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족 출신 중화제왕의 종족을 초월한 정책에 의해 형성된 것이 바로 수당 세계제국이었다. 이제 ‘중화’는 편협한 종족주의를 초월한, 이른바 ‘신중화주의’로 변한 것이었다. 중화사상에 내재한 배타적인 화이사상이 쇠퇴하고 보다 보편주의적인 중화사상이 전면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수와 당의 장안성은 세계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기술과 학문을 가지고 경쟁하는 활기찬 세계제국의 수도로써 그 모습을 갖추었다. 당 황제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만국 사람들이 조정 안으로 찾아오고[萬國來庭]’ 혹은 ‘화이가 대동세계를 이루는[華夷大同]’ 형국이 되었던 것이다.
--- pp.45-46
‘호월일가’라는 말은 북조-수당시대에 처음 나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그것이 어디를 지칭하는지 구체성을 띠지 않았던 데 비해 북조-수당대에는 그 구체성이 확실하다. 당 태종이 ‘호월일가’의 형국을 완성시켰다면 그것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제왕은 전진의 부 견이었고, 그 다음이 북위의 효문제였다. 특히 효문제는 “호월의 사람들은 또한 형제와 같이 친해질 수 있다[胡越之人亦可親如兄弟]”라는 인식으로 이른바 용인에 있어서 ‘포용(包容: 兼容幷包)’정책을 폈던 것이다. --- pp114-115
북제에서의 호한융합의 실패 원인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북제 경내에 반한화의 역량을 가진 진양과 한화를 지향점으로 하는 업도의 첨예한 대립과 분열을 우선 꼽을 수 있다. 북제라는 하나의 배 안에 개성이 강한 호와 한 양측이 함께 있어 사회 각 부문에서 호와 한이 양분되어 대립하는 현상을 노정하게 된 것이다. 호와 한을 조정해야 할 입장에 있던 황제 측에서 볼 때, 호쪽이 훨씬 통제하기 힘든 존재였다. 진양을 근거지로 하는 종실과 훈귀 세력은 황제의 통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북위의 전장제도를 그대로 계승했다고 하지만, 북진에서 새로운 야성으로 단련된 이들을 통제할 만큼, 전장 제도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북제의 이중적 구조는 중앙집권화의 실패인 것이고, 그 결과 사회 전반에서 ‘기강의 부재’ 혹은 ‘법제의 이완’ 현상을 가져왔다. 북제가 “문·무관이 그 지위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함이 드물었다[文武在位 罕有廉潔]”라는 부패국가로 낙인 찍힌 것도 그 때문이었다.
--- p.224
서위-북주는 이러한 절박한 입장에 처하여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가장 여건이 불리했지만 『주례』를 채용함으로써 오히려 가장 강점을 갖게 되었다. 오호십육국·북조시대의 가장 현안은 바로 호한 간의 민족 문제였다. 경쟁국이었던 동위-북제가 이 문제를 순조롭게 해결하지 못해 패망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서위-북주는 이 문제를 『주례』를 채용함으로써 해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시대의 역사를 이해할 때, 『주례』 채용 문제를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다. 따라서 『주례』 채용은 호한 문제를 해결하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실 표면적으로는 『주례』제도의 채용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관롱 지역에 모여든 호한 여러 종족의 혼거가 빚어낸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질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견해는 이런 당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것이다. 우선의 과제는 어떻게 하면 많은 인구를 끌어모으느냐였고, 다음 과제는 그들을 어떻게 융합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 p.375
이러한 수와 당 초 황제들의 호족색 짙은 행동양식이 대고구려전쟁에서는 ‘친정’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들이 황위 자체를 획득하거나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친정’의 방식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그 시대의 분위기였다. 특히 등극 과정에서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황제일수록 그런 점은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직접 정벌에 나서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고 많은 약탈물을 획득하여 장사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더욱 굳게 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황제는 탁월한 전략가가 되어야 하고, 후덕한 군사지휘자로서 인민들에게 부각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제반 사항들이 이른바 ‘친정’이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수와 당 초 황제들의 전략가로서의 면모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거의 나타나지만, 특히 당 태종이 뛰어났다.
--- p.455
위진남북조시대는 지방제도가 혼란했던 시기로 유명한데 특히 동진·남조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것은 바로 대량의 유민 발생과 만족의 출산이 그 원인이었다. 먼저 유민들을 각지에 정착시키기 위해 설치한 것이 이른바 교군현제도였다. 아니 유민들이 교군현을 세웠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교군’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군현을 설치한 것은 신대륙 아메리카로 이주했던 유럽인들이 새로운 땅에 고향 명을 붙인 것과 같다. 예컨대 New England라거나 New York, New Amsterdam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동진 원제 태흥(太興) 3년(320) 회덕현(懷德縣)이 교립된 이후 설치된 교군현의 수는 『송서』 주군지에 의하면, 교군 90개, 교현 335개로 동진·유송시대의 전체 238군, 1,179현의 1/3 정도에 해당된다. 교주군현이 설치된 지역은 안휘성·호북성·강서성·호남성·사천성·섬서성·산동성 등이었다. 이들 지역은 강남이 아닌 곳도 있는데,
--- p.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