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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척

모르는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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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2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90쪽 | 384g | 133*192*20mm
ISBN13 9788927804154
ISBN10 892780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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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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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운이 나빠 살인자의 가족이 된다.
어떤 이는 더욱 운이 나빠 피살자의 가족이 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살인자의 가족인 동시에 피살자의 가족이 되기도 한다. 나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살면서 호의를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었고,
불투명하고 더럽고 역겨운 모든 것을 얻었다.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 p.20

엄마와 어머니는 다르다, 생마를 우유에 갈아 먹이는 사람이 어머니라면 계란을 씌워 부쳐주는 사람이 엄마다 상처에 알코올을 붓고 반창고를 붙이는 사람이 어머니라면 안아주기부터 하는 사람이 엄마다 알람소리에 깨어나도록 훈련시키는 사람이 어머니라면 발가락을 간질여 깨워주는 사람이 엄마다 시간표와 성적표를 캐묻는 사람이 어머니라면 담임선생과 친구들에 대해 물어봐주는 사람이 엄마다,
당신은 철저히 어머니였다, 상관없었다 당신이, 한결같기만 했다면, 나는 끝까지 상관없었을 것이다. --- p.79

「그런데 진심도 변해. 사람이니까. 그리고 결국엔 익숙해지지. 사람이니까.」
「제일 나쁜 건 있지, 기대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거야.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도 당장 나한테 이득이 생기면 마음이 흔들려. 못 이기는 척, 모르는 척 받아들이게 돼. 그게 좀더 지나면 당연해져버리는 거야.」
「그러니까 인근아, 너도 이제 그만해.」
「그만두지 않으면 사라져버려. 네 존재가, 네 인생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거야.」--- pp.200-201

붉은 모래폭풍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얼굴을 때리는 알갱이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숨이 막혔다 모태에 파묻혀 있던 기둥이, 심지 같은 것이 뽑혀나갔다 내 안의 뼈, 생각, 의지 같은 것들인지도 몰랐다 그만두지 않으면 사라져버려, 문정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에서 들렸고, 나는 스님밖에 없었어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어 믿고 의지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사랑받고 싶은 사람도 스님뿐이었어, 그걸 전부 알면서도 스님은 모른 척했던 거야, 문정의 목소리는 내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맞물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발밑이 사막이고, 바다고, 들판이었다, 나는 문정이고, 나이고, 아버지였다, 순식간에 다가온 모래폭풍이 기어코 나를 삼켰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 pp.201-202

나는 어느 쪽으로도 정의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 죽어버렸으나 살아 있었고 살아남았으나 온전한 꼴은 아니었다, 그랬다 나의 세계는, 모든 것이지워지고모든것이불가능했다, 공유와 약속이 불가능한 세계, 모두함께다같이가 사라진 세계, 다음에내일또가 금지된 세계, 덧붙여,
지금현재그리고, 가 파괴된 세계,
묻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어리던 날에는 왜 하필 나냐고 왜 하필 나의 삶만 산산이, 부서져야만, 점선이 되어야만 했느냐고. --- p.207

“아직도 내 탓을 하는 거야? 나 때문에, 아님 인호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변명하고 싶어? 어쩔 수 없었다고? 아니, 넌 그냥 도망치기 쉬운 말만 골라 하고 있는 거야. 너는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어, 나처럼, 얼마든지. 널 이렇게 만든 건 네 어머니도 변 여사도 인호도 아니야. 네가 유령이 되게끔 내버려둔 건 너야, 너를 모른 척 방치한 건 너 자신이라고.”
“네가 죽인 거야, 너를. 앞으로도 너는 계속 남 탓만 하면서, 나를 원망하면서 스스로를 죽이겠지. 한심해. 한심해죽겠어.”
문정이 내 앞에 섰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끝내 입을 열었다,
“여길 떠나자. 나랑, 가자.”
--- pp.26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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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되려 한다. 우리는 의미에 짓눌려 있다. 안보윤은 아이가 자라서 죽은 아버지의 쓸모없는 점퍼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 그것도 깨진 거울이다. 파경(破鏡)이기에 아이는 어른을 비추지 않고 깨뜨린다.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한 패륜아의 미스터리한 내면도, 한 왕따 소년의 정신병리학적 퍼즐 맞추기도 아니다. 그보다는 저 소년의 내면에서 일어난 정념의 원자들이 어떻게 우연을 조합해나가는지, 분노와 두려움과 갈망과 질시로 뒤섞인 저 끈적거리는 무정형의 에너지가 어떻게 생성되고 분출되며 소진되는가를 보아야 한다. 소설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질주한다. 거기엔 “여길 떠나자, 나랑, 가자”는 최초의 프러포즈가 터뜨린 파국의 잭팟이 있다. 그 순간을 우리 중 어떤 이는 엽기적인 막장 드라마의 결정적 국면 하나라고 생각하겠지만, 끝내 우리가 보고도 보지 못한 것은 ‘모르는 척’ 우리 곁에 다가온 우주적 재난이다. 이 세계를 빵 껍질처럼 찢고 나오는 저 무시무시한 우연을 보라. 이곳을 나란히 세워놓고 깡그리 무너뜨린(strike!) 볼링공처럼.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기원에 ‘모르는 척’을 되돌려줌으로써 무의미를 완성한다. 그리고 무의미를 완성함으로써 비로소 무엇인가가, 누군가가 된다.
양윤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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