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에서는 불법이 마음[心]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성불’하려는 마음을 내기 시작하면 허망(虛妄)한 마음이 내려앉고, 다시 청정한 마음이 되어 열반에 증득해 들어가기를 기다린 다음, 마음은 다시 미혹되지 않으며 계속 줄줄이 이어지던 번뇌도 모두 사라지게 된다. _ 007쪽
이 경전에서 “그 마음을 항복받는 것”이라 함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조성된 불안한 번뇌의 요소를 항복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그 마음을 항복받는 것”은 말로는 매우 간단하고 쉬운 것 같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생의 마음은 실제 굴복시키기 매우 어려운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사람의 ‘마음’에 늘 욕망, 의망, 이익 혹은 추구함이 있고, 언제나 사고와 해결을 필요로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정보가 폭발적으로 쏟아지고 지식이 팽창하면서 욕망도 덩달아 강렬해지고 사람의 마음도 갈수록 굴복시키기 어려워졌다. _ 030쪽
비록 진정으로 성불하는 경우가 결코 많지는 않지만, 무상보리를 수행하기로 발원하는 것은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예컨대 하는 일에 점점 전념하게 되고,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데 있어 마음이 평화로워지게 되며, 더욱이 인생으로 하여금 두 번 다시 물결치는 대로 휩쓸리지 않게 할 수 있어서 세속적인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가운데 자신을 주도할 수 있고, 만족을 알며 늘 즐거울 수 있게 된다. _ 034쪽
불법을 언급하면 많은 사람들은 “깊은 산 시골 절에서 등잔불 켜고 옛날 책을 보는[深山野刹, 古卷靑燈]” 장면을 떠올린다. 그러나 사실상 불법은 세속으로 내려와 번뇌가 가득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현실 세계와 뗄 수 없는 밀접한 것이다. 설사 승려들이 모두 깊은 산속의 오래된 사찰에서 생활하여 세상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불법은 또한 시공을 초월하여 속세인들의 정신세계, 심지어는 생활 태도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_ 035쪽
설법의 도입은 평범한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부처님의 교육 수단은 이미 매우 높은 단계에 이르러, 먹고 입고 머물고 걷는 모든 것이 설법임을 보여준다. 탁발하러 갈 준비를 하는 것에서부터 부처님께서 좌선을 하는 데 이르기까지 사소한 행동마다 모두 불법의 지혜가 가득하며, 진리의 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모든 과정이 보살도를 수행하는 육바라밀을 몸소 가르치는 ‘부처님’인 것이다. _ 081쪽
부처님의 일거수일투족, 즉 먹고, 입고, 머물고, 걸으며, 나가고, 들어오고, 앉고, 눕는 것은 물론, 모든 것이 다 저절로 위의가 있다. 이것은 비구 대중은 물론 부처님을 따르는 모든 중생들이 본받기 쉬운 좋은 귀감이 된다. 이러한 먹고 입는 일상 가운데 참마음에 편안히 머무르고, 허망함을 굴복시킬 수 있어야 참된 능력이다. _ 085쪽
수행하려면 우선 출세해야 하지만 입세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시작하면서 단지 자기 해탈을 위한다. 타인의 복을 도모할 것을 생각하며 시작하는 이는 소수이다. 그러나 불법이 가리키는 큰 도에서 자아 해탈을 완성하고 싶다면 반드시 먼저 이기적인 생각을 내려놓고 ‘소아’를 버려야 한다. 보살도를 수행하는 데 “자신을 제도하는 것[自度]”과 “남을 제도하는 것[度人]”은 한 가지 일이다. _ 087쪽
후대 사람이 점수와 돈오를 말할 때 종종 단편적으로 양자의 대립을 과장하여 이 둘을 물과 불처럼 병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심지어 양자에 높고 낮은 구별이 있다고 독단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 이 둘은 불법에 있어서 결코 높고 낮음이 없다. 단지 수행 단계와 도달하는 경계가 다른 것뿐이다. 수행의 초급 단계에서는 차츰차츰 수행해 차례로 나아가는 것이 비교적 실용적이며, 이것은 지식을 축적하고 역량을 높이는 과정이다. 수행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다음 선정의 힘과 지혜가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서야 돈오를 통하여 질적인 도약을 실현할 수 있다. _ 093쪽
성불하겠다는 마음을 낸 선남자와 선여인을 “보살”이라고 하며, 이는 부처님의 그들에 대한 격려이자 요구이기도 하다. 보살은 위로 불법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는데, 비록 아직은 공덕이 원만하지 않더라도 갈수록 부처님께 가까워진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여기에서 여러 선남자와 선여인이 진정한 보살을 배우고, 신념을 굳게 다지며, 용기를 북돋우고, 온몸과 마음을 다해 성불하여 도를 깨닫는 고된 수행에 몰두하도록 타이르신다. _ 110쪽
자신이 벗어나는 것과 중생을 데리고 함께 벗어나는 것은 다르다. 따라서 대승 불법에서 말하는 많은 것은 자신을 버리고 남을 위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목숨을 건지는 방법을 찾지 못했을 때는 모두를 구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승 불법을 닦는 데 전제되는 것은 소승의 능력과 토대이다. 따라서 두 가지는 결코 충돌하지 않으며 그 수준만 다른 것이다. _ 114쪽
보살은 널리 중생을 제도할 때 마음속에 네 가지 상에 대한 집착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어떠한 번뇌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네 가지 상이 마음에 걸려 있으면 해탈을 할 수 없고, 삼계의 중생을 널리 제도할 수도 없으며, 더욱이 보살이라 칭할 수도 없다. _ 123쪽
보시는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 등으로 구분된다. 예를 들어 돈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돈을 보시하고, 돈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격려해 주며, 만약 생계를 도모할 손재주가 있으면 그 손재주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보살은 물질적인 자산을 보시하지 않는다. 한 사람에게 몇 마리 물고기를 주어 목숨을 살려 주는 것이 고기 잡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만 못한 것처럼, 보살이 중생에게 보시하는 것은 운명을 마주하는 용기와 번뇌, 고통을 없애는 묘법이다. _ 131쪽
상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가 얻는 복덕은 넓고 커서 헤아릴 수가 없다. 상에 머무르는 보시는 얻는 공덕이 한계가 있어 얼마나 크든 간에 결국 유한하다. 그러나 상에 머무르지 않는 대지혜로 보시를 베풀어 모든 중생이 다 같이 성불하는 대사업에 기여하면 그 복은 장차 무한하여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_ 133쪽
요컨대 심오한 반야 불법에 대해 참다운 신심을 일으키고자 하면 반드시 계율을 지키고 복을 짓는 시련을 겪어야 한다. 이것이 불법을 배우는 인과의 논리이다. 다시 말해 지계(持戒)와 수복(修福)의 바탕을 겪지 않으면 반야를 수습(修習)할 수 없는 것이다. 인과논리를 위배하여 토대를 피해 억지로 나아가면 그 반야는 공중에 세워진 누각에 불과하다. _ 164쪽
도(道)는 방법으로서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따라서 방법은 궁극적으로 귀의할 곳이 아니다. 여러 비구 나한들은 비록 ‘도’를 얻어 가없는 번뇌로부터 해탈하였지만, 이 ‘도’에 미련을 두면 안 된다. 진세(塵世), 번뇌는 모두 오온으로 형성된 것이고, 성불의 법 역시 인연가상(因緣假相)이다. 인연이 다하면 버려야 하는데, 그 가운데 집착하면 방향을 잃게 될 뿐이다. _ 172쪽
『금강경』의 사구게는 “모든 유위의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하여라[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라는 게를 의미하고 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만약 모습에 의해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에 의해서 나를 찾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고 있으므로, 결코 여래를 볼 수 없다[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는 게를 가리킨다고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사구게를 『불설대승금강경론(佛說大乘金剛經論)』에서 논하는 ‘공신(空身)’?‘공심(空心)’?‘공성(空性)’?‘공법(空法)’의 네 가지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사구게가 어느 것을 가리키든 모두 『금강경』에서 설하는 반야성공(般若性空)의 핵심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_ 180쪽
마음을 내면 차별상을 떠나야 하고, 수행에 머묾이 없어야 한다. 마음이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으면 비로소 세속의 번뇌에 가림이 없게 되고, 맑고 깨끗하며, 때가 없게 된다. 한 번의 고생스러운 수행으로 평생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내면 한평생 맑고 깨끗한 자성에 나아가야 하며 탐욕과 얻음도 없어야 한다. 그럼 얕은 데로부터 깊은 데로 들어가 부처님이 계신 곳에 가까워질 수 있다. _ 220쪽
성문승의 사과, 연등불의 수기, 보살의 장엄한 정토 등은 모두 같은 의미를 나타냈는데, 바로 상을 떠나 인(因)를 닦아야 할 뿐만 아니라, 과위를 얻었더라도 마음에 머문 바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과보의 신상이 그 크기가 수미산왕과 같이 크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여전히 유한한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일단 표면의 크기를 탐내지 않으면 바로 측량할 수 없는 법신(法身)을 얻을 수 있다. _ 224쪽
더 많은 칠보를 보시하여 복덕을 얻더라도 마침내 그 복덕을 다 누릴 때가 있으므로, 이것이 바로 유루(有漏) 복덕의 상이다. 『금강경』은 사람에게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머물지 않아야 함을 가르치는데, 이러한 금강반야를 전한다면 반드시 번뇌를 모두 끊어 없앨 수 있고, 무상정등정각을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은 무루(無漏)의 큰 복덕이다. 이러한 무루의 대복덕은 유루의 복덕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_ 228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