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다음 이 장은, 앞에서 언급했던 경고보다 훨씬 일반적이면서 실로 훨씬 더 불안을 야기하는 경고로 끝난다. 해야 하는 줄 알면서 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죄다! 명백한 죄의 행위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일단 하나님의 최고 율법을 받아들이고 그 율법에 따라 살아가는 겸손을 배웠다면, 삶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림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겸손을 배웠다면, 당신이 어떠한 구체적 삶으로 부름받았는지 좀 더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이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 당신의 소명이나 인생의 길과 관련한 문제일 수 있다.
혹은 이웃이나 낯선 이들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라는, *성령이 주시는 가벼운 자극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자극을 받거나 그런 부르심을 받고 나서 그것을 무시하거나 못 들은 척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더 심각한 교만의 행위다.
4장 마지막 절을 보고 민감한 심령들은 계속 자기 성찰의 고뇌를 겪기도 한다. 나는 불충실하지 않은가, 불순종하지 않는가? 나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은, 그 점에 대해 걱정스럽다면, 「솔직히 나는 더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식으로 마음을 성찰했으면 한다) 당신은 잘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강박적으로 염려하는 것은, 당신 자신을 그림 한가운데 두고 하나님과 이웃보다는 ‘나와 내 생각과 내 마음 상태’에 모든 주의를 집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병적이거나 피해망상적인 자기 성찰의 고통을 겪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좀 더 사려 깊은 목회적 돌봄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들 대다수에게는, 우리 내면의 문제를 더 넓은 시야로 보는 방식으로,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 만한 것이 없다.”
--- 「약 4:11-17 해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빠져들기가 너무 쉽기 때문에, 새로운 습관을 배워야 한다. 여기 아이러니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별된 사람으로서 두드러져야 하지만, 그렇게 두드러지면 조롱당하거나 비판받게 되고, 그럴 때 조롱이나 비판으로 되갚으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구별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적대적 세상이 또 다른 승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난을 비난으로 갚으며 ‘받은 만큼 돌려줄’ 때, 그것은 주변 세상과 야합하는 것이다. 부도덕이나 재정적 면에서 부패에 동조하는 것이 그런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새로운 마음과 *삶의 습관들은 교회라는 비교적 안전한 환경에서 습득해야 한다「8절). 그래야 더 넓은 세상에서 실천하고 적용할 수 있다「9절, 13-16절). 그러나 슬프게도 교회에서조차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기가 너무도 쉽다. 바울이 다른 여러 단락에서 그랬듯이, 베드로도 같은 마음을 품고, 서로 공감하고 사랑하며, 다정하고 겸손하게 처신하는 것을 삶의 기본 원리로 주장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다정하고, 또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다소 거칠고 완고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기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들 모두 다정한 사람이 되도록 부름받았다고 여겼다. 우리가 새로운 마음과 생활 습관들을 익히려 애쓸 수 있도록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가 거기에 있다.”
--- 「벧전 3:8-16 해설」 중에서
“며칠 전 18개월 된 손자를 대형 장난감 가게에 데려갔다. 밝은 빛깔의 흥미진진한 것들이 넘쳐났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가게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가운데 탁자와 가판대 곳곳에도 흥미진진한 것들이 너무 많아 아이는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이는 재빨리 이쪽저쪽을 보더니 돌아서서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행복한 충격에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 아이가 하는 말이라고는 “와”뿐이었다. 그 아이가 할 줄 아는 몇 가지 말 중 하나지만 가장 멋진 표현이었다.
베드로후서라 불리는 서신의 초반부를 빠르게 죽 읽었을 때 내 느낌이 그러했다. 「이 서신을 베드로가 썼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지만, 몇몇 부분은 비록 그가 직접 쓰지는 않았더라도 어떤 의미에서 그에게서 나온 것으로 본다.) 모든 문장, 거의 모든 단어가 반짝반짝 빛난다. 온갖 개념들이 우리를 유혹하며 말한다. “나를 봐! 이건 정말 매력적이야!”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면, 이 모든 흥미진진하고 도전적인 생각들을 이해할 수 있는 더 큰 그림을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큰 그림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하시고 싶어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도 흔히 ‘종교’ 혹은 ‘기독교 *신앙’조차,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과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선행,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 이를 악물고 천성과 다르게 행동하도록 강제하는 도덕성 같은 것을 원하신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어설픈 짐작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 3-11절에 이르는 놀라운 단락에 진실이 있다.”
--- 「벧후 1:1-11 해설」 중에서
“하나님은 이 미래를 미리 살짝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그 오는 시대가 적합한 때에 드러나기를 기다리시며, 그 시대를 비밀로 간직하고 계셨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운동의 핵심에 있는 비밀은, 오는 시대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이다. 현재는 아무 대비를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가 현재로 들어왔다. 그 미래에 해당하는 단어가 생명「Life)이었다. 그것은 원래 의도되었던 그 생명, 온전하고 생기가 넘치는 생명, 죽음이 부패시키고 좌절시키고 죽이려 했던 생명,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이제 그것을 얻으려는 누구에게든 제공되는 생명이다.
생명 자체가 생명으로 왔고, 인간의 형체를 취하였고, 하나님의 미래에서 현재로 왔고, 하나님의 오는 시대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 왔다. 사람이 되신 그 생명의 이름이 바로 예수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던 핵심이다.
하나님의 새 생명이 사람이 되셔서 미래에서 현재로 나아오셨다는 개념은 너무도 엄청나고 놀라워서, 경탄과 숨죽인 경외와 공경의 어조야말로 합당한 반응이다. 우리가 이 서두에서 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태초부터 있었고…. 잠시 멈추어 이에 대해 생각해 보라. 우리가 들었고, 우리 눈으로 보았고, 우리가 주목하고…. 다시 멈추라. 당신들의 눈으로? 당신들이 그저 언뜻 본 것이 아니라 주목했다고? 그렇다. 요한은 그렇게 말한다. 게다가 우리 손으로 만졌던 그것…. 그것을, 그 생명을 만졌다고? 그분과 접촉했다고, 그분을 만졌다고? 그렇다. 요한은 반복해서 말한다. 우리가 태초부터 계셨던 이 생명을 들었고 보았고 만졌다고. 우리는 그분을 알았다. 우리는 그분의 친구들이었다.“
--- 「요일 1:1-4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