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요리책을 몇 권 가지고 있습니까?
(a) 충분하지 않다
(b) 딱 적당한 만큼
(c) 너무 많다
(b)라고 답한다면 거짓말이라는 이유로 결격이다. 자기만족 때문에, 또는 음식에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 또는(이건 제일 겁나는 이유일 텐데) 모든 것에 다 완전히 통달했기 때문인 것으로 간주되어 또한 결격이다. (a)나 (c)라고 답하면 점수를 딴다. 최고 점수를 따려면 (a)와 (c) 둘 다를 똑같은 비중으로 선택해야 한다. 누군가는 모든 것을 더 명료하고 쉽게 씀으로써 독자가 실패할 염려를 줄이고 더 믿을 만한 레시피를 내놓는다며 항상 새로 배우겠다는 자세를 보여주는 답이 (a)다. 그리고 이 (a)를 적용할 때 자주 실수하기 때문에 (c)도 답이다. --- p.50~51
“잘 익은 방울토마토 2.5킬로그램, 이등분해서 씨를 뺀다.” 2.5킬로그램이라면 5파운드도 훨씬 더 된다. 이 조그만 녀석들이 몇 개나 모여야 1파운드가 될까? 내가 말해주겠다. 방금 열다섯 개의 무게를 달아보았더니 4온스였다. 다시 말해 1파운드면 60개란 얘기다. 그러니까 파운드면 3백 개다. 이걸 모두 반으로 자르면 6백 조각이 되는데, 한 개라도 빠트릴까 봐 마음을 졸이며 칼로 하나하나 씨를 톡톡 빼내다 보면 사방이 온통 토마토 주스로 범벅이 된다. 자, 그럼 다 함께-아니, 우린 그 짓은 못 해! 그러고는 토마토 씨는 추가 섬유질이라는 명분으로 그냥 두기로 한다. --- p.79
잠깐, 그게 아니고, 실은 그러지 못했다. 우선 치커리가 아직 식칼에 잘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끈적끈적한 찌꺼기” 따위는 일절 없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 이유는 내 눈길을 끈 마지막 화보에서는 짙은 갈색 농축액이 돼지고기에 흘러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거짓이잖아!” 나는 소리를 질렀다. (현학자의 부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외침이다. 현학자가 요리를 해주는 그녀는 그것을 단순한 청각적 구두점으로 간주한다.) --- p.95~96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가즈오 이시구로와 함께 참석한 문학 관련 만찬에서 캥거루 요리를 먹어보았다. 그는 이런 말을 하며 그걸 시켰다. “나는 언제나 그 나라의 상징을 먹는 걸 좋아하지.” (그러자 내 옆에 있던 한 시인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럼 영국에선 사자라도 먹는다는 건가?”) --- p.122
그러는 중, 현학자가 요리를 해주는 그녀에게 연정을 표명하는 제독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에게도, 아내에게도, 그리고 어조로 미루어 짐작컨대 제독 자신에게도 좀 뜻밖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군을 호령하던 사람답게 우렁차고 엄격했다.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뭘 하죠?” 말투로 보아 그건 수사적인 것이 아니라 답을 구하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은 어째서인지 여태까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설탕은 녹는데 내 마음은 굳고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열심히 요리책에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바깥 식탁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잔뜩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요리에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융합이 이루어지는 결정적 순간을 맞았지만 처음과 똑같이 격렬한 폭발현상이 일어났다. 이게 무슨 염병할 은유적 상황이란 말인가! 저기요, 죄송한데요, 제독 각하, 메뉴에 변동 사항이 생겼습니다. 초콜릿을 곁들인 산토끼를 먹기는 할 텐데요, 정식 소스는 없습니다. 소스는 배 밑바닥에 있습니다. 아, 그리고 목구멍에 위험한 뼈가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 p.127~128
몇 달 전 우리는 저녁 식사에 몇 사람을 초대했다. 한 부인이 식당에 들어와 여섯 사람 자리가 마련된 식탁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참 용감하세요. 전 더 이상 디너파티 같은 건 안 해요.”
이에 대한 응답은 이 말뿐이었다. “이건 디너파티가 아닌데요.”
우선 디너파티란 말은 우리 집에선 금기어다. 표현에 따라 태도도 달라진다. (언젠가 내 친구가 아쉬운 듯 이런 말을 했다. “‘은퇴’란 말만 아니면 은퇴를 고려해볼 텐데.”) 그러니까 ‘친구들이 저녁을 먹으러 온다’는 완곡한 표현이 아니라 그냥 다른 표현이다. 저녁 준비에 정성이 덜 들어간다거나 그 손님과 함께 있는 걸 덜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오히려 그 반대다. --- p.164~165
내 손으로는 애피타이저와 디저트를 만들고, 메인 요리는 인근 이탈리안 델리에서 포르치니 라자냐를 샀다. 델리와의 거래는 이렇다. 이틀 전에 우리 집 식기를 가져다주며 굽기만 하면 되는 라자냐를 주문하고, 이틀 후인 당일에 가져온다. 그러면 집에서 쓰는 식기에 담겨 있으니까 은연중에 내가 직접 만든 것처럼 보인다.
저녁은 잘 끝났고 요리사의 스트레스도 없었다. 첫 번째 코스를 두고 뭐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좀 분하다). 디저트도 마찬가지였다(괘씸한 것들). 그러나 라자냐를 말할 때는 모두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이 라자냐 맛이 기가 막힌데!” --- p.170
바로 그거다. 빵을 고르는 일. 버터를 마음대로 마구 쓰는 일. 부엌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일. 재료를 조금도 낭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일. 친구와 가족을 먹이는 일. 다른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는, 단순화할 수 없는 사회적 행위에 참여하는 일. 내가 아무리 트집을 잡고 항의의 말을 했어도 콘래드의 말이 맞는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다. 온전한 정신의 문제다.
--- p.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