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구상하는 동안 나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이 두 번째 편지에 푹 빠져 살았던 것 같다. 디모데 옆에 앉아 있다고 상상하면서 이 나이 든 사도의 마지막 명령을 듣고 유의하려 애썼다. 또한 많은 사람과 그 메시지를 나누려 했다. 서신서의 결정체는 두 개의 작은 단음절어인 ‘수 데’(su de, ‘그러므로 너는’)인 듯하다. 이 말은 네 번 나온다. 디모데는 다르게 되라고 부름받는다. 그는 여론의 압력에 굴복하거나 시대 정신에 순응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와 의 안에 굳게 서야 한다. 나는 오늘날 세계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같은 용기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_“저자 서문” 중에서
바울은 죽기 직전, 또다시 더 힘든 투옥 생활을 하는 동안, 디모데에게 이 두 번째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자신의 처형이 임박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그림자 아래서 글을 쓰고 있었다. 이 편지는 자기의 젊은 친구에게 보내는 대단히 사적인 서신이지만, 또한 ? 그리고 의식적으로 ? 교회에 보내는 마지막 유언이기도 했다. …오늘날 교회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의 메시지에 시급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주변에서 온통 복음을 붙잡은 손을 늦추고, 실수로 놓치기도 하며, 완전히 놓아 버릴 위험에 처해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을 본다. 젊은 디모데와 같은 새로운 세대가 필요하다. 그들은 복음의 부탁한 것을 지킬 사람들, 그것을 선포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위해 고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때가 되면 그들의 뒤를 이어 일어날 세대에게 순전하고 오염되지 않은 복음을 전달해 줄 사람들이다.
_“서론” 중에서
이 구절에서 바울이 의기양양하게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처음에 나타나셨을 때 사망을 결정적으로 ‘패퇴시켰다’ 혹은 ‘타도했다’는 것이다. 헬라어 ‘카타르게오’(katarge칚) 자체는 최종적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으며, 그 의미는 전후 문맥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가장 우선적인 의미는 “비효과적이고, 무력하고, 무의미하게 만들다” 혹은 “무효로 만들다”(AG)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망을 침이 뽑힌 전갈, 혹은 패전군의 군대 사령관에 비유하면서 도발적으로 이렇게 외칠 수 있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그리스도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기”(AG, NEB) 때문이다. 이 동일한 동사 ‘카타르게오’가 신약에서 사망에 대해서뿐 아니라 마귀 및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관해서도 사용된 것은 분명 의미심장하다(히 2:14; 롬 6:6).
_1장 “복음을 지키라” 중에서
바울은 이제 로마 병사의 이미지에서 헬라 운동 경기에 참가한 선수의 이미지로 넘어간다. 고대 사회의 운동 경기에서는(현대의 운동 경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참가자가 제멋대로 힘이나 기술을 보여 주는 경우는 없었다. 모든 스포츠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경기 자체에서는 언제나 그랬고 때로는 준비 훈련에서도 그랬다. 모든 행사에는 또한 상이 걸려 있었으며, 헬라의 운동 경기에서 수여되는 상은 금메달이나 은으로 된 트로피가 아니라 상록수를 엮어 만든 관이었다. 하지만 어떤 운동선수도,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했다. “규칙 없이는 월계관도 없다”는 것이 당시의 질서였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상 경주에 비유한다.
_2장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 중에서
그것은 당연하고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설사 몇몇 약한 사람이 말려든다 해도, 설사 거짓이 유행된다. 해도. 이교에는 명백하게 비논리적인 뭔가가 있으며, 진리에는 명백하게 참된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오류는 잠시 동안은 퍼지고 인기를 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결국 그것은 노출되기 마련이며 진리는 분명히 옳다고 입증될 것이다. 이것이 교회사의 분명한 교훈이다. 수많은 이단이 일어났으며, 일부는 승리를 차지한 듯이 보였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들은 대부분 골동품 수집가들이나 관심을 갖는 것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은 자신의 진리를 교회에 보존해 놓으셨다.
_3장 “복음에 계속 거하라” 중에서
디모데는 자신의 세대에서 신실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 세대에 신실함을 지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 사람들이 긴급히 필요하다. 분명 우리의 반응은 “과연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그냥 지나쳤던, 이 편지 마지막 구절들에 나오는 간략한 두 가지 표현을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22절이다.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것은 기록된 사도의 말 중 최후의 말이다. 그가 지금까지 구술을 시키고 있었다면(아마 누가에게), 어쩌면 이제는 자신이 펜을 들고 자필 서명으로서 그 말을 쓰고 있을 것이다. 주님이 나의 재판 때 나와 함께 계셨던 것처럼(17절) “주께서 너(단수)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라”라고 그는 기도한다. 그리고 “은혜(바울의 모든 신학이 증류되어 있는 단어)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번에는 “너희”라는 대명사가 복수로 나온다. 그것은 “그 편지가 사실상 공개적 용도로 쓰였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체 교회를 향한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향한 것이다.
_4장 “복음을 전파하라” 중에서
이 연구 문제의 목적은 존 스토트가 쓴 내용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배운 것을 삶에 적용시키도록 도전하려는 것이다. 질문들은 개인 연구 혹은 소그룹 모임에서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매주 한두 시간 정도 모여서 함께 연구하고, 토의하고,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 문제가 그저 학문적인 것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깊이 생각해 보고 자신이 발견한 것을 실제로 어떻게 이행할 수 있는지 토론해 보라. 공부할 때마다 찬양과 기도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을 잊지 말라. 함께 토의할 때 성령님이 말씀해 주시기를 간구하라.
_“연구 문제”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