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의열단!
의열단은 공허한 구호나 정강을 거창하게 내건 단체가 아니다. 의열단이 내세운 행동강령은 ‘실천’이었다.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데 비해 의열단이 역사의 조명을 받은 것은 백절불굴의 행동(실행)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일을 결정하면 곧 실행에 옮긴다. 특히 암살과 파괴라는 두 가지 양식의 직접행동으로 식민지 통치의 근간을 제거하려 했다. 이런 면이 일제가 의열단을 그토록 두려워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1919년 11월 10일,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의 초선 청년 13명(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권준, 김상윤, 배동선, 서상락, 신철휴, 윤세주, 이성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이 창단한 의열단은 10년 동안 크고 작은 의열투쟁을 34번이나 일으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국민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일제 경찰관서 폭파, 일본군 고위장교 저격, 일제 수탈기관 폭파, 일왕 거주지 폭탄 투척, 밀정과 변절자 암살 등 그 유형도 다양했다.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광복군으로 이어지다
의열단은 암살과 파괴 투쟁의 한계를 절감하고,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맞춰 의열단의 진로를 ‘폭렬투쟁에서 대중운동으로’ 전환한다. 또한 의열단 지도부는 의열단 간부학교라고도 불리는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한다. 모든 경비는 중국에서 부담하지만 운영은 의열단이 맡아서 했는데, 사실상 이 학교는 의열단원 교육기관이자 의열단 양성소였다. 민족시인 이육사와 혁명음악가 정율성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1934년 한국독립운동사에 큰 방점을 찍은 최대규모의 좌우연합 정당인 민족혁명당이 만들어지는데, 대표는 김규식이었으나 실권자는 당세가 강한 김원봉이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도 민족혁명당 창당의 핵심세력이 의열단 계열이라는 점을 들었다. 이후 1930년대 후반 중국 관내의 한국 독립운동 진영은 사실상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의 양대 세력이 주축을 이루게 된다.
1938년 10월 10일, 민족혁명당 간부들은 내외 정세 변화를 지켜보다가 마침내 조선의용대를 창설한다. 이는 의열단 간부학교(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와 황푸군관학교 졸업생 등 100여 명의 청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원봉은 이런 기회가 올 것이라 내다보고 오래전부터 의열단과 여러 단체를 통해 유능한 청년들을 교육·훈련시켜왔던 것이다. 곧, 조선의용대는 사실상 의열단의 후신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용대 창설은 외교론이나 실력양성론에 실망해온 무장투쟁론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또한 이들의 존재와 활약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서둘러 창군하게 하는 간접적인 효과를 낳았다. 나중에는 광복군의 인적자원의 보충원이 되어주었던 한편, 조선독립동맹 산하 조선의용군의 실질적인 조직기초이자 충원기반으로도 기능했다.
그러나 조선의용군은 임시정부 측과 옌안파로 갈리고, 해방 후에 충칭파는 서울로 입국하고, 옌안파는 평양으로 각각 입국하면서 역사적 비극을 맞게 된다.
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대상(7가살)과 다섯 가지 파괴 대상(5파괴)
의열단은 창단하면서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의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등을 포함한 ‘공약10조’를 채택했다. 그러나 일제에게 더 큰 공포를 준 건 ‘7가살(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대상)’과 ‘5파괴(다섯 가지 파괴 대상)’였다.
7가살의 대상은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적,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이고, 5파괴의 대상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의 중요 기관’이었다. 이처럼 처단대상과 파괴대상을 명확히 적시함으로써 활동목표를 공개했다. 이는 의열단이 어느 독립운동단체보다 격렬하게 일제와 싸우고자 하는 단호한 결의와 치열함, 조선 민중의 소망을 담아낸 결과라 할 수 있다.
의열단의 이념적 지표가 된, 신채호의 「의열단선언(조선혁명선언)」
신채호는 망명 초기부터 무장투쟁론을 제기하면서 임시정부와는 달리 직접행동에도 나섰던 언론인이자 사학자이다. 김원봉의 부탁으로 신채호는 의열단의 ‘정신’을 담은 문서를 작성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의열단선언」이다. 이 선언은 의열단에 새로운 활기와 투지를 심어주었고, 이후 모든 의열투쟁의 현장에는 반드시 이 「의열단선언」을 살포했다.
「의열단선언」은 5개 부문으로 되어 있는데, 의열단선언문답게 철저하게 의열혁명론을 주창한다. 이전까지의 의열단 활동이 다소 즉흥적이고 비체계적인 투쟁이었다면, 「의열단선언」 이후 항일투쟁 노선이 한층 더 정당화되었고 이념적 지표도 갖추게 되었다. 「의열단선언」은 곧 항일운동기의 모든 독립운동가들과 한국의 전 민족구성원들에게 독립에 대한 확신과 목표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제시해준 ‘민족해방전쟁의 선전포고문’이자, 그 어떤 선언문을 뛰어넘는 위대한 선언문이었다.
조선 독립에 모든 것 바치다
의열단은 조선 독립에 모든 것을 바쳤다. 이들이 벌인 굵직한 주요 활동으로는 밀양 진양 폭탄 반입 사건(1920), 박재혁의 부산 경찰서 폭탄 투척(1920),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1920), 오성륜·김익상·이종암의 상하이 황푸탄 의거(1922), 박열의 일왕 부자 처단 기도(1923),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1923), 김지섭의 도쿄 니주바시 사쿠라다몬 폭탄 투척(1924), 이인홍과 이기환의 밀정 김달하 처단(1925), 이종암 등의 군자금 모금 의거(1925),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 투척(1926), 이해명의 ‘변절자’ 박용만 처단(1928) 등이 있다.
그리고 의열단의 전통은 해방 뒤에도 이어졌다. 다만 상대가 왜적이나 밀정에서 국내의 독재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1952년 6월 25일, 피난 수도인 부산에서 열린 6·25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저격하려 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당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이가 의열단원 유시태였다. 유시태의 시도는 총알이 발사되지 않아 무위로 끝났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