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고대 도시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탄생했는지도 의문이지만, 교회를 세운, 요즘으로 치면 개척 목사가 여섯 달 정도 사역하다 떠나 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교회 공동체가 지속되었는지도 큰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훌륭한 목회자는커녕 변변한 목회자조차 없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자신이 속한 지역인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역 전역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좋은 소문이 났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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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공동체, 교회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완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전히 부족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관해서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지 않을 수 없으며,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며, 소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나라가 우리 안에 임했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족해도, 어떨 때는 자기 연민에 빠지고 자신이 형편없다고 느껴져도 새로운 공동체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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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회심하고 각자 알아서 살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물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섭니다. 하지만 우리의 회심을 지켜 주고 온전히 성장하고 변화하도록 돕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이며, 당신의 교회입니다. 공동체에 함께 속한 이들은 서로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제가 당신의 회심이 온전해지도록 돕겠습니다.” 또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 좀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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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정말 건강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선 교회를 찾은 사람이 하나님나라 복음을 잘 이해하고 그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다음에는 받아들인 그 복음에 감격해서 주변 사람이나 교회를 새로 찾은 이들에게 복음을 설명하게 됩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을 누군가 받아들이면 그에게 복음을 따르는 삶에 관해 설명해 주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권면합니다. 그렇게 2-3년 동안 살다 보면 ‘하나님나라 제자’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자신보다 더 앞서가고 있는 신앙 선배들이 그를 더 깊은 성숙으로 인도합니다. 이런 일들이 물 흐르듯이 계속 일어납니다. 이것이 건강한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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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를 이끌던 영적 지도자들이 사라지는 때가 옵니다.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잘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마저 사라지는 때가 옵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의지해 스스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역설적이게도, 데살로니가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한 이유는 바울 일행이 짧은 기간 사역하고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들은 사람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자세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어린 교회였으나 하나님은 이끄미와의 고통스럽고 불가항력적 분리를 통해 오히려 그들을 성장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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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시각에 근거한 파편적이고 왜곡된 지식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자기와 잘 맞는 사람들과 이루어지는 관계에서 얻는 위로와 안도감이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교제일까요? 성도의 교제라고는 하지만, 껍데기만 있고 별 의미가 없는 관계에 우리가 질리는 이유는, 그 교제가 종교적 옷을 입었을 뿐 교회 밖 사람들이 맺는 인간관계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전혀 새로운 공동체가 아니라, 전혀 다르지 않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교회가 있어도 전혀 새로운 공동체, 전혀 다른 관계는 아주 희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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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은 구체적이며 실제적입니다. 하나님나라 복음은 선명하며, 이를 받아들인 그리스인은 선명한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선명하지 않고 모호한 이유는 하나님나라 복음을 두루뭉술하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주 구체적인 지침을 이미 일러 주었고, 다시 상기시킵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도들이 한 번 들어서는 그대로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같은 지침을 반복해서 들려주는 것은 기억하고 훈련하라는 뜻입니다. 훈련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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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는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칭찬을 받았는데, 대개는 공동체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베풀었습니다. “힘이 닿는 대로” “힘에 지나도록” 도왔습니다. “이 정도만 돕자”라고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이건 좀 심해”라고 할 정도로 도왔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권”이라고 여겼으며, 동참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의 특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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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오해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질문합니다. “똑같이 살았는데, 예수 믿었다고 너희는 천국 가고, 우리는 지옥 가냐?” “기독교, 되게 웃긴다. 그런 이상한 종교가 어딨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만, 비그리스도인이 보기에는 말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비슷합니다. 어쩔 수 없이 세상에 속해 살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죽으면 천당 갈 거니까’라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뭔가 좀 찜찜합니다. ‘솔직히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어쨌든 나는 천당 간다니까’라며 고마워하다가도, ‘너무 심한데?’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합니다.
--- p.287
한국인은 누군가 이기고 누군가 지는 패러다임에 익숙합니다.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시험을 보고 자신의 등수를 받았습니다. 가령 10등을 하면 11등부터 자기 밑의 애들한테는 이긴 것이고, 자기 앞에 있는 9등한테까지는 진 것입니다. 늘 승패를 따지는 문화에 젖어 성장했습니다. 여기에 부모가 자녀에게 승패의 패러다임을 강요하면서 불에 기름을 끼얹습니다. 비교하고 차별화해서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하는 도시 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바울은 그렇게 하지 말고, 상대도 이기고 자신도 이기는 방법, 모두에게 좋은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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