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한테는 몸속이 존재하지 않고, 내가 이리저리 들어갈 곳을 찾아 헤매는 표면만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이게 그녀를 고문했던 자들이 비밀을, 그들이 그게 무어라 생각했든 간에, 추궁하며 느꼈던 걸까? 처음으로 나는 그들에게 메마른 동정심을 느낀다. 몸을 지지고 찢고 베어서 다른 사람의 은밀한 몸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건 얼마나 자연스러운 착각인가! 여자는 내 침대에 누워 있다. 하지만 굳이 침대여야만 할 이유는 없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나는 연인처럼 행동한다. 나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그녀의 몸을 씻겨주며, 그녀를 어루만지고, 그녀 곁에서 잠든다. 하지만 똑같은 의미에서, 나는 그녀를 의자에 묶고 두들겨팰 수도 있다. 그렇다고 덜 친밀해지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 p.74
왜 내 몸의 한 부분이 불합리한 욕구와 잘못된 기대감과 더불어, 욕망의 통로로서 다른 어느 부분보다 우선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때때로 성기는 나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나한테 기생해 살면서 제 스스로의 욕망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고,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이빨로 내 살에 달라붙어 사는 우둔한 동물인 것 같았다. 나는 물었다. 내가 왜 너를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데리고 다녀야 하지? 네가 다리 없이 태어나서 그러냐? 네가 나 대신 개나 고양이한테 뿌리를 박고 산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 p.78
나는 생각한다. ‘혹은 어쩌면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틀린 말인지도 모른다.’ 내 입술이 움직인다. 소리 없이 말을 만들고 다시 만든다. ‘혹은 어쩌면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오직 살아내야 하는 건지 모른다.’ --- p.108
나는 소금 지대를 터벅터벅 걸으며, 내가 그처럼 먼 곳에서 온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게 놀랍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내가 원하는 건 낯익은 곳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내 침대에서 죽어, 옛친구들의 조문을 받으며 무덤으로 가는 것뿐이리라. --- p.125~126
나는 처음 감방에 들어와 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채워질 때 웃었다. 일상적인 삶의 고독에서 감방의 고독으로 옮겨가는 건 큰 고통이 아닌 듯했다. 생각과 기억을 갖고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게 얼마나 기본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어떤 자유가 남았는가? 먹거나 배고플 자유, 침묵을 지키거나 혼자 지껄일 자유, 혹은 문을 두드리거나 비명을 지를 자유이리라. 그들이 나를 여기에 감금했을 때 내가 불의, 경미한 불의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피와 뼈와 고기가 뭉쳐진 불행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 p.142
지금 이 순간 군중으로부터 큰 걸음으로 멀어지는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해진 건, 막 일어나려고 하는 잔혹행위에 내가 오염되지 않아야 하며, 또한 가해자들의 무기력한 증오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죄수들을 구할 수 없다. 그러니 나 자신이라도 구하는 길을 택하자. 언젠가 누군가가 이 일에 대해 얘기하게 된다면, 그리고 먼 훗날 누군가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면,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얘기를 할 수 있도록 하자. --- p.172
나를 고문한 사람들은 고통의 정도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육체 속에서, 육체로서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내게 보여주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온전하고 정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에만 정의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머리를 쥐어잡히고 파이프가 목구멍 속으로 쑤셔넣어지고, 그 속으로 소금물이 부어져 기침을 하고 구역질을 하고 몸부림을 치고 토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 싶을 정도로 빠르게 정의에 관한 생각들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육체로서 말이다. --- p.190
당신은 사람들을 그렇게 다룬 다음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가 있지? 그게 가능하오? 나는 이 질문을 하고 싶소. 이건 사형집행인들이나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내가 늘 물어보고 싶었던 거요.
--- p.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