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많이 바뀌기도 했고 어떤 면에서는 답답할 정도로 그대로다. 살고 싶은 대로 살았기에 김애순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혼이 특별하지도 별나지도 않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삶이기를 바란다. --- p.21
진송: 지하철 신문가판대에서 선생님이 표지 모델을 한 월간지 〈나들〉을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선생님의 사진은 모노톤이었고 그 아래에는 빨간 배경 위의 하얀 글씨로 ‘나, 비혼주의자’라는 카피가 새겨져 있었죠. 〈한겨레〉에서 발행한 〈나들〉은 선생님의 이야기가 담긴 2013년 1월의 3호를 거쳐 2014년 7월을 마지막으로 발행을 중단했지만, 많은 비혼들에게 〈나들〉은 김애순으로 기억되기도 할 거예요. 제게는 역사적 인물이나 종교인이 아닌, 심지어 ‘스스로’ 결혼하지 않기로 선택한 70대의 비혼 여성이라는 존재가 살과 뼈를 가진 구체적인 현실로 제 앞에 처음 나타난 대사건이었어요. 막연하게 마음속으로 비혼을 결심만 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좀 더 적극적으로 자료 조사도 하고, 인생의 계획도 새로 세우기 시작했어요. --- p.25
애순: 경제적인 독립이 없으면 언감생심 비혼을 생각이나 할 수 있나. 이제는 ‘결혼 꼭 안 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젊은이들이 많이 하니까 결심은 훨씬 더 쉽죠. 하지만 실천에는 역시 첫째도 경제력, 둘째도 경제력이야.
진송: 결심과 실천 사이에는 역시 현실적인 문제가 있네요. 경제적 독립이 임금 구조와 복지 제도의 문제라면, 결심은 멘탈 관리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 p.28
진송: 개인의 불안은 결국 사회구조와도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험난한 ‘결혼지상주의’를 개인의 능력으로 모두 헤치고 오셨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개인의 단호한 결의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특별하지 않아도, 강하지 않아도, 엘리트 여성이 아니어도, 결혼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애순: 별로 무서울 거 없어요. 비혼으로 살면 엄청 좋은데. --- p.29
진송: 1990년대부터 ‘미혼’ 대신 ‘비혼’이라는 표현을 쓰자는 여성 단체의 운동이 시작되었죠. 개인적으로는, 언젠가 결혼할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아직 미--- p.未)자 대신 아닐 비--- p.非)를 쓴 명명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p.30
진송: 자식 운 같은 것도 얘기 안 해요?
애순: 안 하던데요.
진송: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사주….
애순: 진송 씨는 자식 운 있대요?
진송: 기억이 안나요.
애순: 하나도 안 궁금한가 봐.
진송: 티 났어요? --- p.36
애순: 나는 이렇게 했으니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말하고 싶진 않아요. 각자 상활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잖아요. 사는 방식에서 누가 더 낫거나 부럽다고 생각하면 자존감만 떨어지고 끝이 없어요. 나는 다른 사람들 보면서 부러워한 적은 없어요. 그냥 자기 삶에만 집중하세요. 아, 건강을 챙기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니 시간을 내서 꼭 하라고 말하고 싶네요.
--- p.41
진송: 비혼에 대한 대표적인 선입견 중 하나죠. 이기적이라거나, 자기밖에 모른다거나, 감정이 메말랐다거나. 연애와 결혼이 사랑이라는 개념을 독점하고, 풍부하고 다양해야 할 사랑이라는 감정의 대표격이 이성애가 되어버려서 그런 것 같아요. 비혼을 결혼시장에서 낙오한 사람으로만 보니까 자꾸 성격상의 문제점을 찾아내려 하고요. --- p.45
나는 비혼이 완벽해서, 기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서, 결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비혼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삶이 더 나에게 맞고, 내가 원하는 모습이고, 그에 수반하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특별하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며, 결혼할 자유만큼이나 중요한 ‘결혼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고 싶을 뿐이다. --- p.52
조선시대에는 ‘나이 들었으나 남편과 자식이 없는 여자들’을 ‘독녀’라고 불렀다고 한다. 과부와 혼용되어 쓰이기도 했지만 구별되는 존재였던 독녀는 국가의 특별 관리대상이자 ‘불성인: 온전치 못한 존재’로 불렸다. 조선시대의 독녀는 연약하고 불쌍한 타자로 여겨졌지만, 국가의 뜻대로 피해자로만 남지는 않았다. 참고한 논문을 읽어보면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세심하게 조선이라는 국가가 이 ‘불성인’들을 돌보고, 때로는 그들과 충돌했음을 알 수 있다. --- pp.74∼75
애순: 곁에 사람을 두는 게 중요해요. 특히 결혼을 안 하면 나이가 들어서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가족이 사라지는 거예요. 가족이 없다는 거, 이게 막상 겪어보면 생각보다 막막하더라고. 그래서 나는 친척들하고도 연락을 유지해서 나의 존재를 어필하고, 내가 무슨 말을 할 때 친척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애썼죠. 나한테는 그게 기쁨으로 돌아와요. 특히 친척들 간에 중재자 역할을 할 땐 결혼해서 자식 키운 것보다 나은 일을 한 것 같고. --- p.91
진송: 1990년대에 만드신 독신여성단체 한마음회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국내 최초였죠? 처음이다 보니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점이 많았을 것 같아요. 가입할 수 있는 비혼 여성의 자격 조건이 따로 있었나요?
애순: 범위가 좀 넓었어요. 그땐 비혼이라는 말도 안 썼고 독신이라는 말이 단체명에 들어가니까 말 그대로 혼자 사는 여자들 위주로 모집했거든. 독신여성단체라고 불렸는데 공식적인 이름은 ‘한국여성한마음회’였지.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결혼했다가 이혼한 여자들이 가입하기도 했어요. 자식이 있어도 상관없었고. --- p.100
우리 사회가 감춰온,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종종거린다. 결혼이 ‘무엇’을 ‘왜’ 빼앗아가는지에 대
해서, ‘스윗홈’이라고 부르는 것이 은폐하고 지우는 차별과 폭력에 대해서, 비혼을 병리적 현상으로 규정하는 권력에 대해서. 또 비혼으로 어떻게 잘 살아남을지에 대해서. 그리하여 결혼하지 않으면 비참한 말로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겁박하고 모두를 ‘어머님’과 ‘아버님’으로 호명하는 이 사회에 어떻게 엿 먹일지 고민하며 산다. --- p.113
진송: 비혼을 바라볼 때 결혼의 문제점에만 초점을 맞추면 결국 대안은 ‘좋은 결혼’ ‘문제점이 개선된 결혼’이 돼요. 저는 그보다 비혼이 다양한 삶의 방향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고 내가 결혼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차별이나 제약에 부딪히지 않는 세상을 원해요. --- pp.123∼124
애순: 나는 장례식 안 하기로 결심했어요. 죽으면 끝인데 뭐. 누가 오거나 말거나 죽은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혼자라는 상황이나 조건에 구애받지 마요.
진송: 진짜 쿨하시다니까요 (웃음). --- p.128
애순: 슬프긴 뭐가 슬퍼요. 식당에서 혼자 앉을 자리 없다고 안 받아줘서 맛있는 거 못 먹는 게 제일 슬프지. 요새는 음식점에도 혼자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많이 생겼더라고요. 예전에는 작은 테이블 자체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바쁜 시간에 혼자 먹으러 가면 눈치가 보였던 거야. --- p.150
진송: 한편으론 그렇게 위험한 일을, 어른이 되기 위해 여성에게 강요하는 게 너무 이상해요. 남자들은 자기 몸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데, 그럼 평생 어른이 될 수 없는 거잖아요. 여자들만 아이를 낳는데, 여자들만 어른이게요? 그렇게까지 출산과 어른을 연관 짓는다면 저는 그냥 출산의 고통을 모르고 진정한 어른이 되지 않는 걸로 할래요. 굳이 진정한 어른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선생님도 수양딸과의 관계에서 모성을 느끼셨잖아요. 이제는 사회적 모성에 대해 논의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독박육아에 맞서 사회적 육아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고요. --- p.236
진송: 결혼 안 하는 걸 이기적이라고 하는 사람한테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게 희생이라는 걸 아니까, 이기적이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받아치면 되겠네요. 결혼과 육아가 좋은 거면 결혼 안 하는 사람한테 ‘이기적이다’라고 하면 안 되죠.
애순: 결혼을 할지 말지는 남 위해서 결정하지 마요. 선택은 늘 자기 행복하려고 하는 거여야지.
진송: “어쩔래? 이기적인데” ‘스웩’ 넘치게 이겨내야겠네요. --- p.238
진송: 최근의 이런 이야기는 연애를 능력과 연관 짓는 건 자기계발 논리와도 연관이 있어서 선생님에게는 조금 낯설 수도 있겠네요. 2000년대 초반부터 자기가 열심히 자기 관리하고 노력하면 연애할 수 있다는 연애 문화가 팽배했어요. 연애가 개인의 능력 여부를 판가름하는 성적표가 되면서 대놓고 조롱하거나 놀리기도 하거든요. 얼마 전에 미국의 ‘훅업’, 우리나라로 치면 헌팅 문화에 대해 분석한 걸 봤더니 요즘 미국 십대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건 이성에 대해서 ‘절박해 보이는’ 거래요. 인기가 없어서 상대의 유혹을 애절하게 기다리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이런 현상들이 10대, 20대에게는 연애에서 나타나고 결혼 적령기로 넘어 가면 결혼으로 옮겨 가는 거죠. ‘니가 매력이 없으니까, 니가 자기 관리를 못하니까 결혼을 못 한다’ 같은 편견에 부딪히는 거예요.
--- p.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