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 동학 및 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비교적 소략한 편이다. 강원도는1864년 3월 동학의 창도주 수운 최제우가 순도한 뒤에 제자 이경화가 영월 소밀원으로 귀양을 와서 장기서에게 첫 포교를 하면서 동학이 뿌리 내린 곳이다. 특히 강원도는 최시형의 첫 도피처이자 포교지여서 동학 교세가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성했을 뿐만 아니라, 이 같은 교세를 바탕으로 인제 갑둔리에서 동학의 경전『동경대전』을 최초로 간행하기도 했다. 1893년 3월 보은취회에 800여 명의 강원도 동학교도가 참가한 기록이 남아 있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 재기포 시기에는 강원도 전 지역에서 일어나 투쟁을 벌였다.
특히 9월 4일에 홍천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이 강릉관아를 점령했으나 선교장 공격에 실패하며 퇴각했고, 10월 22일에는 풍암리 자작고개 전투에서 8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희생되었다. 이처럼 강원도는 동학 활동이 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충청북도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해 영남·영동 지방에 이어 소백산맥에 의지하여 단양 괴산 지역을 시작으로 동학 포교의 물길이 퍼져나간 곳이다. 동학은 충청북도 전 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어 나갔고, 동시에 동학을 서울 경기와 충청 내포 지역으로 유출시키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보은취회와 광화문 복합상소 등으로 동학교도의 활동이 어떤 고을보다 활발했다. 1894년 3월 전라도 무장에서 동학교도가 기포하자 충청도의 괴산 연풍, 충주 신당리, 문의, 회인, 청산 작은뱀골, 금산, 진산, 진잠, 회덕, 홍주 등지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기포했다. 9월 18일, 해월 최시형의 재기포령이 내려지자 경기·강원·충청·경상 지역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이 보은 장내리 대도소에 집결했다. 이들은 논산에서 호남의 전봉준 군과 연합하여 공주성 전투를 치렀다. 공주성 전투에서 패하자 전라도까지 피신했다가 올라온 북접 동학농민군은 보은 북실에서 민보군과 일본군에게 집단 학살당한다. 이렇게 충청북도는 동학혁명사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중심지였다.
충청남도의 동학 포교의 통로는 지리적인 조건이나 연원 관계로 볼 때 충청북도 북부·중부·남부 통로를 통해 충청남도 전 지역으로 일시에 확장되었다. 이렇게 유입된 충청남도 동학은 북으로는 경기도, 남으로는 전라도 지역 포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충청남도 동학혁명사는 이같은 동학의 유입 과정과 함께 1893년 12월에 일어난 노성 민란과 1893년 12월 공주취회를 주목할 수 있고, 1894년 봄 동학혁명기 초기에 금산·진산·진잠·회덕·홍주 지역 동학교도의 소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동학혁명 중심 시기에는 충청남도 모든 지역에서 동학교도가 기포하였고, 논산에서 남북접 동학 연합군이 합진하여 공주성으로 진격한다. 이에 따라 충청남도 지역 곳곳이 싸움터가 되었는데, 특히 목천 세성산 전투와 공주 우금티 전투는 동학혁명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결국 동학 연합군이 공주 우금티에서 일본의 무라타 스나이더 소총을 주축으로 한 신무기 앞에 처절하게 패하게 되었고, 충청남도 곳곳에서 참혹한 토벌전이 자행되었다.
지금까지 서울·경기도 지역 동학혁명사에 대한 체계화된 연구가 없었다. 그러나 1893년 광화문 복합상소 시기에 서울 성 안의 동학교도 활동 기록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또, 보은 장내리 집회에“경성 수원접840명”의 동학교도가 참가하고 있어서 이 지역의 동학 교세가 작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동학이 서울·경기 지방을 거쳐 황해·평안도 지역으로 포교되어 나간 사실을 체계적으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
동학혁명 초기에 조정에서 청국과 일본의 군대를 끌어들여 진압하려는 움직임이나, 일본의 경복궁 침탈 사건이나 토벌군 투입 등 조정에서 전개되는 상황이 동학교단에 낱낱이 보고된 점도 서울 지역 동학교도의‘체계적인 정황 보고’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난 뒤 최시형의 마지막 도피처가 경기 지역이었고, 재판 끝에 좌도난정률로 순도한 곳이 서울이다. 동학의 후신 천도교가 서울로 들어와 3·1운동과 갑진개화 사건을 이끌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