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정치권력은 공식적으로 행사되기 이전에 자신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알리는 정치적 절차, 즉 취임식을 거쳐야 한다. 정치인류학은 그것이 꽤 오랜 전통 위에 서 있는 것임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그 점에서 취임식은 일종의 정치적 통과의례다. --- p.27
즉위식이 만들어 내고자 하는 가장 중대한 정치적 효과는 새로운 권력을 신성한 존재로 전환해 내는 데 있다. 바꾸어 말하면, 여러 상징들로 직조된 의례의 절차를 온전히 통과하기 이전까지 왕위를 계승할 존재는 신성하지도 않고 비범하지도 않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물리적 육체성을 지닌 자연적 인격체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 p.55
근대의 정치의례, 특히 취임의례는 잉여적인 과정이 아니라 사회적 결속과 질서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안에서 전통적 취임의례의 구조적 양상인 성과 속의 원리가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실천되고 있다. 전통이든 근대든 취임의례는 근본적으로 성과 속의 이분법을 원리로 삼고 있다. 취임의례는 공간과 시간의 연출적 재구성을 통해 새로운 권력 주체를 정통성과 정당성의 토대 위에 놓으려 한다. --- p.75
그리고 근대적 욕망을 응축하고 있는 관념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한 논리적 설명과 해석의 형식인 이데올로기는 정치적 실천태로서 유토피아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현실 초월적 욕망과 의지는 보다 나은 세상, 이상적인 세상에 대한 합리적이고 실천적인 의식으로서 유토피아 의식의 탄생을 가져왔다. 근대 정치는 예외 없이 이러한 두 의식의 궤도를 선회하고 있다. --- p.103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까지 민주주의는 민족주의와 함께 한국정치의 이데올로기 지평을 지배한 가장 거대한 담론이자 가치체계였다. 보통사람의 시대, 문민 민주주의 시대, 국민의 시대, 국민 참여 시대가 권력의 지평 위로 올라왔고, 그 반대편에서는 그러한 민주주의 언어들 역시 민주주의의 이름과 가치 위에서 평가되고 비판되어 왔다. --- p.148-149
권력자는 시간에서도 편재한다. 의례의 시간은 그의 나타남과 더불어 출발하고, 그의 신체적 운동 위에서 흘러간다. 그리고 그의 퇴장과 더불어 정지한다. 하지만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하는 현상은 그가 의례적 시간의 창조자라는 점이다. 새롭게 이끌어 갈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을 결정하는 주체가 그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독점하는 언어를 통해 의례의 시간을 종횡으로 엮어 낸다. 여기서 의례의 언어는 정치적 시간의 세 층위(과거, 현재, 미래)를 결합함으로써 공동체의 기억과 현실, 그리고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마법적 힘으로 등장한다. --- p.166
한국 군부의 억압적 권력은 모두 체육관이라는 공간에서 스스로를 탄생시켰다. 체육관은 군부정권의 능력과 패권을 보여 주는 장소였을지 몰라도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는 어떠한 정당성도 창출해 내지 못할 자리였다. 체육관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 거대한 요새의 형식으로 서 있는 체육관은 … 열린 공간, 광장의 이념적·공간적 안티테제다. --- p.192
취임준비위원회는 25,000명의 공식 초청명단을 만들었다. 여기서 민정당원 초청 인원 10,766명을 제외하면 사실상 초청 규모는 12대 대통령 취임식에 비해 크게 늘어난 것이 아니다. 직능 대표성과 지역 대표성에서도 외견상 12대 대통령 취임식이 더 다양하고 포괄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와 같은 초청 인사들이 ―취임위원회가 언급하고 있듯이 ‘전국의 보통 시민들’로 호명되면서― 체육관이라는 폐쇄된 공간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열린 공간에서 새로운 권력의 탄생을 목격했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른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 p.237-238
신임 권력은 취임선서라는 순서를 통해 정치적 언어,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헌법적 언어 행위를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존재성을 보다 명확한 정통성과 정당성의 지평 위로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완벽한 의미에서 정치적 주체로 탄생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수행한 헌법의 언어는 자유롭게 실천할 수 없는, 필연적으로 따라야 하는, 말하자면 정치적 수동성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 p.287
텔레비전 화면이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운 권력자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속적으로 비추고 강조하면서 국민들은 그 권력을 예외적 존재, 비범한 존재, 신성한 존재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심리적 토대 위에서 새로운 권력은 단순히 법률적 정당성의 존재가 아니라 전통과 카리스마적 정당성의 존재로 나타나게 된다. --- p.331
한국의 모든 대통령 권력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근대의 성의를 입고 탄생했다. 대통령 취임식을 구성하는 정치미학상의 이미지들과 언어들은 그러한 성스러운 이념과 가치들을 가시화하는 방향으로 배치되었고 운동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민주주의적, 민족주의적 정통성과 정당성으로 정치적 생명을 부여받은 대통령이 예외 없이, 권력 행사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실천해 갔는지에 대해서 비판적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 취임의례에서 운동하는 상징과 이미지의 문제는 이처럼 궁극적으로는 권력의 윤리학에 연결되어 있다.
--- p.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