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두, 그가 추구한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혼잣말이다. 현대의 회화, 소설 또는 평론에서 말끔히 사라지고 만 것이 이 독어성獨語性, 모놀로그monologue의 정신이 아닐까. ‘모놀로그의 정신’이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나’의 드러냄이며 발가벗은 채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자기 고백’, 그것이다.”_15쪽
“막연한 전위前衛나 실험이 아니라,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것, 즉 한국 냄새가 짙은 작품을 해야겠다. 재료는 서양의 것을 쓰더라도 내용은 한국의 전통을 여과한 참멋을 담아야겠다.”_233쪽
“무국적無國籍 예술은 부평초浮萍草와 같은 것.
언젠가는 물결 따라 바람 따라 자취를 감춰버리고 마는 것!”_277쪽
“예술에서 구체적인 설명은 기술技術을 낳게 하고, 추상적 상징에서 보다 심오한 미美의 경지境地가 열린다.”_315쪽
“어쩌면 죽음이 임박해 있는 것도 같고, 또 어쩌면 멀찌감치 비켜 앉아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도 같은 이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죽음의 입김이 언제나 내 코앞에 다가와 있는 한 나는 잠시라도 내 일을 멈출 수가 없고, 또한 소홀히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늘 이것이 마지막 절대 절명의 순간임을 절감하며, 살아서는 내 혼(魂)불을 끝까지 태워버리자는 것이다.”_331쪽
“‘전통’ 하면 무조건 옛 것을 이어받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통념과 달리 하인두는 내재되어 있는 힘을 끌어내고, 우수한 외래문화를 잘 소화하여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전통이라고 정의했다.”_276~277쪽
“하인두가 색채화가로서 독자적인 세계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화단의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이 해왔던 방법을 발전시켜나갔기에 가능했다. 거기에 더해 폭넓은 독서와 사유, 동서양 미술을 자신의 양식에 맞게 종합한 결과였다.
동료작가들이 종이의 질감에 천착하여 모노크롬으로 일관할 때 하인두는 질감보다는 화면구성과 색채를 통한 정신의 표현해 몰두했다.”_325쪽
하인두, 그의 이름을 부르면 함께 떠오르는 그 시대 한국 화단의 풍경
#먼 나라의 예술 세계를 동경했던 화가들, 화가들의 전시장, 다방
“전쟁이 장기화되고 피난민으로 가득찬 한반도의 한 귀퉁이에서도 서양 모더니즘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한반도 너머 유럽미술, 국제미술을 동경하는 마음이 강렬해질수록 화가들은 자조와 비통에 잠기곤 했다.”_73쪽
“마땅한 전시공간이 없어 피난지 임시 수도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다방과 요릿집을 빌려 개최된 전시회장에 들어서면 우선 신을 벗어야 했다. 다다미의 감촉을 발아래 느끼며 그림들을 감상하노라면 ‘아아, 전람회도 피난 왔구나’하는 회한이 문득 들곤 했다.’”_73쪽.
#국전의 보수성에 전복을 시도했던, 반동의 예술가
“국전에서의 입상은 화단의 장원급제요, 성공의 지름길이었다. 때문에 국전이 열릴 때마다 편파적인 심사와 인맥, 학맥으로 얽힌 운영에 대한 젊은 작가들의 비판이 점차 세차게 퍼져나갔다. 하인두는 이렇듯 기성 미술계에 대한 부정, 구태의연한 국전 아카데미의 전복에 동조하며 20세기 모더니즘에서도 가장 과격한 성격을 보였던 미래주의를 직접 시도해본 것은 아니었을까?”_108쪽
#하인두와 작가들, 도라지 다방에서 한국현대미술의 변혁을 꿈꾸다
“나라 전체를 통틀어 미술인구 150명, 화가는 100명이 채 못 되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어느 집단에든 속하면서 불모지나 다름없는 환경 속에서 그나마 외로움을 달래며 서로를 격려하던 때였다. 집단마다 보이지 않는 판도가 있었다. (중략) 하인두가 들락거리던 도라지 다방은 박서보 화실과 가까웠다. 이 다방에 1958년경부터 1964년까지 한국현대미술의 변혁을 꿈꾸던 작가들이 모여들었고, 하인두는 이 시절을 ‘안국동 시대’라고 일컬었다._118쪽
#앵포르멜과 맞닥뜨린 한국의 예술가들
“앵포르멜은 어느덧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었다. (중략) 어쩌면 앵포르멜이야말로 그를 괴롭히는 끝모를 허무와 절망감, 극도의 불안감이 이렇듯 미친듯이 어지럽게 날뛰는 화면 속에서 오히려 더 적절하게 표현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그를 잡아끌었는지도 모른다.”_127~129쪽
#기성화단에 도전하던 젊은 예술가들, 미술계의 세력으로 성장하다
“일찍이 국전 중심의 기성화단에 도전해온 박서보와 추상작가들은 어느새 국전과 구상미술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중략) 국전이 구상 부분과 비구상(추상) 부분으로 나뉘어야 한다는 이들의 오랜 주장이 드디어 수용된 것이다.”_207쪽
#한국의 화가들, 세계 미술계와 교신하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미국의 막대한 경제원조와 더불어 다양한 문화적 지원 정책으로 미국 문화가 급속도로 유입되었다. (중략) 하지만 하인두는 미국이 아닌 프랑스를 선택했다. (중략) 프랑스와 한국 사이의 미술 교류는 1968년 한불문화협정의 체결을 기점으로 본격화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프랑스를 미술의 중심지로 여겼던 남관과 같은 작가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미술 교류가 전개되고 있었다.”250~251쪽
#서양의 방식을 취했으나 그 안에 전통을 담다
“하인두는 올림픽 개막식 행사에서 보았던 민속놀이와 박생광 작품을 오버랩하며 한국의 색깔, 전통적인 문양을 떠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중략) [역동의 빛] 연작에서는 태극 문양을 연상시키는 원과 색채를 조형 요소로 삼았다.”
_3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