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것은 몽골에 가면 들판에 천지로 자라는 ‘피뿌리풀’이라는 식물의 존재를 제주의 오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피뿌리풀은 세계적으로 중국이나 부탄, 몽골, 네팔, 러시아 등지에 분포하고, 우리나라에는 황해도 일부 지역에서 자라는 북방계 식물이다. 북방계 식물이면 한라산의 선작지왓쯤에서 자라야 할 텐데, 낮은 오름에서 자라고 있다. 그들은 몽골인들이 타고 온 말 꼬랑지에 붙어온 것일까, 피뿌리풀 외에도 노랑개자리와 애기우산나물이 고향 얘기하듯 붙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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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림에 들면 사람들은 문명의 때를 벗고 일순간 과거 태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본능이다. 갑자기 열매가 따먹고 싶어지고, 다래덩굴을 잡고 습지를 건너려는 욕망이 불끈 솟구치고, 조그만 굴이라도 나타나면 하룻밤 잘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게 된다. 영혼의 진화가 덜된 탓일까, 본능에 이끌리는 힘이 강한 탓에 늘 원시의 숲을 꿈꾼다. 이제 육지부에서는 볼 수 없는 진귀한 원시 형태의 숲(곶자왈)을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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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못에는 제주말로 ‘붕애’라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 길이 2미터에 무게가 25킬로그램까지 나간다는 열대성 어종이다.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만 어슬렁 어슬렁 나와 먹이를 잡아먹는 천연기념물 무태장어다. 고향이 뉴기니아 섬과 보루네오 사이의 해구라니, 세계는 이렇게 얼기설기 엮여서 살아가고 있나 보다. 나 또한 내가 감지할 수 없는 많은 것들과 연결되어 살고 있고, 올레길을 걸으면서도 많은 것들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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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있는 커다란 섬잣나무들은 생애 주기에서 단계적으로 필요한 만큼의 빛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교란으로 인해 숲에 틈이 생기자 그 틈에서 살아남았거나 그 후 새로 들어온 씨앗들인 것이다.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 교란은 주기적으로 필요하다. 단계, 단계에서 적당한 교란이 큰 나무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조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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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강해 보여도 뿌리 끝은 혀처럼 부드럽다. 골무의 역할은 거친 땅속에서 아직 코르크화되지 않은 조직을 보호하는 것이며 딱딱한 바위를 뚫는 원리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뿌리 끝에서 점액질성분을 분비하면 딱딱한 고체 덩어리들은 부드러워지고, 점액질에는 적당한 수분과 영양분이 함유되어 있으므로 많은 토양미생물들이 서식하며 딱딱한 바위를 부식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가장 부드러워진 쪽으로 뿌리는 전진한다. 연약한 뿌리들이 앞으로 나아간 만큼 코르크가 덮으면서 보호해주고 직경생장을 통해 틈은 더욱 벌어지게 된다. 그렇게 해서 커다란 바위들은 쪼개지고 부서지면서 흙의 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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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좋고 나쁨은 있으나 그 땅에 누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성격은 달라진다. 아무리 좋은 터라 하여도 덕을 쌓지 못하면 오히려 해가 되듯이 이곳의 괴목대신도 평화롭게 살다가 갑자기 불어 닥친 개발의 광풍에 쓰러졌다. 줄기 주위를 콘크리트로 덮고 땅을 깎아 아스팔트로 포장하여 차가 다녔다. 뿌리는 호흡이 곤란해졌을 것이며, 유기물의 순환이 멈추면서 영양 상태가 나빠지고 저항력이 떨어졌을 것이다. (참고로 우리나라 노거수의 대부분은 새마을사업 때 콘크리트 포장을 해서 피해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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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줄기나 뿌리는 똑같이 직경생장을 하고 코르크화하기 때문에 한번 조르기에 걸린 나무는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 더구나 줄기가 직경생장을 할수록 깊숙한 곳으로 함몰되고 형성층은 이를 뛰어넘을 수 없으므로 고통은 배가된다. 잘못된 애정 표현은 상대방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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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진 국사의 지팡이가 자란 이팝나무는 해마다 5월이 되면 하얀 꽃을 피우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하얀 이밥을 연상케 한다. 이팝은 이밥에서 유래된 말로 이밥은 입쌀로 지은 밥, 즉 쌀밥이란 뜻이다. 하얀 쌀밥이 얼마나 부러웠으면 쌀밥나무라 불렀을까. 왕사였던 각진 국사는 모든 중생들에게 이밥을 먹이고 싶었을 게다. 그래서일까? 이팝나무는 지금도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나무가 되었다. 꽃이 풍성하게 피면 풍년이 들고 적게 피면 흉년이 든다고 했다. 각진 국사는 그래서 이팝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연못가 비옥한 땅을 택해 나무를 심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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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관 마당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굴뚝이 하나 있다. 빨간 벽돌로 쌓아올려 조형물로도 손색이 없다. 이곳에 오면 나는 굴뚝 끝을 한참이나 쳐다보며 사진을 찍는다. 벌써 10여 년째 소나무가 싹이 터서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처음 본 것은 7년 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장에는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모든 역량을 뿌리를 뻗는 데 쏟아 부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뿌리가 땅에 닿는 날이면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신나게 자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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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면서 나무의 체액을 떠올려본다. 나무는 땅과 대기 사이에 놓인 관管으로 몸 둘레가 둥글고 속이 비어 있는 생물이다. 입과 항문이 있는 동물들의 관은 음식물이 들어왔다 나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을 흡수하는 역할을 하지만, 나무의 물관은 물과 물 속에 녹아 있는 무기양료가 수송되는 관일 뿐이다. 잎에 도달하면 무기양료는 내려놓고, 대부분의 물은 기공을 통해서 빠져나간다. 그렇게 무시로 날아가 버리는 물을 계속 펌핑하며 살아가는 게 나무의 숙명이다.
--- p.279
잠시 돌강 사이의 식생을 살피러 들어가보니 거기 또한 무생물의 전유공간이 아니다. 그 어느 곳에서든 우린 살 수 있다는 듯 녹색의 의지가 듬쑥하니 전해져온다. 붉나무, 생강나무, 당단풍나무, 신갈나무가 바위 밑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나래회나무, 말발도리, 병꽃나무는 한 줌의 유기물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산수국은 그나마 바위 밑 습한 곳에 웅크리고 있으니 안전가옥이 따로 없다. 그곳에서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씨앗들이 도전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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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꽃잎을 떨구고 있는 층층나무를 올려다본다. 가지들이 파란 하늘을 그물처럼 갈라놓았다. 층층나무는 폭군나무라고도 부른다.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처음 자랄 때는 탑처럼 단정하게 자라다가 다른 나무와 경쟁을 할라치면 엄청 빠른 속도로 키를 키우고는 위에서 우산처럼 가지를 뻗기 때문이다. 다른 나무들이 자라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이다. 숲속에도 폭군이 있다니, 괘씸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들의 생각이고 그들 나름의 질서가 있을 테니 그렇게 부르는 건 아니지 싶다.
--- p.359
게으른 산행은 숲의 뭇 생명을 존중하는 산행이다. 천천히 걸으며 그들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하고 안부를 물으며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을 삼가야 하며 발걸음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걸으면 숲도 보호되고 걷다 보면 몸에 쌓여 있던 피로물질이 사라져 어느새 마음에 평화가 깃든다. 숲의 치유 효과다. 이슬바심을 해가며 새벽산길을 천천히 걸어보시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보호본능이 생기듯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길 것이다.
--- 머리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