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과 그리스도인의 경우,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동시에 당신의 거룩한 책이 당신에게 신성하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나의 거룩한 책은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의 거룩한 책은 나에게 신성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동일한 의미에서 그렇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유익을 얻으려고 우리가 다함께 신성한 책들을 읽을 때 그 책들이 모두에게 꼭 거룩해야 할 필요는 없다. 각 사람이 타인의 거룩한 책을 고전적인 영적 텍스트로 취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서로 다른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열린 자세를 갖고 “고전”의 강물이 “신성한”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뜨거운 논쟁을 벌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어귀에서 서로 마주칠 때 그들의 삶은 더욱 풍성해지고 깊어질 것이다. --- p. 51. 신학적 성경 읽기
나는 성경을 신성한 텍스트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처소로, 하나님이 오늘날의 모든 인류와 각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통로로 사용하는 과거의 텍스트로, 전체적인 통일성을 갖고 있되 내적으로는 풍성하고 다양성 가득한 텍스트로 읽는다. 또, 의미들을 기호화하고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굴절시키는 텍스트로, 수용적 태도로 또 상상력을 동원해 관여할 뿐 아니라 신뢰와 비판적 판단과 함께 접근해야 할 텍스트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규정짓되 기독교 공동체의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하는 텍스트로 읽는다.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인을 “거류민과 나그네”로 부른 것에 관해 논의하든지(3장), 인간의 수고의 헛됨에 관한 전도서의 경고를 논하든지(6장), 사도 요한이 말한 “빛과 어둠”의 대립적 이원성을 다루든지(4장),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그의 주장을 거론하든지(5장), 사도 바울의 신학 작업 방식에서 무언가를 배우든지(2장) 간에, 이런 신념들은 내가 성경을 읽는 틀과 성경을 해석하는 렌즈를 구성하고 있다. 나는 나름대로, 성경의 샘물을 마시고 성경을 신학적으로 읽은 과거의 신학자들에게 합류한 결과, 하나님 앞에서 사랑의 삶을 영위하고 이웃과 더불어 기쁘게 살아가는 하나의 인생관을 확립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이 글들이 독자들에게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처소인 성경, 곧 그 마르지 않는 샘에 와서 생수를 마시라고 권하는 초대장의 역할을 하기 바라는 마음이다.--- p. 52. 신학적 성경 읽기
여기서 베드로전서가 강조하는 선교적인 거리를 온건한 차별성(soft difference)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리라 생각한다. 이는 약한 차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차별성은 결코 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차별성은 강하긴 하지만 딱딱하지는 않다. 자신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두려움은 딱딱함을 낳는다. 이런 딱딱함과 손을 잡는 차별성은 언제나 타인에게 양자택일의 대안을 제시한다. 즉, 순종하든지 배척당하든지, “나와 같이 되든지 나를 떠나든지” 하라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선교에서 딱딱한 차별성은 공개적인 혹은 감춰진 압력과 조작, 위협과 함께 작동한다. 다른 한편, 온건한 차별성을 택하겠다는 결심은 베드로전서가 독자들에게 반복해서 권유하는 두려움 없는 태도(3:14, 3:6)를 전제로 한다. 스스로 안정된 사람들 좀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하나님 안에서 안정감을 찾은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온건한 차별성을 안고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은 타인을 복종시키거나 비난할 필요가 없고, 타인에게 그들 나름의 존재가 되도록 공간을 허용할 수 있다. 온건한 차별성을 안고 사는 사람들의 경우, 선교는 기본적으로 증언과 초대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들은 압력이나 조작 없이 타인을 설득하려 하고, 때로는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그렇게 한다(3:1). --- p. 109. 온건한 차별성
타종교에 대한 요한복음의 태도를 “배타주의”로 부르는 것은 그것이 타종교를 부인한다는, 부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중요한 점은 그 종교가 (구원의 길로서의) 다른 경쟁자들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종교가 그들과 관련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다. 정체성은 대립적이고 배타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즉, 나는 스스로 닫혀 있고, 나는 타자가 아닌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체성은 비대립적이고 포용적으로 규정될 수도 있다. 즉, 나는 처음부터 타자가 살고 있는 존재이고, 나는 부분적으로 타자인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체성의 대립적 정의와 비대립적 정의의 핵심은 자아 속에 타자성이 있는지 여부가 아니다. 어느 정도의 타자성은 언제나 자기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 핵심은 오히려 자아 편에서 자기 속에 있는 타자성의 현존을 인식하는 일이다.--- p. 149. 특이한 정치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다른 한편, 이보다 깊은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이 행하는 대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사랑했는지-이루 헤아릴 수 없게, 무조건적으로, 보편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용서하면서-를 아는 문제다.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고 또 어떻게 행해야 하
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이다. 이는 다시 루터의 관심사에 주목하게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면, 하나님이 누구인지, 특히 우리와 관련하여 어떤 분인지를 올바로 아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편지는 곳곳에서 “바른 교리”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인지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이해하면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고픈 동기가 생긴다. 이 두 번째 차원에서, 하나님을 보고 감동을 받아 그분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아는 데 이르는 것이다. --- p. 192. 하나님은 사랑이라
만족을 모르는 인간 속성의 타당한 “대상”은 오로지 무한한 하나님의 신비밖에 없다. 칼 라너(Karl Rahner)가 지적하듯이, 하나님을 아는 최고의 행위는 “그 신비의 폐지나 감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 신비의 궁극적인 선포”에 해당한다. 하나님을 아는 행위 하나하나는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고 또 그것을 불러일으킨다. 즉, 하나님과의 만남은 언제나 인간의 갈증을 채워주고 심화시킨다는 말이다. 인간의 영의 끊임없는 움직임은 무한한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최후의 안식에 도달하기 시작한다.
--- p. 233. 무한을 향한 갈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