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구 협정’ 이후 만저우 지역의 처리 문제를 놓고 도쿄 내각과 관동군 그리고 푸이와 그의 고문들 사이에 여러 논의가 오갔다. 결국 푸이의 기대대로 푸이가 황제 신분을 회복하는 데 의견이 모였다. 1934년 3월 1일 만저우국의 새로운 수도라는 뜻에서 ‘신징(新京, 신경)’으로 개명한 창춘(長春, 장춘)의 동쪽 외곽에 위치한 톈탄(天壇, 천단)에서 푸이가 황제 자리에 올랐다.(만저우국 수립) 새로운 연호로 ‘강덕(康德)’이 선포되어 형식상의 칭제건원(稱帝建元)이 모두 이루어졌다. 그러나 푸이는 명목상의 황제였을 뿐 아무런 실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모든 것은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된 장관 대리회의에서 결정했다.
1934년 4월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수도 루이진의 관문인 광창(廣昌, 광창)이 함락되었다. 공산당군이 마오쩌둥의 유격전을 포기하고 오토 브라운의 진지전으로 전환한 대가는 참혹했다. 공산당군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국민당군의 공세에 맞서 사투를 벌였으나 루이진 함락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초여름부터 공산당 중앙에서는 탈출 방안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철수에 앞서 선발대가 몇 차례 포위망을 뚫고 탈출을 시도했다.
1934년 7월 팡즈민이 이끄는 북상항일선견대(北上抗日先遣隊)가 푸졘 북부에서 봉쇄를 뚫고 탈출했다. 그러나 이 부대는 북상하던 중 국민당군에게 포위되어 궤멸하였다. 8월에는 징강산 지구의 샤오커(蕭克, 소극), 왕전(王震, 왕진), 런비스(任弼時, 임필시)의 부대가 탈출에 성공해 허룽이 이끄는 부대와 합류해 제2방면군을 결성했다. 한편 쉬하이둥(徐海東, 서해동)과 우환셴(吳煥先, 오환선)이 이끄는 제25군이 후난과 안후이 경계에 있는 근거지를 떠나 산시(陝西, 섬서)로 이동해 새로운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국민당군은 포위망을 더욱 좁혀 갔다. 공산당군의 조사 결과 포위망 가운데 광시와 광둥 지역군이 맡고 있는 쟝시성 간저우(?州, 감주)와 후이창(會昌, 회창) 사이 지역이 그나마 취약한 편이었다. 이곳은 포위망의 서남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이곳을 돌파하면 북쪽에 진을 치고 있는 국민당 주력 부대보다 한발 앞서 진군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 이후에 대한 계획은 달리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출발 날짜가 갑자기 결정되는 바람에 출발 준비는 일주일 만에 이루어져야 했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투쟁이라기보다는 궁지에 몰릴 대로 몰렸다가 맹목적으로 도주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때 마오쩌둥은 실권을 잃은 데다 말라리아를 앓고 있어 저우언라이가 철수 전략을 지휘했다. 부대는 크게 10만의 장정군(長征軍)과 3만의 잔류 부대로 나뉘었다.
장정에 참여한 부대 중 당시 27세의 린뱌오가 지휘한 제1군단과 36세의 펑더화이가 지휘한 제3군단이 최전선 돌파를 맡았고, 중앙상무위원회 위원들과 정보원, 사관생도, 지휘 종대 등 소비에트 요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2만 8천 명의 잔류 병력은 대부분 걸을 수 없는 부상병들이었다. 여기에는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탄(毛澤覃, 모택담)과 폐결핵에 걸려 걸을 수 없었던 취츄바이 등도 포함되었다. 홍군이 떠난 직후에 마오쩌탄은 국민당군과의 교전 중에 죽고, 취츄바이는 체포되어 처형됐다. 잔류한 병력뿐 아니라 장정에 참여하지 못한 부녀자들 역시 크게 고초를 겪거나 처형당했다.
1934년 10월 16일 장정이 시작됐다. 그것은 쟝졔스 군대가 마지막 포위 공격을 시작한 지 꼭 1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로부터 꼬박 1년 뒤인 1935년 10월 20일까지 370여 일 동안 이들은 1만 2천 킬로미터의 고난에 찬 행군을 지속해야 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위대한 투쟁의 역사였다. 그때까지 갖가지 시행착오와 오류를 거듭했던 중국 공산당은 장정을 거치며 처절한 성찰과 모색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 시련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꿈꿀 수 있었고, 그것을 실현할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1년의 시간 속에 많은 사람이 스러졌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갑작스레 떠난 길이었기에 초기에는 구체적인 목표나 매일매일의 행군 계획도 없이 밤이면 걷고 새벽에는 쉬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이들은 서쪽을 향해 거의 직선으로 후난을 가로질러 토치카와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국민당군의 봉쇄망을 뚫고 후베이와 후난 서부에 있는 허룽과 샤오커의 제2방면군과 합류하려 했다. 하지만 국민당군이 이를 탐지하고 홍군 행렬을 비행기로 공격했다. 홍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초기 한 달 동안에만 2만 5천 명이 사망했다. 마치 피난민 대열을 연상시키는 홍군의 행군은 지나치게 많은 장비와 짐으로 지체되었다. 결국 불필요한 짐들이 버려졌고 운반병들의 탈영도 이어졌다.
11월 말 국민당군의 최후의 봉쇄망인 광시성의 샹쟝(湘江, 상강) 도하 작전이 일주일간 계속되었는데, 여기에서만 3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부대는 국민당군에게 거의 잡힐 뻔했다. 겨우 샹쟝을 건너 12월 10일 후난과 구이저우(貴州, 귀주), 광시성의 경계인 퉁다오(通道, 통도)에 이르렀을 때는 병력이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이곳은 행진의 갈림길이었다. 여기서 곧바로 북쪽으로 내달리면 허룽의 제2방면군 근거지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이미 국민당군에게 간파된 이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은 전멸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었다. 병사들 사이에서도 불만과 동요가 일었다.
오토 브라운과 친방셴은 또다시 북상을 주장했으나, 마오쩌둥은 오히려 쟝졔스의 의표를 찔러 허약한 지방 군벌이 할거하는 구이저우로 들어갈 것을 주장했다. 모스크바 유학생인 친방셴과는 통역 없이 러시아어로 대화가 가능했던 오토 브라운은 마오쩌둥과 주더 등을 경멸했으며 평소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하지만 거듭된 실패로 대세는 이미 마오쩌둥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결국 당 중앙은 제2방면군과의 합류를 포기하고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구이저우로 향하기로 했다.
마오쩌둥의 예상대로 12월 14일 홍군은 손쉽게 구이저우 동쪽 끝 마을 리핑(黎平, 여평)을 접수했다. 장정 이래 최초의 승리였다. 홍군은 그곳에서 국민당군의 공격을 피해 이틀 정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사이 임시 정치국 회의를 열어 일직선으로 후퇴하는 전술을 포기하고, 그 대신 심지어 그들이 왔던 길을 되짚어가기도 하는 지그재그식 행군 전술을 채택하였다. 아울러 부대를 좀 더 기동력 있고 강행군을 견딜 수 있게 재편하는 한편, 행군에 지장을 주는 무거운 휴대품 등을 모두 버리게 했다. 그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그들은 리핑을 떠나 구이저우 제2의 도시인 쭌이(遵義, 준의)로 향했다. 그 남쪽에는 우쟝(烏江, 오강)이 흘렀는데, 강폭은 270미터에 강변은 양쪽 모두 가파른 절벽을 낀 천연 요새였다. 우쟝 도하 작전은 1월 1일부터 4일간 계속되었다. 홍군은 적의 강력한 포격 속에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 험준한 암벽을 올라 국민당군 거점을 기습했다. 1월 7일 홍군은 탈취한 국민당군의 군복과 군기를 이용해 적을 속인 뒤 쭌이에 무혈 입성했다. 장정을 떠난 지 2개월 반 만에 2,200킬로미터를 걸어 이곳에 도달한 것이다. 병력은 이미 출발 당시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홍군은 쭌이에서 12일 동안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할 수 있었다. 1935년 1월 16일부터 18일 사이에 홍군은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이른바 ‘쭌이 회의(遵義會議, 준의 회의)’에는 16명 혹은 18명의 당 정치국원과 후보 위원 그리고 7명의 군 지도자와 코민테른 대표 오토 브라운이 참여했다. 회의는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회의 결과 채택된 결의안에는 그때까지의 실패 원인을 짚어 보고 그들이 당면한 과제를 조망하는 내용이 담겼다. 결국 홍군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현 지도부가 유격전을 포기하고 소극적으로 진지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홍군의 힘이 소진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쟝시를 떠나는 과정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가 있었다. 소비에트에서의 철수는 전략적 후퇴가 아니라 공포에 질려 맹목적으로 도주한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현 지도부는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나 그때까지 작전을 주도했던 군사부장 저우언라이가 그러한 비판을 수용하고 직책에서 물러나면서 마오쩌둥이 지도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친방셴은 당 중앙에 전반적인 책임이 있는 인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오토 브라운도 군사 결정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막후 협상을 통해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전략상 장원톈을 새롭게 당 서기로 추대했고, 마오쩌둥은 정치국 상임위원회 주석으로 지명되었다. 사실상 마오쩌둥은 1931년 이후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주석 직위에 있었으나 당 중앙은 장악하지 못했는데, 이제 쭌이 회의를 통해 명실상부하게 중국 공산당을 지배하는 위치에 올랐고, 장정의 군사권을 손에 넣었다.
마오쩌둥은 회의 직후 당과 군 간부들을 모아 놓고 결의안 내용을 설명했다. 그것은 홍군의 임무가 단순히 전투를 수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중 활동과 대중 조직화에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는 동시에 ‘항일을 위해 북상한다(北上抗日, 북상항일)’라는 목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홍군은 이제 잠시 동안의 휴식을 마친 뒤 대오를 재정비하고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
---「대장정, 당신들에게 인류와 중국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