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세계가 종말을 고한 곳에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
다시 [월-E]로 돌아가보자. 인간은 이성의 힘으로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지구를 파괴했으며, 결국 엑시엄호라는 폐쇄된 공간 안에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공리체계도 완전무결할 수는 없다. 그래서 검토가 필요하다. 새로운 이론은 이전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안고 다음 단계로 도약한다. 엑시엄호는 한 세계의 종착점인 동시에 또 다른 세계의 출발점이다.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우주를 떠돌던 엑시엄호는 지구에 착륙하며 여행을 끝마친다. 엠시엄호가 여행을 멈춘 곳에서 다시 새 역사가 시작된다. 인간들이 공리로 믿고 있던 경제적 이익, 편리함, 효율성과 같은 가치를 환경, 평화, 공존, 재생, 지속가능성과 같은 가치로 대체할 수 있을까? 700년 만에 발을 내딛은 지구에 사람들이 새싹을 심으며 영화는 끝난다. --- p.34
암호해독 과정이 만들어낸 최초의 컴퓨터
암호를 만드는 건 간단하지만 복원하는 건 복잡하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가령 문자 a, b, c를 배열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다.
a, b, c / a, c, b / b, a, c / b, c, a / c, a, b / c, b, a
a, b, c 셋 중에 하나를 첫 번째 문자로 고르면, 두 번째 문자는 각각 두 가지씩 선택할 수 있다. 첫 번째, 두 번째 문자가 확정되면 세 번째 문자는 저절로 고정된다. 따라서 경우의 수는 3×2×1= 6이 된다. 이를 기호로 3!이라고 쓴다. 같은 원리로 문자를 5개로 늘리면 경우의 수는 5×4×3×2×1=120이다. 기호로 쓰면 5!이다. 이를 식으로 일반화 하면 문자가 n개 있을 때, 경우의 수는 n×(n - 1)×… ×1=n!이다. n!은 n factorial(n의 계승)이라고 읽는다. 문자가 26개면 경우의 수는 무려 26!=403291461126605635584000000이다. --- pp.45~46
수학과 종교는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들의 언어
파이의 이런 복합적인 태도는 관객을 아리송하게 만든다. 어떨 때는 굉장히 비상하고 영리한 수학자나 공학자 같다가 어떨 때는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운명론자 같다. 파이라는 이름처럼 수학적인 메커니즘에 익숙한 사람으로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대책 없이 신의 이름을 부르는 미치광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파이가 물을 마시러 처음 성당을 찾아갔을 때 신부가 건넨 말은 “너 목마르구나You must be thirsty.”였는데, 리처드 파커의 원래 이름은 목마른thirsty이었다. 파이가 진리에 목마른 사람임을 상기하길 바란다. 수학과 종교는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들의 언어라는 점에서 상통한다. 대부분은 수학의 언어와 종교의 언어가 가장 먼 대척점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조금만 살펴보아도 이 둘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종교, 수학, 과학, 철학은 그 뿌리가 같다. 파이라는 이름은 질서와 무질서, 수학적 사고와 신비주의가 공존하는 복잡한 태도를 상징한다. --- p.105
신격화된 우주를 설명하는 단테의 방식
수학적인 정교함 외에도 중세 기독교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선호한 이유가 있다. 단테가 묘사했듯이 연옥의 지상낙원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기독교의 우주를 설명하는 데 천동설이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지구를 중심에 놓는 설정은 현실세계에서 연옥을 거친 후 우주를 건너 천국에 이른다는 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하는 데 효과적이다.
(…)14세기는 중세의 황혼기다. 12세기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대학은 교회가 독점하던 교육 시스템을 흔들었다. 이슬람 세계로부터 흘러들어온 고대 그리스 고전은 잠들어 있던 다양한 상상력을 깨우기 시작했다. 상업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도시를 발달시켜 자치권을 확대하려고 했다. 단테는 이 혼돈의 시기에 명확한 진리의 기준을 재정립하고자 했다. 이미 균열이 가기 시작한 중세를 옹호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단테는 그가 생각하는 사회개혁의 내용을 담아 다양한 분야의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를 썼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중세 유럽의 기독교를 종합하고 다듬어서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려고 했다. --- p.181~183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
죽음이 96시간밖에 남지 않은 소녀는 궁금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죽음이 정해져 있는 삶에도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한참 늦은 시기에 생전 하지 않던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칠십이 넘어 이혼을 하고,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고, 죽음을 앞둔 사람이 평생 상상만 하던 곳으로 여행을 간다. 이제 곧 죽을 텐데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길 밖을 나서보지 않은 사람은 길 밖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목표물 토드와 함께 소녀를 우주로 날려 보내려던 킬러는 처음으로 격투 중에 부상을 입는다. 자신의 세계를 벗어난 킬러는 실수를 범한다. 기존의 세계는 이미 깨져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 의도치 않게 자신까지 우주로 발사되는 순간 소설은 끝이 난다. 소녀에게는 막연한 우주로 날아가는 그 순간이 구원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결말이 슬프지 않았다. 의미를 모르고 죽음만을 기다리던 삶이 아니라 끝까지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며 생을 마감한 소녀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처음으로 공포로부터 해방됐을지도 모른다. --- pp.199~200
곡선이 구부러진 정도를 숫자로 바꾸는 수학의 세계
미분기하학은 미적분과 벡터를 이용해서 도형의 속성을 연구한다. 기하학은 기본적으로 도형의 속성을 수량화하는 학문이다. 각, 길이, 넓이, 부피, 겉넓이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까지야 어릴 때부터 워낙 많이 이를 다루는 수학 문제를 보니 그러려니 하는데 대학에 가면 곡선이 구부러진 정도curvature(곡률)나 휜 정도torsion(비틀림)는 물론 다양한 속성을 수량화한다. 새롭게 정의한 수식이 곡선이 구부러지고 휜 정도를 훌륭하게 수량화할 때면 좀 짜릿하다. 수학은 많은 것을 숫자를 통해 설명한다.
(…)곡률은 한 점에서 정의한다. 위 그림과 같이 곡선 위의 한 점 A에서 곡선에 접하는 원을 여럿 그린다. 그 원들 가운데 가장 큰 원의 반지름을 r이라고 하면, 점 A에서 곡선의 곡률을 1/r로 정한다. 이렇게 정의를 하면 왼쪽 곡선 위의 점 A에서는 r이 크니까 반대로 곡률이 작고, 오른쪽 곡선 위의 점 A에서는 r이 작으니까 반대로 곡률은 크게 나온다. 직선의 경우에는 직선 위의 한 점에서 직선에 접하는 원의 반지름이 무한히 커지기 때문에 곡률이 0이 된다.
--- pp.208~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