의 저서를 구입한 1939년, 거의 시가 쓰이지 않았던 그해 9월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도 수록된 「자화상」이 읊어졌다는 사실이다. --- p.263~264
윤동주는 두 가지 친화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앞서 들었던 것과 같이 반파시즘 문화인에 대한 친화성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런 경향을 공유함으로써 맺어진 학우들과의 친화성이다. 이 두 가지 친화성 속에서 드디어 윤동주의 개성이 움트며 도드라진다. …… 윤동주 혼자 그 친화성의 고리에서 빠져나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두 가지 친화성을 유지하는 가운데서도 독서 체험을 거듭해 윤동주는 ‘자신에게 되돌아간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거기에서 드디어 윤동주는 시인에게 핵심이 되는 것, 흔들림 없는 자신의 광맥을 발견해가게 되는 것이다 --- p.267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마지막에 놓인 시 「별 헤는 밤」에는 윤동주가 걸어온 길이 집대성되어 있다. 어린 시절의 그리운 기억 속 풍경 하나하나가 밤하늘의 별빛 속에 겹쳐 떠오른다. 이 또한 하늘을 우러르는 시다. 독서 체험이 결정체를 이룬 작품이기도 하다.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 그가 소장했던 서적에 포함된 시인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만이 아니다. 다양한 시론으로 단련된 윤동주 시의 독자적인 미학이 평온하면서도 뜨겁게, 그리고 그립게 광활한 우주적 시 공간을 조성했다.
--- p.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