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준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눈 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운명일지도 모른다. 명준은 그대로 등 아래에 손을 집어넣어 아이를 들어 차에 태웠다. 아직도 스피커폰에서는 명준을 부르는 혜은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사고 소리,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고스란히 혜은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여보세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고 났어? 지금 뭐 하는 거야? “거, 걱정 마. 어차피 우리가 유괴할 애였어.” --- p.17~18
더러운 것이라도 만지듯 엄지와 검지 끝으로 봉지를 집어 든 로희가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러고는 기가 막힌다는 듯 봉지를 명준에게 내밀었다. “유통기한 2017년 6월 9일까지. 2년도 더 지났어. 안 보여?” 명준은 흠칫했다. “기억이 나? 지금이 몇 년도인지 몇 월인지 아는 거야?” “문맹이야? 달력 있잖아.” 로희가 턱으로 가리킨 벽에 아랫동네 농약사에서 얻어 온 달력이 걸려 있다. 머쓱해진 명준이 얼른 봉지를 받아 들고 등 뒤로 감췄다. --- p.32
“돈이 필요했어.” “그건 이미 아는 얘기고.” 로희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네 아빤 신고할 수 없을 테니까.” 확인 사살을 하듯 혜은이 다시 힘주어 말했다. “돈을 안 줄 수 없을 테니까.”
딸의 수술비를 위해 유괴를 결심한 명준은 범행 중에 실수로 교통사고를 낸다. 차에 치인 아이는 유괴하려던 소녀, 로희. 사고로 기억을 잃은 로희는 명준을 아빠라고 착각하고 이리저리 부려먹는다. 명준은 서둘러 로희를 돌려보내려 로희의 부모와 통화를 시도하지만 그들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다급해진 명준은 로희의 집을 염탐하러 가는데, 그의 눈앞에서 실려 나가는 부부의 시체! 설상가상, 기억은 잃었어도 천재 소녀라 불리던 두뇌는 그대로. 로희는 명준의 어설픈 거짓말을 알아채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