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1달러 지폐 그림이 이렇게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거래될 수 있었을까? 정확하게 말하면 이는 화가가 직접 그린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1달러 지폐를 그림으로 그린 후 전문 판화가에게 의뢰해 찍어낸 것에 불과하니 작가가 그다지 공력을 들인 것도 아니다. 혹자는 주식을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말하지만, 자본주의의 진정한 꽃은 미술이라고 본다.
단순히 돈만 그려 냈다고 해서 이 그림의 가치가 설명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워홀의 돈 다발 그림은 시장경제 체계에서 미술의 본질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줬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예술을 통해 삶의 일상을 초월하는 무엇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워홀은 예술도 여전히 삶의 그것처럼 자본에 귀속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이 선언한 미술의 자본화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 위력이 점점 더 가속화되는 것 같다. 미술계의 시장 종속화는 날로 심해지면서 예술성은 오직 화폐가치로만 판단되는 실정이다. 좋은 그림은 언젠가는 제값을 받을 것이라는 오래된 신념은 점차 힘을 잃고, 대신 ‘비싸게 팔린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는 본말전도가 일상화되고 있다. 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작가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되면서 작가들은 점점 더 조급하게 시장만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견물생심이라고 〈동방박사의 경배〉나 〈조반니 아르놀피니와 그의 아내 초상〉을 수놓은 진귀하고 호사스런 상품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한번쯤 나도 이런 것들을 가져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화가들의 치밀한 붓 터치는 사물을 생생하게 잡아내고 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쇼핑호스트의 달콤한 유혹처럼 단번에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당시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세계 각국에서 수입된 사치스런 물품들의 향과 촉감을 느껴 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니 당시 그림들은 오늘날 대중매체의 광고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마케팅과 상품 소비의 운명적 공생관계는 단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라, 이 땅에 소비주의가 등장하자마자 생겨난 오래된 전통인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그림은 무엇일까? 현재(2012년 2월)까지는 파블로 피카소의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이다. 이 그림은 2010년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 640만 달러, 한화 약 1,200억 원에 낙찰되었다. 비공식적인 개인 거래에는 이보다 두 배 이상의 작품도 있다고 하지만, 세계 미술 경매 시장에서 공식적으로 거래된 작품 중 이 가격을 넘어서는 예는 아직 없다.
“역사상 미술 가격이 이처럼 상승 곡선을 그렸을 때가 언제였을까?” 하는 질문도 든다. 일반적으로 미술사학자들은 17세기 네덜란드를 미술 시장의 역사적 호황기라고 하지만 개인적인 견해는 다르다. 실상 이보다 먼저 이탈리아에서 미술 가격 상승기가 있었다. 14세기 중반이 바로 그 시기다. 이때 가격 상승과 양적 팽창이 동시에 일어나는 미술 거래의 현대적 패턴이 최초로 발생한 시기였던 것이다.
미술 작품을 살 때 딜러에게 돌아가는 몫은 얼마일까? 법으로 명시된 바는 없지만 관례적으로 5 대 5의 비율이 유지된다. 100을 팔면 50은 작가에게, 나머지 50은 딜러에게 간다는 논리다. 시가 1,000만 원짜리 작품을 팔면 500만 원, 1억 원짜리 작품을 팔면 5,000만 원이 딜러의 몫이다. 간혹 6 대 4, 또는 4 대 6으로 배분되는 경우도 있지만, 작가 대 딜러의 수익분배 원칙은 전 세계적으로 5 대 5가 기준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피카소의 작품도 브랜드가 확실한 딜러에게서 산 작품이 훗날 더 좋은 가격으로 재판매될 수 있다는 말이다. 유명한 딜러에게서 작품을 사면 그 가격이 보장될 수 있다는 오래된 업계의 신뢰가 미술 시장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것이다. 일단 시장에서 신뢰를 얻은 딜러들에게 막대한 수요가 몰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얼마 정도를 지불하면 좋은 그림을 살 수 있을까? 미술과 관계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다. 그럴 때 나는 1,000만 원이라고 답하곤 한다. 이름이 알려진 작가의 그림 중 거실에 걸어 놓을 만한 50호(캔버스 사이즈 116.8×91cm) 정도 크기의 유화 작품 가격이 대체로 그 선에서 거래되기 때문이다.
14세기 후반 그림값의 변동 그래프를 살펴보자. 흑사병이라는 대재앙 직후 갑자기 그림 수요가 몰려 그림 가격이 수십 배 오르지만 다티니가 화상으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그림값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요는 계속 늘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저렴한 소품류의 그림을 많이 찾으면서 평균 그림 가격은 낮아졌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기는 서양에서 미술품 소유의 대중화가 최초로 시작되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서양 근대 미술의 첫 번째 모뉴멘트로 손꼽히는 ‘아레나 예배당’은 철저히 중세 사업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아레나 예배당은 1305년경 당시 최고의 화가로 알려진 조토 디 본도네에 의해 그려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7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림은 기적적이라고 할 만큼 완벽하게 살아남아 있다. 가히 ‘중세 미술의 석굴암’이라고 부를 만큼 대단한 곳이다.
사이토는 이듬해인 1991년에 또다시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번에는 경악이나 분노라는 말이 더 정확할 성 싶다. ‘고흐와 르누아르의 두 그림을 자기가 죽거든 관에 넣어 함께 화장하고 싶다’는 그의 유언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사이토의 이 같은 엽기적인 발언은 세계인들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코지모는 왜 그토록 미술에 정성을 기울였을까? 천하에 타고난 장사꾼이자 정적을 처단할 때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자비했던 그가 미술 사업이나 미술가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운 모습을 보였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일단 그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조반니 루첼라이라는 상인은 미술이 좋은 이유 네 가지를 자신의 장부책에 적었다. ‘소유의 만족감’, ‘신에게 드리는 봉사’, ‘국가에 대한 명예’, ‘자신에 대한 추모’가 그것이다. 코지모의 경우 이보다는 보다 은밀한 이유 때문에 미술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미술 작품의 가격을 정할 때 우선적으로 제작비(재료비+인건비)가 일차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작가의 창의적 가치(미학적으로 말하면 작품의 예술성이 되겠지만, 상업적으로 풀어 보면 작품의 브랜드 가치 또는 투자가치)를 추가하면 작품의 거래가가 형성된다. 즉, “작품 가격=제작비+창의적 가치”라는 공식을 끌어 낼 수 있다. 물론 여기에 판매방식에 따른 적절한 수수료를 추가한다면 최종적인 작품 가격을 쉽게 도출해 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정확히 언제부터 그림 가격을 매길 때 화가의 능력을 재료비보다 더 쳐 주게 되었을까? 미술사학자들은 이 흥미로운 질문의 실마리를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찾고 있다. 15세기 초에만 해도 그림 가격의 상당 부분을 재료비가 차지했다. 금박으로 호화롭게 장식하는 것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상당량의 황금이 소요되었고, 청금석으로 만든 파란색 안료인 울트라마린 같은 고가의 안료에도 많은 돈이 투여되었다.
사실 이 사진 속에는 대기업 총수의 위엄은 온데간데없다. 다만 생각 가득한 아이디어맨의 모습만 있다. 그의 아이디어로 인해 세계를 이끄는 새로운 기업인 이미지가 창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한 장의 사진이 그것을 가장 압축적으로 선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잡스 스스로도 이 사진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공식 자서전 겉표지로 삼았을 정도다.
기업인을 창작인처럼 그리고 있는 잡스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어렵지 않게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에 그려진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을 떠올리게 된다.
무엇보다도 뒤러는 최초로 ‘브랜드’ 개념을 미술에 도입한 작가이기도 하다. 뒤러는 값싼 작품이라도 작가의 존재감이 선명히 새겨져야 더욱 대중을 유혹할 수 있다는 점을 일찍이 간파했다. 〈묵시록의 네 기사〉를 보면 그림 아랫 부분 가운데에 새겨진 마크가 보인다. 바로 그의 새로운 서명이자 뒤러 공방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이렇게 엄청난 미술을 탄생시킬 때 미켈란젤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작업대에 올랐을까? 일견 그림만 놓고 보면 미켈란젤로는 일상적 삶에서도 대단히 고상한 정신을 가진 학자풍 인물이라고 예상할 수 있겠다. 그러나 막상 그의 개인사를 추적하다 보면 대단히 당혹스럽고 모순되는 개성을 만나게 된다.
사실 미켈란젤로의 미학을 말할 때 ‘공포감을 줄 정도의 극한의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테리빌리타’라는 용어를 자주 쓰게 된다. 이 말은 그의 괴팍한 성격을 지칭하는 데에도 아주 꼭 맞아떨어진다. 그야말로 그는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의 다혈질적 성격은 시스티나 성당 작업 때도 수시로 폭발했다.
눈부신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던 렘브란트의 삶은 이제 한순간에 비참해졌다. 그는 자신의 호화 주택에서 빈민가 임대주택으로 이사해야 했다. 신용불량자로 낙인 찍혀 더 이상 어떤 경제 활동도 자신의 이름으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면 곧바로 채무자들이 그의 작품을 뺏어가는 상황이었다. 급기야 렘브란트는 1660년에 두 번째 부인이었던 헨드리케와 아들 티투스의 이름으로 그림 가게를 내고, 자신은 이 화랑에 고용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 나갔다.
루벤스는 화가면서도 자기 매체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섬유, 건축, 파티 인테리어 등 자기의 재능이 발휘될 만한 장이라고 생각하면 주저 없이 참여했다. 특히 당시 사람들이 좋아하던 판화뿐 아니라 책의 표지 디자인 같은 일급 화가가 맡아서 하기에는 다소 허접해 보이는 일거리조차도 서슴없이 받아 처리했다. 판화나 책 디자인을 통해 자기의 이름을 세상 방방곡곡에 알릴 수 있다는 것을 루벤스는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값은 언제 오를까? 지금까지 ‘미술’이라는 알쏭달쏭한 세계를 ‘돈’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명쾌한 도구를 통해 살폈다. 그림 가격의 변동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미술 시장이 태동하던 시기까지 무려 수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림값이 왜 오르내리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란 여전히 어려워 보인다. 경기가 좋아지면 미술 시장 경기도 좋아진다고 답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냉철히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이는 충분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들 수 있다. 나는 이 말 대신 ‘살아서 유명하지 않은 작가는 죽은 후에도 유명해지지 않는다’는 말이 우리 사회 속에 더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