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온 15년 동안, 많은 죽음을 겪어 왔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돌아가신 경우도 있었고, 돌아가신 분들을 주인공으로 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좀 많았다. 나에게 죽음은 언제나 느닷없이 다가오는 충격적인 사고이며, 상실의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할 천형이고, 원인을 밝혀야 할 과제이기에,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면, 어느 날 갑자기 붕괴될 내 삶을 상상하게 된다. 내 삶이 무너질까 봐 무섭고, 상실감을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겁이 나며, 홀로 견뎌 내야 할 수많은 시간 앞에서 무력해진다. 아직도 부모에게 심리적·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나로서는 부모의 죽음은 더욱 상상조차 어렵다. 그러나 최현숙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죽음에 대해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4년간 어머니가 ‘해체’되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어머니를 향했던 질문이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 되고,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던 실마리가 곧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죽음에 대한 이미지는 달라졌다. 늙음과 함께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은 단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강력한 질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 김일란 (영화감독, 연분홍치마 활동가)
누구나 늙고 언젠가 죽는다. 고령 인구 비율이나 사망률로 표시되는 늙어 감이나 죽음과 달리, 누군가 겪는 인격화된 구체적인 늙어 감과 죽음은 서럽고 비장하고 때로 안타깝다. 최현숙은 부모의 늙어 감과 치매로 인한 어머니의 변화, 그리고 이어진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과정, 그 과정의 한복판에서 배우자와 가족 구성원이 겪었던 당혹과 난처함을 미화하지 않은 채 사실 그대로 낱낱이 기록했다. 이 천 일간의 기록은 딸이 썼다는 의미에서 독특하고, 누구나 겪고 나면 일부러 잊어버리거나 그런 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 떼고 싶은 인간 삶의 마지막 장면을 텍스트로 옮겼다는 점에서 용기 있고 또한 진귀하다. 한 개인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꼼꼼한 기록 속에 최현숙은 인간의 존엄성과 의료 윤리에 대한 질문, 효로 치장되어 가족에게 내맡겨진 돌봄 노동의 현실에 대한 분석과 자본주의적 시장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실버산업에 대한 문제 제기까지 담아냈다. 이 책은 가장 사적인 기록이 공적인 관심과 교차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탁월한 사례이다.
- 노명우 (사회학자, 아주대 교수)
나도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어머니가 말기암 판정을 받고 9개월 만에 돌아가셨을 때였다. 지구의 표면에서 살아가던 한 유기체-인간이 수십 년 유지한 존재 자체, 육체, 인식, 마음 그리고 가족, 친구 등 나름 복잡한 소유와 관계를 다 중지 또는 해산하고, 결국 ‘한줌의 재’, 즉 무(無)에 수렴하는 것은 대단하고 흥미로운 과정이었다.
문학은 인간 성장(≒형성, Bildung)의 위대함을 다루는 것을 자기의 한 본연으로 삼는데, 죽음이라는 존재의 쇠락·멸실(최현숙이 택한 더 극적인 용어로는 ‘해체’) 또한 다른 의미에서 위대한 일이며, 그것을 쓰는 일도 문학적으로 대단히 가치 있다. 나를 낳고 기른 어머니라는 존재의 사멸을 계기로 나는 좀 더 성장했었다. 최현숙의 이 일기에도 그런 글쓰기의 가치와 사멸/성장의 변증이 담겼다.
『할배의 탄생』과 『할매의 탄생』 등을 쓴 최고의 노년 전문가이기도 한 저자의 이 『작별 일기』를 곰곰이 읽으면 좋겠다. 그러면 21세기 인간종의 삶/죽음, 그리고 그걸 둘러싼 사회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듯하다. 공무원, 교수, 전문가, 작가뿐 아니라 과학자들과 시민들도 읽고, 어떤 공공적 교훈을 추출하고 모으면 좋겠다. 노인성 질환을 앓으며 느리게 ‘해체’를 향해 고통스럽게 가고 있는 이들과, 또 그들의 똥오줌을 받고 또 많은 병원비를 대느라 고통스러운 이들은 얼마든지 많으니까.
- 천정환 (문화학자, 성균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