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숱하게 등장하는 “기억하여라”(신명 5,15; 7,18; 8,2 등)라는 요청은 과거에 관심을 가지라는 촉구가 아니다. 그 요청은 지금 여기에서 “사제들의 나라, 거룩한 민족”(탈출 19,6)이 되기 위해 주 하느님이 하신 일과 가르침을 잊지 말라는 호소였다. 성경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성경 전체가 정보 전달이 아니라 야훼의 백성으로 “한 민족의 종교적 의식과 지각을 형성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저술된 것이다(스카, 인간,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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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시대가 어느 때인지 알 수 있나? … 그 결과 선조 시대를 중기 청동기시대 1기(기원전 2000-1750년)로 여겼던 전통적인 견해는 무너졌다. 그 대신 후기 청동기시대(기원전 1550-1200년)로 잡거나, 아예 특정 시기로 못 박을 수 없다는 견해가 통용된다. “‘선조들의 시대’라는 매우 일반적인 용어를 말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그 시기의 시작이든 끝이든 정확한 시기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드보,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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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지중해 동부 지역의 대규모 인구 이동에 따라 팔레스티나 바깥에서 유입된 인구도 일부 있지만(해양민족과 히브리인들, 일부 유목민처럼), 팔레스티나에 본래 살던 다양한 부류가 산악지대에 모여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했으리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그래서 당시 산악지대의 주민은 어느 한 부류나 종족으로 구성되지 않고 복합적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가나안 성읍들이 파괴되거나 기능을 잃어 방치되면서 도피해온 농민들, 촌락이 사라져 직접 농사를 지으려는 이동목축민들이 대다수이고, 주변 국가의 붕괴로 인해 흘러들어온 사람, 어쩌면 아피루의 일부와 노예들도 합류했을 수 있다. 메르네프타 승전비에 명기된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 무리에 합류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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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시대는 황금시대였나? 솔로몬은 왕궁에서 태어나 줄곧 그 안에서 자란, 왕궁 외부의 삶을 겪지 않은 첫 번째 임금이다. 그러나 그가 안정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며, 공공건축물을 짓고 국제 교역과 외교관계를 펼쳤다는 점에서 비로소 국가 체제가 확고해졌다고 볼 수 있다. … 하지만 성경에 묘사된 왕국의 부유함과(1열왕 4,20-5,14; 10,14-29), 시리아의 하맛 어귀에서 ‘이집트 마른내’에 이르기까지 다스렸다는(1열왕 8,65) 기술은 솔로몬을 중심으로 ‘황금시대’ 전설을 묘사한 것에 가깝다는 주장이 많다.
--- p.129
열왕기는 매우 인색하게 평가하지만, 현존하는 사료와 고고학 발굴 결과로 보면 오므리와 아합 시대는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전체 역사에서 절정기이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가장 비옥한 평야지대까지 확고하게 장악하였고 남북 모두 정치적 안정과 함께 경제적 번영기를 이루었다. … 하지만 신명기계 역사가는 이 모든 영광과 번영을 부질없다고 간주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진정한 ‘야훼 신앙’이다.
--- p.171
바빌론 유배자들은 유다인 중에 소수였다. 그들 가운데 귀환한 유배자들은 더욱 소수였다. 이 극소수의 사람들이 자기들이 깨달은 신앙의 비전을 확립하게 위해 분투 노력한 시기가 페르시아 시대였다. … 유배 후에 돋은 새순은 유배 귀환자들이 품고 온 야훼 유일 신앙이었다.
--- p.233
마카베오 항쟁이 성공한 이후 유다교는 성전에 율법에 한층 집중되었고 개방성과 유연성을 잃어갔다. 유다교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왔던 그리스 문화의 위협을 성공적으로 극복함으로써 유다교의 자의식이 공고해졌으며, 열정적으로 유다교를 옹호하는 민족주의적 경향이 높아졌다. 대다수 유다인들은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고 성전세를 내며 정기적으로 성전에 순례를 갔다. 지역에는 회당이 속속 건립되고 형상과 우상에 대한 거부감이 커갔다.
--- p.255
사도들이 죽고 유다교에서 배제되기 시작한 신생 그리스도교는 믿음의 토대인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문서로 남기기 위해 다양한 문헌을 저술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1차 항쟁 중에 저술되었다고 추정되는 마르코복음서와 기존에 회람되던 바오로의 서간들에게 자신들이 믿고 행해야 할 바를 배우게 되었다. 그 뒤로도 마태오복음서 등 여러 복음서가 예수의 가르침을 풍요롭게 전했고, 중요한 사도들의 이름을 빌려 쓴 서간들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삶의 자세를 일러주었다. 70-120년 사이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주요 작품들이 왕성하게 저술되었다.
--- p.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