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을 어떻게 읽고, 삶에 적용할 것인가?
불교의 인문적 해석과 실천을 통찰한 책
이 책은 스님이 입적하기 전 2000년 1월부터 2001년 12월까지 2년간 월간 「불광」에 연재한 글이다. 때문에 스님의 입적 전 불교적 인문의 사유를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텍스트이다. 이 책은 불교인뿐 아니라 불교를 이해하는 이들이 삶 속에서 생각해봐야 할 24개의 주제를 제시하고, 각각의 주제를 경전에서는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지 살폈다.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경전의 내용이 주는 메시지의 인문적 해석이다. 곧 경전을 통해서 인간의 실존과 삶, 그리고 사회와 역사와 문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는 출가 이후 ‘경전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며, 실천해야 하는가?’란 문제의식과 연결되며, 그 물음은 ‘불교의 인문적 해석과 실천’이라는 저자의 통찰과 맞닿아있다. 특히 저자가 맨 처음 올린 「붓다」의 해석은 불교의 메시지가 어디를 향하는지, 통찰력있게 보여준다.
“나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고
인간으로 성장하였으며
인간으로서 붓다를 이루었다.”
『증일아함경』 권28, 「청법품」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는 이 경전 문구를 처음 접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만큼 여기에 등장하는 경전의 내용과 해석들은 우리의 불교적 관념체계를 적지 않게 흔든다. 이 경전 내용이 주는 메시지를 스님은 어떻게 그려낼까.
“부처님은 스스로 인간임을 선언한다. 불교는 신神의 존재를 상정하거나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을 철학적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無神論이라고 말하지만, 이와 같은 규정은 어디까지나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론有神論을 상대적으로 대비하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생겨난 것일 뿐 ‘불교는 무신론이다’라는 언급 자체가 상당히 애매한 규정인 것이다. 물론 불교는 ‘사람은 신앙으로써 거센 흐름을 건너고 정진으로써 바다를 건넌다. 근면으로써 고통을 초월하고, 지혜로써 완전한 청정의 경지에 도달한다’라고 설할 만큼, 신앙을 중시하며 부처님과 교법과 승가에 귀의하는 삼귀의三歸依를 기초적인 신앙의례로 삼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적어도 불교도에 있어 종교의 의미는 타율적인 심판을 내리는 절대자에 대한 피조물로서의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인간생활의 궁극적인 문제에 주목하고, 삶의 여러 갈등과 문제들을 해결하는 고차적인 신앙과 수행의 체계라는 점이다. 불교도들에게 있어 신앙의 의미는 단순한 ‘믿음’만이 아니라 ‘지혜’의 증장에 필요한 덕목이며 마음의 청정을 증득하는 기본 전제이다.”(11쪽)
또한 「불교에서 길을 묻다」란 주제에서 스님은 “불교는 메마른 도구적 지식만을 선택하지 않는다. 불교수행의 본질,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몸가짐(修身)과 마음닦음(修心)의 본질에 대해서 깊이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비와 지혜의 통찰이 담긴 몸가짐과 마음닦음의 실천은 모든 불교도들이 선택해야 하는 삶의 지표이다. 따라서 불교수행이 깊고 정교해지면 정교해질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성실하게 닦아가게 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항상 묻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핵심에는 몸가짐과 마음닦음의 문제가 관통하고 있다”(19쪽)라며 불교의 본질을 명료하게 짚어낸다.
「선」의 항목에서는 현대 한국선의 문제를 ‘위기의 선’으로 진단하며, 선이 마치 인스턴트식품으로 취급되는 것을 경계한다.
“선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대승불교 본래의 지혜와 자비를 망각한 선은 불교가 아니라 도교道敎다. 한국불교의 승가가 진정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계속 선禪이라고 한다면 선의 실참實參과 불교적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79쪽)
“아무리 선불교에 관한 정보가 컴퓨터에 의해서 대량으로 유통되고, 아무리 선 입문서들이 산더미처럼 출판되더라도 대승불교의 강인한 인간주의에서 출발한 선의 ‘내심자증內心自證 자각성지自覺聖智’라는 대주제가 일상의 실천으로 이행되지 않는다면 선은 동양사상의 아류로 전락한 채 ‘깨달음’이라는 허망한 독백만을 일삼게 될 것이다.”(83쪽)
「해탈」에서는 해탈의 신비성과 추상성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우리는 해탈이라는 말을 너무 안이하고 추상적이며 신비한 어감을 갖는 불교 용어로만 생각해 왔으며 그 결과 해탈은 현실의 초월이나 도피를 의미하는 사어死語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해탈은 그렇게 신비적이거나 집중적인 수행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수만 가지 멍에에 묶여있는 현대인이야말로 해탈이 필요한 존재들인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의 마음상태, 욕구에 대해 사색하고 탐진치貪瞋癡로 오염되어 있는 불순한 에너지와 거품을 걷어내면 해탈은 그렇게 추상적이거나 신비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99쪽)
「보리심」에서는 보리심이야말로 불교의 정신이 꽃피는 대승보살의 수행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가끔 스스로 삶을 내면으로부터 성찰하고 인간의 무력함과 이기심과 욕망의 추한 면들을 스스로 깨닫고 진실한 삶의 길을 구하려는 노력을 결심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젊은 날 세웠던 수없는 결심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무뎌져가더라도 역시 이 결심은 쉽게 버릴 수 없는 중요한 자각이다. 즉 우리가 아무리 욕망과 이기심의 유혹 앞에 쉽게 굴복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과 이기심의 집착에서부터 벗어나려고 강렬하게 희구한다. 그 결심이 서는 자리에서 바로 불교는 시작된다.”
「보살」에서는 보살이 대승불교의 실천자임을 말한다.
“지금 이 땅의 사람들이 어떤 삶의 척도도 찾지 못하고, 세상은 날로 무분별한 난장판의 극한으로 치닫는다. 오늘 인생과 사회를 말하는 고급 이론이나 현학적인 언어는 이미 진부하다. 그것은 이기심의 언어이며 교만의 언어이며 탐욕의 언어일 뿐이다. 젊은이들이 학교와 종교에서조차 어떠한 삶의 척도도 찾지 못하고, 자살 사이트와 폭탄 제조 사이트에 빠져 있을 때 혼자만의 성불이나 견성은 그렇게 그윽하고 우아하기만 한 것일까? 불교의 실천에 관한 많은 논의들이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실천이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없다는 것이다. 말만 실천을 앞세울 뿐 그 실천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 논의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실천도 일회적인 캠페인에 불과하다. 불교가 진정으로 가장 행복한 인생, 가장 밝은 사회를 염원하는 인류의 사라지지 않는 꿈이며, 동양의 종교와문화적 정체성을 대표하는 종교로 거듭나고자 한다면, 지금 이 땅에서 우리의 이웃들이 어떻게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지 보살의 눈, 보살의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181쪽)
「정토」에서는 어디에서 정토신앙이 출발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정토신앙의 본질은 구원이다. 정토신앙은 예토穢土의 오염을 반성하고 자신의 나약함을 진솔하게 인정한다. 결국은 소멸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로서 아미
타부처님의 대자비와 본원本願에 귀의하여 정토를 희구한다. 정토신앙은 나약한 인간이 절대자의 힘을 빌리는 연약한 신앙일까. 아니다. 숙업의 올가미에 묶여 있는 연약한 인간,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의 어두운 나락을 깊이 응시하여 스스로의 죄업을 참회하고 탐욕과 무지, 항상 죽음의 그늘에 덮여 있는 유한한 예토에서 정토를 구현하려는 신앙이다. 인간 스스로의 나약함과 유한함을 진솔하게 인정한다는 것은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 작은 깨달음이야말로 정토신앙의 출발점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