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조용했다.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끝에서 마치 세상의 모든 상실이 겹겹이 층을 이루어 마침내 빛마저 삼켜버릴 어둠으로 피어난 듯한 고독을 느꼈다. 간간이 세찬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가 창을 흔들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그 어둠 너머의 적막이 비명보다도 더 날카롭게 그녀를 흔들고 있었다. 그 순간 선영은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집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 거친 숨이 자신을 집어삼킬 듯했고, 다리가 풀려 당장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았지만, (…) 그저 손끝에 아직 유효하게 남아 있는 그 작은 빛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 p.23~24
도망치는 게 뭐가 나빠, 뭐 난 그런 주의야. 조금 힘드니까 내가 못 하겠다는 건데, 그게 뭐가 나빠? 어울리기가 힘든데 굳이 어울리려고 나라는 사람을 애써 다그칠 필요가 있나 하는 거지. 좋아하면 돼.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걸 좋아하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돼. 그건 이치에 맞지 않아. 불합리한 거야.
--- p.51
아마도 그녀가 지나온 골목은 지금쯤 완전한 밤의 영역에 도달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곳에는 선영이 두려워하는, 하지만 속으로는 꼭 대면하여 그 실체를 확인하고 싶은 대상이 조금씩 이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선영은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풀리지 않은 의문들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간 까닭이다. (…) 하지만 씩씩하게 선영은 손가락 끝으로 옅은 불빛을 밝히며 다시 그 장소로 나아갔다. (…) 진정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장소는 이 도시가 아니라 자기 마음의 깊은 영역이진 않을까.
--- p.65
어쩌면 선영은 오늘 누군가가 자신이 지금 한 질문을 자기에게 해주기를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잘 지내는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와 같은 질문들. 그 사람의 쓸모를 짐작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 자체가 궁금해서 넌지시 던지는 다정한 질문들.
--- p.98
선영은 가장 높은 곳, 가장 화려한 순간의 빛을 끝내 바라보지 않고 가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저기 닿을 수 없는 몇 광년의 거리를 건너뛰어 빛나는 별의 촉감을 획득하는 여행자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이 순간이 지닌 의미들에 마음을 쏟고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불과 몇 초가 되지 않은 시간 동안, 그녀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다른 별의 흐름과 마음으로 대화를 나눈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잠시 후 날아드는 불꽃의 파열음, 선영은 그것이 별의 목소리라고 느꼈다. (…) 가능하다면 그녀는 영혼의 아주 깊은 장소에 그 목소리를 안치하여, 긴 방황의 시기가 찾아올 때마다 그곳에 기대어 조용한 꿈을 꾸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다.
--- p.133~134
때때로 후회는 강물처럼 흘러가지 않고 어느 겨울 눈송이처럼 조용히 쌓여가는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며 인생의 어느 부분은 빼놓은 채로 나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아래에서부터 차츰차츰 소복이 쌓아 올린 것이 바로 나라는 사람일 텐데. 얼어붙은 대지가 오래전의 기억이라면, 그것에 포근한 햇살을 내려주는 것은 오늘의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 p.203
저는 가끔 나를 돌아본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스스로의 감정에 진솔한 태도로 따뜻한 시선을 건네지 못했던 나날들에 대한 돌봄일 것입니다. 때때로 너무 절실했던 시간은 나를 많이 아프게 했지만, 돌아보면 오히려 스스로를 괴롭혔던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내 마음인 것 같습니다. 낭만으로 기꺼이 사랑하고 아낌없이 부서지던 순간들은 이제 자꾸만 아련해질 뿐이고 여전히 살아가며 방황은 시시 때때로 우리를 흔들어놓기도 하겠지만, 나 자신에게 솔직할 때 비로소 개선의 환경도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내게 주어진 생이 사랑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나라는 시간의 역사이길 바라겠습니다.
--- p.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