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고대 근동 세계에서 문명의 후발 주자였다. 이스라엘이 다윗을 통해 최초의 왕조를 이루기 전, 이집트, 터키,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이미 천 년 전부터 다양한 왕조가 일어났다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다윗이 왕으로 다스린 주전 1000년에서 960년까지의 기간은 강대했던 전통적 왕조들이 무너졌거나 매우 세력이 약해졌던 때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대 근동 학자들은 주전 1200~900년의 기간을 고대 근동의 암흑기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문명이 쇠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기간에 각 지역의 왕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집트는 신왕국이 무너지고 제3중간기의 혼란 가운데 있었고, 히타이트 제국도 해상 민족에 의해 무너진 후 북부 시리아 지방에서 분열된 도시 국가의 형태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였으며, 아시리아는 왕조의 명맥은 이었지만 역사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다윗이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맹주로 부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전통적 강국들의 쇠퇴가 있었다.
--- p.13, ‘서론’중에서
성경 본문은 미갈이 여기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전혀 말해 주지 않는다. 미갈은 여전히 다윗을 사랑했을까? 다윗의 뜻하지 않은 호출에 내심 반색했을까? 이런 질문들은 남자들의 편견을 반영한 것들이다. 남자들은 자신의 과거 여인이 평생 자신을 못 잊을 것이라는 착각을 많이 한다. 그러나 미갈은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과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다. 어느 여자도 현재 행복한 가정을 버리고, 한때 명목상 남편이었던 자를 따라 자발적으로 ‘가출’하지 않는다. 성경 본문에서도 다윗이 미갈을 사랑하여 미갈을 다시 소환했다는 증거도 없다.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시점에 “사울의 딸”이 필요했던 것이지, “미갈”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다.
--- pp.126-127, ‘다윗과 아브넬의 협상’중에서
지난 세대 한국 목회자들에게 “성전 건축”은 목회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때는 적은 무리의 예배 공동체로 시작된 교회라도 목회자가 성실하게 사역하면 한국 사회의 경제적 발전을 배경으로 어느 정도 성장을 체험하던 시대였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부지를 구입하고 그 위에 번듯한 콘크리트 건물을 짓는 것을 사역의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곤 했다. 그런 목회자들에게 성전 짓기를 사모하는 다윗의 마음은 큰 울림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전 건축은 다윗 시대나 지금이나 하나님이 요구한 것이 아니다. 사무엘하 7장은 하나님이 성전 건축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 이유를 잘 보여 준다. 아울러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나아가 구속사의 훗날에 도래할 참된 성전에 대한 암시도 준다. --- p.242, ‘다윗 언약’중에서
우리아는 누구보다도 밧세바를 잘 알았을 것이다. 밧세바가 자신의 아내로 평생 살 수 없는 여자라는 것을 짐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더 이상 함께 갈 수 없는 임계점은 밧세바의 임신과 함께 찾아왔다. 임신하지 않았다면, 우리아는 다윗과 밧세바의 관계를 인지했더라도 그냥 참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임신은 밧세바에게 일종의 ‘권력’을 주었고, 밧세바가 그 기회를 그냥 넘길 리 없었다. 설사 밧세바는 이번 기회를 놓치더라도 다음 기회를 노릴 가능성도 있다. 결국, 우리아가 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집으로 내려가지 않은 것은 이런 밧세바의 야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섬기던 왕에게 그리고 자신의 아내에게 배신당한 우리아는 굳이 연명하여 후에 버림받게 되는 비참한 상황을 기다리기보다는 군인으로서 명예로운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즉 그는 전쟁터에서 다윗의 충신으로 죽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시 상황에서 우리아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아니었을까?
--- pp.336-337, ‘다윗의 밧세바’중에서
압살롬은 다윗이 내치에 실패했음을 인지하고, 대중들의 불만을 권력 쟁취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그는 약 4년 동안 매일 똑같은 일과를 반복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성문”으로 통하는 길가에 자리한다. “성문”은 고대 사회에서 송사가 벌어지는 공간이다. 오늘날의 법원과 같은 장소다. 왕정 이전의 부족 사회에서는 마을의 원로들이 성문에 앉아 사람들의 송사를 관장했지만, 왕정 이후에는 왕이 임명한 재판관들이 성문에 앉아 사람들을 맞는다. 물론 그들이 해결하지 못한 어려운 송사는 왕이 직접 듣고 판결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압살롬은 성문 밖에서 송사를 위해 도시로 진입하는 사람들을 만나 한 명 한 명 포섭한다. 사무엘서 저자는 그런 포섭 장면을 대화 형식으로 보여 준다. 이 대화는 압살롬의 대중 포섭 전략을 보여주기 위해 저자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그는 먼저 어느 마을 출신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이스라엘 지파 중 하나에 속한 마을에서 왔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바로 압살롬은 자신의 ‘복음’(3-4절)을 전한다.
--- p.458, ‘압살롬의 반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