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의 핵심 주제는 종말이 아닙니다. 주 예수님이십니다. 요한계시록의 시작도 주님이셨고, 마지막도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친밀한 주님으로 만나느냐, 낯선 주님으로 만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밥을 누가 대신 먹어 줄 수 없고 호흡을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듯이, 재림하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은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동행 일기’를 쓰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밧모섬 감옥에 갇힌 요한은 마음이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핍박이 무섭게 닥쳐오자 어떤 교회는 무너졌고, 어떤 교회는 세상과 타협했고, 어떤 교회는 이단과 싸우다가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요한은 ‘교회가 이렇게 무너지고 마는가? 복음은 여기서 중단되는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전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그분의 교회들을 결코 포기하시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습니다. 주님을 뵙고 요한은 그 영광에 압도되어 쓰러졌지만 울었을 것입니다.
저도 이 말씀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지금 한국 교회와 성도들과도 함께하고 계심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함께하셨던 주님은 지금 우리와도 함께하십니다. 이것이 믿어지면 세상이 더 이상 커 보이지도, 두렵지도 않을 것입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요한계시록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그 메시지에 빨려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제가 그토록 갈망하는, 지금도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해 주는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반드시 읽으라고 권하고, 또 강해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저처럼 항상 함께하시는 주 예수님을 더 분명히 바라보기 원한다면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기 바랍니다. --- p.19
믿음도 좋고 신학적으로도 반듯했던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이유는 핍박하는 이들과 이단의 무리들을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으로 살려면 항상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의 주님을 바라보아야만 말도 사랑으로, 행동도 사랑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이 내 마음에 임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안에 임하시는 사랑의 주님을 바라보며 처음 사랑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 p.40
우리는 한 해, 한 해를 사는 것이 아니고 하루하루를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한 발짝, 한 호흡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사랑하며, 날마다 영원한 첫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만 생명의 떡인 만나를 주시고 승리를 상징하는 흰 돌을 줄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핍박보다 유혹이 더 무서운 것임을 명심하여 끝까지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 p.67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너무나 소박하여 당황스러울 정도입니다. 언제나 밥을 같이 먹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특별한 순간에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모든 삶 속에서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열심을 내라”, “열심을 냅시다!” 이런다고 열심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교회도, 우리 자신도 생기가 돌게 됩니다. --- p.114
성령은 요한에게 하늘과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을 보여 주시고, 요한계시록 6장부터 18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3가지 환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요한에게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주신 이유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 p.147
주님이 요한계시록 7장에서 요한에게 보여 주시려는 것은 ‘성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보좌 앞’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고난받을지라도 성도가 누릴 영광을 바라보며 두려워하지도, 물러서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구원받는 무리에 속해 있을까?’ 궁금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싶으면 이마를 들여다보지 말고 마음에 성령이 임하셨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신 사람이 인 치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p.160
마지막 심판 때는 두 부류의 사람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 받는 사람과 멸망당하는 사람입니다. 제3의 부류가 없습니다. …두 부류밖에 없습니다. 구경하고 박수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깨우쳐 주실 분은 성령뿐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역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증인임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 pp.213~214
요한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려면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 지혜는 무엇이 사탄의 역사요, 유혹인지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오직 예수’의 믿음으로 살아야 생깁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단순히 믿기만 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의 마음으로 살았고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또렷이 들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을 사람의 손처럼 붙잡고 걸었으며, 하나님과 평생을 함께하며 살았습니다. --- pp.241~242
어떻게 바벨론에서 떠날 수 있습니까? 산속에 들어가야 합니까? 아닙니다. 대도시화가 바벨론 세상의 특징이지만, 산속이나 광야가 답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광야에 혼자 있어도 사탄이 시험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학교를 다니고, 직장도 다니고, 사업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상과 성공주의와 물질주의, 음란과 탐욕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곧 바벨론이니, 정신 차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 pp.291~292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 생명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아들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요일 5:12). 그래서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었는지는 예수님이 내 마음에 임하셨는지를 앎으로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 p.315
우리는 마지막 날 가서야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 안에서 매 순간 새로워지고 다시 시작하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주님은 죄를 씻어 주십니다. 그것은 죄지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정결함으로 다시 시작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실패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 p.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