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파스칼 시대에 세계와 사회, 교회와 신학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모델에 대한 새로운 파라디그마의 계기가 주어졌다. 그것은 원천적으로 신학과 교회 안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밖에서 왔다. 급속도로 “세속화하는” 세계로부터, 교회와 신학의 후견에서 “해방된” 사회로부터 온 것이었다. [……] 17세기까지 서양 문화는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근본적으로 기독교에 의해 규정되고 관철되어왔다. 그러나 이제 정신생활은 교회와 관계없이(교회가 칸막이를 쳤으므로) 전개되었고 점점 교회와 등을 돌리게 되었다. 흔히 말하듯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 p.13~14
그러나 이 근대적 파라디그마의 “일급 개혁자들” 가운데서 파스칼이야말로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예리하게 인간에 대한 중대 결론을 도출해냈고, 인간의 근본적 상반 감정을 비할 데 없이 명료하게 분석한 사람이다. 그는 인간 성격의 양면성을 모든 가능한 상황·관습·우연성 속을 파고들면서 냉정하게 묘사했다(그는 이미 키르케고르, 도스토옙스키, 니체, 프로이트와 카프카에 앞서 심리적으로 이 문제를 들추어낸 사람이다). 파스칼은 “반론으로 진실을 제기하는” 사상가, 탁월한 변증가였다. --- p.21
물론 뒷장에서 더욱 상세히 다루어지겠지만, 키르케고르, 도스토옙스키와 카프카, 하이데거, 야스퍼스와 사르트르 또한 마침내 다음과 같이 외친 파스칼보다 결코 더 드라마틱하다고 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인간이란 무슨 망령된 것인가! 무슨 신발명품이며, 무슨 괴물이며, 무슨 혼란이며, 무슨 모순의 주체이며, 무슨 놀라운 것인가! [……] 진리의 관리인이자 불확실성과 오류의 하수구다. 이 세계 모든 것의 영광이자 쓰레기이다.” 이런 마당에 철학은 무엇일 수 있는가? 여기서 철학은 도대체 끝장난 것은 아닌가? 사실상 파스칼에게 이런 점에서 완전히 놀라운 전기轉機가 생겨났다. “교만한 인간아, 너 자신이 얼마나 역설적인지를 인식하라.” 인간에게 모순의 해결을 전혀 기대할 수 없고, 인간은 자기를 능가하는 다른 어떤 것을 촉구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지상의 요청임이 분명해진다. --- p.23
레싱은 드라마나 신학 분야에서도 혁명가라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합법화하기 위해 옛것을 노련하게 이용하는 개혁자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그 누구보다 훨씬 과도기에 있음을 의식한다. 즉, 온 인류와 함께 “완전한 계몽주의” “완성의 시대”로 가는 도정에 있다는 것이다. 그 완성의 시대에 인간은 선을 행할 것이다. 선은 보답받기 때문이 아니라, “선은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싱 자신은 최후에 머리와 가슴 중 무엇에 의존하였을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 확실한 것은 이 『나탄』의 시인이 자신의 청년 시절 꿈들에 충실했고, 자유재판에 의해 명예를 박탈당해 감금되어 있다가 레싱 자신의 중재에 의해 구제되었던 한 유대인의 품에서 겨우 52세에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 p.123
[……]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열려 있다. 완성되어 있지 않으며 변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심리학 도식에 일치되기를 거부하며, 독자에게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능력, 알려져 있지 않던 면모를 드러내는 능력, 자기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 자기 배후로 물러날 수 있는 능력, 타자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능력, 오늘은 신이었다가 내일은 악마가 될 수 있는 능력, 여기서는 냉소가였다가 저기서는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는 능력, 이 같은 놀라운 힘이 바로 자기 성격의 비밀이라는 사실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 p.3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글쓰기는 기도의 형식이다. 광기에 이르기까지 몰고 가는 사냥, 내면의 최후의 한계를 향한 돌진이다. 왜? 카프카의 관심사는 그 지평 내에서는 질문이 있을 뿐 어떤 대답도 없는 자기이해와 세계이해를 시적으로 규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미결 상태다. 아무리 사소한 존재에게도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명제, 도스토옙스키의 경우에는 다만 인물들에게만 타당했던 이 명제가 카프카에 이르면 텍스트의 모든 세부에까지 통용되는 명제가 된다. --- p.402
예수와 도스토옙스키, 신학과 문학, 양자는 부조화의 조화라는 면에서 일치한다. 이 부조화의 조화의 폭과 다가치성을 규명하는 것이 지금까지 여덟 작가의 초상화를 그려온 목표였다. 야누스처럼 양면적이고 풍부한 대립을 안고 있는 작가들에 대한 이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문학의 가능성이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인가를 보여주려고 했다. “타자” “최후의 근거” “무제약자”를 시야에 끌어들이는 작업이 필요하고, 그 시야가 인간을 세상에 붙잡아두지만 인간에게 불투명한 채로, 양가성으로, 의미를 생성하는 암흑의 심연으로, 존재를 규정하는 수수께끼로 남아, 오직 문학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라면 말이다.
--- p.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