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는 계단을 내려가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도 분명하고, 그곳에 가는 이유도 정확히 아는 사람처럼. 실은 할일도, 갈 곳도, 볼 사람도 없었다. 그녀의 하루는 다른 모든 날과 마찬가지로 백지였다. 어쩌면 매 걸음 고심하여 발 디딜 곳을 만들어내는 중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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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 있게 흐느적거리는 검은 머리칼은 마치 해초 같았다. 아니, 인어의 머릿결 같았다. 어째서 그림책이나 영화에 나오는 인어의 머리는 다 금색인 걸까? 헬렌은 의아했다. 진짜 인어가 있다면 머리색이 분명 줄리아처럼 검을 거라고 확신했다. 진짜 인어는 배우처럼 매력적인 여성이 아니라 괴이하고 으스스하게 생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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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소 일은 어때?” 케이는 돌아앉으며 물었다. 미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비소는 여자가 바지를 입고 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터 중 하나였기에 거기서 일하는 것뿐이었다. 미키는 일을 해야만 했다. 케이처럼 부유한 집안의 뒷받침도 없고, 들어오는 수입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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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기간은 친절의 시대였죠. 사람들은 다들 쉽게 잊는 것 같아요. (…) 지금 내 앞에 있는 평범한 옷을 입은 평범한 사람이 그런 잔혹한 얘기를 들려주는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멋진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사람들의 용기와 믿지 못할 선행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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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엔 멀쩡한 삼층짜리 집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집 앞에 쌓인 잔해의 높이는 2미터를 넘지 않았다. 결국 집이란 그 안에 사는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빈 공간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중요한 건 벽돌이 아니라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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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컹한 인간의 살덩이, 쉽게 부서지는 뼈, 형편없이 가느다란 목과 손목과 손마디…… 그런 끔찍한 아수라장에서 이런 생기 있고 따뜻하고 아름답고 흠 하나 없는 곳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케이에겐 기적이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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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안은 냄새가 아주 강렬했다. 탤컴파우더와 파마약, 타자기 잉크, 담배 연기, 암내가 뒤섞인. 벽에는 정부에서 발행한 다양한 홍보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포테이토 피트와 그 밖의 명랑한 뿌리채소들이 자기를 삶아서 먹으라고 애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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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알기로 남자는 전쟁 초기에 공군 비행사였고, 모종의 추락사고로 다리를 절게 됐다. 그래도 꽤 젊고 괜찮은 편이었다. 여자들이 흔히 “눈이 매력적이네요” 혹은 “머릿결이 멋지네요”라고 하는 그런 유의 남자였다. 특별히 눈이나 머릿결이 좋아서가 아니라 달리 잘생긴 구석이 없어서, 그래도 뭔가 괜찮은 말을 해주고 싶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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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대공습 때는 사람들을 일일이 다 도와주려 애썼다. 어떨 땐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은 사람을 무심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약한 자들을 돕는 영웅이라도 된 양 일에 덤벼들었는데, 하고 헬렌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엔 자신에 대한 생각밖에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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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다니는 것도 신물나고, 구질구질하게 살금살금 다니는 것도 싫어. 우리가 결혼만 할 수 있다면, 아니 그 비슷한 거라도.” 케이는 눈을 껌벅거리다 시선을 피했다. 이것이 바로 그녀 인생의 비극이었다. 그녀는 남자처럼 헬렌을 아내로 맞이하거나 아이를 안겨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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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펼쳐진 대대적인 파괴의 현장은 보인다기보다 느껴지는 쪽에 가까웠다. 대지를 덮은 칠흑 같은 어둠을 노려보아도 시선에 닿는 것은 없었다. 헬렌은 거미줄이나 베일을 걷어내려는 듯 두어 번 눈앞에 대고 손을 휘저었다. 이곳의 밤은 극도로 농축되어 탁한 물속을 걷는 듯 굉장히 묘한 기분이 들었고, 그 폭력성과 상실감에 겁이 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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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번도…… 한 번도 두려움에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을 것 같아? 세상에서 제일 지독하고 가장 끔찍한 일이지. 법정에 서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어. 길 가던 여자들이 나를 보고 밸도 없는 놈이라고 욕해도 받아넘겼어! 그런데 조용히 혼자서 생각해보면, 재판소도 그 여자들도 다 옳을지 몰라. 그런 의심이 자꾸자꾸 신경을 갉아먹고 파고들어. 나는 진심으로 내 신념을 믿는 걸까. 아니면 그냥…… 단지 한심한 겁쟁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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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미치고 말지.” 알렉은 고개를 홱 치켜들며 말했다. “놈들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르느니. 미친 건 그놈들이라고. 놈들이 사람들을 죄다 미친놈으로 만들고 있는데, 다들 가만히 있잖아. 다들 그게 정상인 것처럼 군다고. 그게 정상이라니, 너를 군인으로 만들고 너한테 총을 쥐여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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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겨워. 늙은이들이라니! 그 인간들이야 좋겠지. 우리 아버지도, 너네 아버지도 상관없겠지. 살 만큼 살았으니까. 그래놓고 우리의 삶을 빼앗으려는 거야. 한번 전쟁을 겪었으면서, 이번에 또 일으켰어. 우리가 젊다는 사실에 배가 아픈 거야. 우리도 자기네처럼 늙기를 바라는 거지. 이건 우리가 일으킨 싸움도 아닌데, 놈들은 그런 거에 눈곱만치도 개의치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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