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꽃이 예뻐 보인다’는 말을 무시하고 싶지만, 나의 경우에는 정말 그랬다. 향이 강한 꽃들을 먼저 기 억하게 되었다. 여름의 치자와 겨울 끝의 매화. 둘 다 내게는 ‘죽음’을 연상시키는 꽃인데, 특히 겨울 끝에 피는 매화가 그렇다. 10월 말부터 3월까지 죽은 가족들을 기억할 일이 줄줄 이 있는 겨울은, 그 시작도 끝도 감당하기 쉽지 않다. 할머니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를 보며 운 기억이 있으니 매화가 피는 시기와는 맞지 않는 편이지만, 매화 구경을 처음 갔을 때 나는 서늘한 계절에 피어나는 생명력에 기절할 정도로 놀랐고, 그것이 겨울의 절정이자 끝이라고 몸으로 알게 되었다. --- p.24~25
나는 벚꽃 구경도 단풍 구경도 많이 다녔는데, 그러다 생긴 요령이라고 하면 ‘낮을 포기하는 것’이다. 꽃과 단풍 이 난리인 교토의 성수기(3월과 9월)는 특히 악명 높은데, 일단 숙박비가 평소의 두 배가 되고 그나마도 빈 방을 찾기 어렵다. 유명하다는 관광지는 사람에 치여 죽을 것 같고 뒷사람에 밀려 원치 않아도 앞으로 앞으로 이동하게 된다. 밥 한번 먹으려면 맛집은 고사하고 어느 식당이든 일단 줄을 서야 하는 일이 다반사고, 절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버스는 당연 만원.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행인 점이라면 교토의 절은 관람 경로를 잘 만들어서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벚나무를 찍을 때 사람들이 바글바글 하게 찍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진에는 나무 홀로 요요히 서 있는 것처럼 나와도 실제 상황은 아수라장이라는 말이다. --- p.41
가레산스이의 주재료는 모래처럼 보일 정도로 아주 작은 자갈들이고. 수많은 자갈들 사이사이에는 열다섯 개의 크고 작은 돌이 놓여 있다. 고운 자갈들을 모가 성기고 사람 키만 한 큰 빗자루로 쓸어, 파도 같은 곡선의 무늬를 만든다. 매일 아침 이렇게 빗질을 하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같은 모양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니 오늘 당신이 보는 자갈 정원은 그저 오늘에 속했을 뿐, 내일과 모레 그 어디에도 없다. 돌은 늘 그곳에 있으니 그 또한 자연의 섭리를 반영하는 상징물이리라. 다소간의 이끼는 있으나 물을 쓰지 않는 가레산스이. 하지만 물길처럼 보이도록 자갈밭 모양이 잡혀 있어, 크고 작은 돌들이 전부 섬처럼 보이는 가레산스이. 이것은 ‘바다’다. --- p.54~55
일행이 있을 때보다 혼자 이 길을 걷는 게 더 좋은 이유는 쓸쓸하고 운치 있는 밤 산책에 딱 어울려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시끄러울 때 그 소리를 잠재우기 좋은 산책로다. 너무 길지도 않고, 너무 외지지도 않으며, 언제든 꺾어 돌아갈 수 있는. 조명 자체가 적당히 낮은 조도를 유지한 밤의 기온 뒷골목을 걷다 보면, 정말 달밤에 단추를 줍는 기분이 든다. 단추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나 자신에 대한 애틋함을 느끼는 것은 이런 밤의 시간에나 잠깐 허용될 뿐이다. 해가 뜨면 그런 감정은 소맷부리에 집어넣는다. 누군가는 버리는 것이지만 나는 버릴 수 없다. 나는 나를 버릴 수 없다. --- p.117~118
소중한 것을 잃어간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전부였던 시절을, 믿고 사랑했던 것들을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야 앞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가끔은, 거기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때가 있다. 그런 장소가 있다. 시센도에 걸려 있는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사진처럼 더 이상 그렇지 않은, 슬픔으로 끝난 관계들이 가장 반짝거렸을 때를 상기시키는 장소가 있다. 그 사람과 같이 방문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것들을 깨닫게 하는 장소가 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장소 찾기의 중독자들이다. 나에게는 시센도가 그런 곳이다. 처음 방문했던 때는 혼자가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분명 당신에게 도 그런 장소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직 찾지 못했다면 찾기를 포기하지 마시길. --- p.147
그 정원에는 언제나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있다. 개인의 사유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쾌락과 여유, 호화로움과 소박함이 있다. 모든 계절을 다 보았으니, 어느 계절에 가도 나는 정원을 보고 앉아 모든 계절의 흔적을 읽어낸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산책을 하던 어느 날엔가는, 내가 좋아하는 꽃내음이 났다. 치자꽃이다. (중략) 대중교통을 이용해 교토를 큰 별 모양으로 휘젓고 다니다 보면 언제나, 봄이라 행운이거나 여름이라 다행이거나 가을이라 행복하거나 겨울이라 복된 삶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무린안은 넓지 않고 붐비지 않아서 그런 생각을 더더욱 많이 하는 곳이다. 걷다가 지쳤을 때 정원을 보고 앉아서 물소리를 듣는다. 시간이 멈췄는지, 아니면 더 빨리 흐르는지 모를 일이다. --- p.185~188
가모가와 근처에 있는 소혼케 니신소바 마츠바 본점은 믿고 먹을 수 있는 니신소바 전문점이다. 청어가 면을 이불처럼 덮은 채 나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국물 에 기름이 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청어는 꽤 큰 크기로 한 덩어리가 나오는데, 면과 함께 청어를 한 입 깨물면 특유의 진한 단맛이 배어나온다. 날씨가 추우면 추울수록 정신을 잃고 먹게 된다. 추위도 추위지만 피로에도 달달한 이 국수 요리가 힘을 발휘함이 분명하다. 다 먹고 나면 누워서 자고 싶은 마음뿐이다.
--- p.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