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동안 현역에서 활동해온 의사로서 나는 단언한다. 모든 죄책감은 필요 없다.
- 어떤 경우든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내가 선택한 일이라면 굳이 변명할 필요는 없다. 이 세상에서 똑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다.
- ‘현모양처’, ‘성스러운 어머니’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허상이며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성모가 될 수 없을뿐더러 성모를 목표로 할 필요도 없다. 이 세상에 완벽한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고 시시때때로 잘못을 범한다.
- 문제는 멋대로 만들어낸 근거 없는 자기규정을 가지고 있을 때다. 타인이 볼 땐 전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본인은 진지하게 자신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본다. ‘나는 유치하다’, ‘게으르다’, ‘응석받이다’, ‘제멋대로에 거만하다’와 같은 신념에 얽매여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다.
- 이 병에 걸린 여성들은 아이와 남편에게 신경 쓰고 시중을 들며 그들을 조종하고 가족 내에서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한다. 그렇게 하여 남편은 자기 속옷 하나 챙기지 못하는 남자가 된다. 라면 하나 제 손으로 끓일 줄 모르고 양말 한 짝 제 손으로 빨 줄 모르는 남자만큼 다루기 쉬운 사람은 없다.
- “번듯한 사람이 되어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바람에 얽매인 사람은 이상적인 자신과 현실의 자신 사이의 괴리를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한다. 삶의 기준을 너무 높이 잡으면 거기에 맞춰 살기 위해 늘 허덕일 수밖에 없다.
- 부모의 갈등과 불화 속에서 자녀들은 신음했다. 마음이 아픈 어머니들은 남편에게 쌓인 불평과 불만을 딸에게 남김없이 털어놓으며 딸을 ‘어린 카운슬러’로 만들었다. 어머니의 고통을 자신 탓으로 여기며, 어떻게든 어머니를 웃게 만들고 싶은 자녀는 어머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어머니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지는 나쁜 감정을 모두 받아냈다.
- 이제 그만 어머니를 놓아주면 어떨까? 나를 위해 무조건 희생하는 성스러운 존재가 아닌, 개인적인 욕망을 가진 한 인간으로 인정해주면 어떨까? 그동안 우린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한 인간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아왔다.
- 타인에게 도움이 되든 되지 않든 우리는 자신의 개성에 따라 자신을 위해 살아가려고 태어났다. 누군가에게 희생하기 위해, 누군가의 디딤돌이 되기 위해, 누군가의 인생에 조연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 무엇이 젊은이들을 이런 극단적인 불안 속으로 내몰았을까. ‘성공한 삶은 이런 것이다’라는 길을 몇 가지 규정해두고 수많은 청년을 그 길로만 몰아간 어른의 잘못은 아닐까.
- 나를 믿어주는 친구란 성장기에 받지 못한 부모의 사랑을 대신할 정도로, 어릴 때 받은 깊은 상처를 치유해줄 정도로 큰 힘을 가진 존재이다.
- 가족이라는 폐쇄된 공간은 그 안에서 남자가 여자를 때려도, 어른이 아이를 학대해도, 돈을 버는 사람이 살림하는 사람을 모욕해도 비난받지 않는 일종의 무법지대이자 위험지대다.
- 우리 사회에서는 일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을 주장하면 가정 내의 책무를 방임할 수 있다. “그건 옛날이야기 아닌가요?”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치열한 입시 경쟁에 내몰린 어린 시절부터 공부만 잘하면 그 외의 책무는 일체 면제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 아니던가?
- 분노는 생리적인 현상이지만 원망은 병리적인 감정이다. 분노는 일시적이지만 원망은 지속돼 그 사람의 생활 전반을 지배한다. 분노는 상대의 사랑을 바라지만 원망은 상대의 파멸을 바란다.
- ‘화목한 가족’이라는 이상 아래서 얼마나 많은 가족이 병들어가고 있는지, 그 이상과 조금만 달라도 어떻게 비정상 가족 취급을 받는지, 정상적인 가족처럼 보이기 위해 개인의 욕망과 행복을 어떻게 억압하고 감추어왔는지 너무나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누구 때문도 아닌,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이 당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당신이 매 순간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 때,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감정과 욕망 역시 소중해지고, 딱딱하게 굳어 있던 ‘~다움’이라는 고정관념에서도 자유로워질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