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미국은 회화나 조각의 주요 흐름에 단 한 번도 제대로 기여하지 못했다.’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심지어 미국의 모더니스트들까지도 국제 미술계의 주류가 되기에는 한참 부족한 동네 미술가로 취급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세계의 리더가 되자 미국 미술가들은 자신들이 주도권을 갖고 새로운 것, 열망이나 모험, 자유, 반고립주의적 정서를 지키는 데 필요한 ‘글로벌 스케일의 문화적 가치들’을 창조하고자 했다.
--- 「1950-1960 초강국에 오른 아메리카」중에서
미 동서부를 가릴 것 없이 시각 예술가들은 자기 작품에 결합할 범상한 물건을 찾기 위해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정크 조각이라고 알려진 이 양식은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콜라주 전통을 3차원으로 연장한 것이다. 이들 작품은 벽에 걸려 있더라도 대결적인 방식으로 관람객의 공간으로 뻗쳐 들어간다. 리처드 스탕키에비치, 존 체임벌린, 마크 디 수베로, 로버트 라우셴버그, 루이즈 네벨슨 같은 아상블라주 작가의 작품은 캘리포니아 미술가들의 작품같이 친절하거나 예의 바르지 않았고, 대개 유머와 불손으로 가득 차 있다.
--- 「1950-1960 아메리칸드림의 이면」중에서
사실 초기 팝아트 작품들은 비교적 느슨하고, 손으로 칠해졌고, 종종 제스처적인 특징을 띠어 추상표현주의와의 관련성이 엿보인다. 앤디 워홀은 춤 동작 도표, 쪽 만화, 광고 등의 초기 이미지들을 직접 손으로 그렸다. 손 작업은 올덴버그와 다인의 제스처적인 양식, 즉 ‘환경’과 해프닝부터 1960년대 초반 올덴버그의 채색 석고 조각과 짐 다인의 오브제가 부착된 모노톤 회화까지 이어지는 작품 스타일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역시 초기 만화 드로잉에서 표현주의적인 제스처를 사용했다.
--- 「1960-1967 뉴 프론티어와 대중문화」중에서
1960년대 후반의 여러 분야처럼 예술계도 불안정성, 불확실성, 새로운 발견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예술가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기는 했지만, 이 시기 새로운 예술은 방향 감각의 상실, 탈구화, 비물질화, 파편화 등 일반적인 특징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런 특징은 좀 더 넓은 사회적 영역에서의 제도적 구조의 붕괴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미술가가 화랑 바닥에 돌더미를 늘어놓든지, 사막에 초크 선을 긋든지, 건물 덩어리를 제거하든지 간에 이런 형식에는 다양한 정치적 태도가 스며있었다.
--- 「1964-1976 기로에 선 미국 」중에서
그라피티는 힙합, 브레이크 댄스, 랩과 연결되었고, 이 모든 것은 콜랩 미술가 찰리 에이헌이 1982년에 만들고 애스터가 주연을 맡은 영화 [와일드 스타일]에 기록되었다. 일부 그라피티 ‘작가’들은 자신의 ‘태그’ 즉 이름을 내세운 브랜드를 그대로 캔버스에 옮겼고, 다른 일부는 그라피티와 팝아트, 초현실주의 등 여러 고급 미술 양식을 결합한 혼성 회화 언어를 발전시켰다. 키스 해링은 지하철 승강장 주변 비어 있는 광고 플래카드나 스튜디오 안의 대형 방수 천 캔버스에 빠르게 작업할 수 있는 단순한 만화 양식의 선 위주 드로잉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기호들을 사용했다.
--- 「1976-1990 복원과 반응 」중에서
미술에서의 다문화는 1980년대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채 꾸준히 작업해 온 유색인종 미술가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뉴욕 뉴 뮤지엄의 ‘연대기 전: 1980년대 정체성의 틀’(1990) 같은 획기적인 전시를 통해 분명히 나타났다. 1993년 휘트니미술관에서 열린 비엔날레에서는 아프리카미국인, 토착 미국인, 아시아계 미국인은 물론이고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다름’의 표현들을 다뤘다. 이 전시가 남긴 가장 기억할 만한 공헌 중 하나는 로스앤젤레스 미술가 다니엘 마르티네즈가 ‘내가 백인이 되기를 원했는지 전혀 상상할 수 없다.’라고 읽히는 배지를 만들어서 미술관 입구에서 나누어준 것이다.
--- 「1990-2000 뉴 밀레니엄을 향한 도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