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어 할 줄 안다는 것은
주저하거나 수줍어하는 것을 요즘은 거의 아무도 칭찬하지 않습니다. 수줍어하는 사람에게 “좀 더 적극적이 돼라”라고 요구하면서 도도한 사람에게는 “좀 수줍어해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수줍음이 인간적으로 아름다운 자질이라고 생각하는 관습이 이제는 없습니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아 머뭇머뭇하고 부끄러워하는, 자기 의견을 말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그래서 결국 상대방의 의견에 동조하고 마는 그런 사람은 현대 사회에서는 ‘자기결정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몰려 낮은 평가밖에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처럼 수줍음 타는 아이를 자기표현 잘하고 자기결정을 할 줄 아는, 자기 의견을 척척 말할 줄 아는 아이로 개조시키려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세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세요. 그것이 자유이고 그것이 인간의 권리인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자신의 본성이라든가 자유라든가 욕망이라든가 하는 것은 모두 ‘뇌’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 「1장_신체의 메시지를 듣는다」 중에서
뒤좇는 모드일 때 가장 잘 배울 수 있다
몸과 마음의 감수성을 최대한 민감하게 만들어서 눈앞에서 변화해가는 것을 미미한 간격을 두고 뒤좇을 때 신체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사제 관계에서 스승을 따라 하게 하는 것은 스승을 롤 모델로 삼아 흉내 내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롤 모델을 좇는’ 몸짓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뒤좇아 오도록 하는’ 그 자체가 교육인 것입니다.
--- 「1장_신체의 메시지를 듣는다」 중에서
‘정형화’라는 퇴행 옵션으로 도망치는 아이들
중학교 교사에게 학교 현장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학생들이 확 바뀌는 시기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라는 겁니다. 방학 전까지는 쭈뼛쭈뼛하고 애매모호하던 아이들이 방학이 끝나자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하고는 날라리 학생처럼 쭈그리고 앉아 교사를 째려보면서 “야, 너 짜증나거든” 하는 식으로 변해버린다는 겁니다.
저에게 이 이야기는 무척 인상적으로 들렸습니다. ‘9월 데뷔’를 한 불량 중학생들은 그전까지의 ‘말더듬이’ 상태에서 단번에 불량 청소년의 정형화된 틀에 자신을 맞춤으로써 사춘기의 심리적 위기를 회피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아이들도 내면과 자신의 말이나 신체, 몸놀림 사이에 어긋남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어긋남’을 어떻게든 조정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느릿느릿 구축해가는 그 힘든 과정을 참지 못해 기존의 정형화된 틀에 자신을 집어넣는 것으로 정신적 안정을 얻으려고 한 거죠.
그런데 중학생 한 명 한 명이 느끼는 위화감이나 불만, 불안감을 그렇게 쉽게 기존의 틀에 딱 끼워 넣을 수 있을까요? 원하는 색깔로 머리를 염색하듯 자신에게 딱 맞는 표현 양식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불량 청소년 A군과 B군은 가정환경도 다르고 학교에서의 위치나 언어 능력, 신체 감수성, 취미나 취향도 다르니까요. 그 모두를 ‘없는 셈’치고 기존의 정형화된 불량 청소년 틀에 자신을 딱 끼워 맞출 수는 없죠.
그들은 결국 그렇게 기존의 틀에 들어감으로써, 아무도 추체험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저마다 고유한 ‘내면과 외면의 어긋남’을 조정하는 힘든 일에서 도망쳐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기존의 ‘불량 청소년 타입’에 쑥 들어가는 것으로 스스로 ‘나다움’을 달성했다는 행복한 환상 속에 안주하게 됩니다. 다르게 말하면, 사춘기의 개성을 ‘똥값’에 팔아먹음으로써 자아 정체성에 대한 일종의 안정감을 사는 것입니다.
--- 「2장_표현을 세밀히 나눈다는 것」 중에서
감정과 몸짓을 세밀히 나눈다는 것
사춘기라는 것은 어쨌든 감정을 세밀하게 나누지 않으면 감당하기 힘든 시기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실을 수 있는 ‘더 애매한 표현’은 없을까? 이런 욕구가 사춘기 언어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니까요. 그래서 이 시기의 아이들은 열심히 고전 문학이나 외국 문학을 읽으려고 하는 거죠. 그런 작품 속에는 평소 일상생활에서 교사나 부모, 친구, 텔레비전 출연자들이 결코 말하지 않는, ‘듣도 보도 못했던 말’이 숨어 있으니까요. 그런 말 중에 자기 마음에 ‘와 닿는’ 말이 있기도 하거든요. ( … ) 그 시기에 얼마나 진지하게 감정의 칼집, 표현의 치밀화에 도전했는지가 나중에 그 사람의 커뮤니케이션 능력 발달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용할 수 있는 기호가 그렇게 하나하나 늘어간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상대방의 미묘한 표정이나 억양에서 아주 섬세한 심리 상태에 이르기까지 상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신체 메시지의 종류가 점점 늘어납니다. 정서의 풍부함이란 그런 것입니다. 나눌 수 있는 감정 표현의 종류가 많다는 것이죠. ‘정서’라는 건 아주 산문적으로 말하면 어휘나 표정, 발성, 몸짓으로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구별해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 「2장_표현을 세밀히 나눈다는 것」 중에서
누구도 그렇게 쉽게 남의 입장에 설 수는 없다
‘인간은 모두 똑같아서 비슷하게 생각하고, 비슷하게 욕망하고, 비슷하게 행동하고, 비슷하게 계산하며, 비슷한 것을 가치로 삼고, 비슷한 것에 아름다움을 느낀다’면서 ‘공감과 이해의 공동체’를 이상형으로 상정해버리는 것이 코먼웰스 이론의 한계입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한다’는 논리의 위험이 나오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모두가 서로 “네 마음 잘 알아” “알았어, 알았어” 하며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 자신과 다른 척도로 세상 일을 재고 있는 사람, 자신과 다른 단위로 세계를 보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 「4장_소통의 회로를 여는 소통」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