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본주의사회를 살아내는 일이 꽤 고단하지만 적어도 이전 사회보다는 낫다고 확신한다. 꼭 그렇진 않다. 13세기 영국을 기준으로, 농노는 주 31시간 노동했다. 오늘 식으로 말하면 농노는 하루 노동시간이 5시간쯤이고, 그 절반은 제 생산수단을 기반으로 자율 적으로 노동하며, 주택이 무상 제공되고, 평생 고용이 보장된 정규직으로서 주택과 고용을 자식에게 물려주었다.
--- p.13
착취는 자본주의에서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일이다. ‘착취 없는 세상을 바란다’는 말은 실은 ‘자본주의 폐지를 바란다’는 뜻이다.
--- p.38
자본가가 이윤 추구와 축적 활동을 무한 반복하는 이유는 그가 한 인간이기 이전에 ‘인격화한 자본’이라는 데 있다. 자본가의 영혼은 자본의 영혼이다.
--- p.44
인류 역사상 가장 부자라는 제프 베조스Jeff Bezos의 2019년 현재 자산은 170조원이다. 1년 임금 1억원인 사람이 제 임금을 한 푼도 안 쓰고 170만년 모아야 하는 돈이다. 베조스가 그 돈을 다 쓸 수 있는가, 혹은 그 돈이 진짜 필요한가는 자본가로서 그의 활동과 무관하다.
--- p.45
임금 노예는 ‘자본 대 임금노동’이라는 자본주의 사회관계에서 좌변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다. 안정된 임금노동을 할 수 없어 자신과 가족을 자가 착취하는 사장이 된 영세 자영업자도 임금 노예다.
--- p.79
전통적 노예제 사회에서 전체 인구 가운데 노예 비율은 30퍼센트 가량이다. 자본주의사회는 국민, 시민, 인민 등으로 불리는 대부분의 사람이 임금 노예인, 극단적 형태의 노예제 사회인 셈이다.
--- p.80
빈곤한 사람이 자유를 누릴 법적 권리는 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누리기 어려운 상황을 우리는 흔히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자유가 침해된 상태’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온전한 자본주의적 자유다.
--- p.83
자본은 산업 노동인가 서비스 노동인가, 물질적 노동인가 비물질적 노동인가 따위 ‘문명사적’ 변화나 구 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노동자계급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다.
--- p.84
정체성은 계급과 별개가 아니라 확장이다. 계급 착취와 억압은 자본과 임노동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도, 다수자와 소수자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또한 소수자는 정체성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하층 계급 인민은 주요한 소수자이기도 하다.
--- p.93
현재 자본주의 생산력은 대개의 사람이 적정한 삶을 유지하는 데 주 15시간 노동이면 충분한 수준이다. 그러나 ‘주 15시간 노동’은 여전히 꿈같은 이야기다. 왜 노동시간은 줄지 않을까?
--- p.106
원시인이 자연현상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도무지 해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원래 그런 것’이라 치부하는 습성이 있다. 물신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현대인에게 자본주의에서 삶은 해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 앞에 선 원시인 과 다를 바 없다.
--- p.131
자본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지만 개인으로서 삶은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앎과 삶의 분리’는 그의 윤리 문제라기보다는 그의 삶이 물신성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 p.134
계급사회로서 자본주의의 특별함은 지배계급이 주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일한 주인은 자본, 즉 물신이다. 지배계급은 물신의 명령과 의지를 따라 제 역할을 수행하는 ‘지배계급 역할을 맡은 노예’일 뿐이다. 인터넷 시대의 슈퍼 자본가는 단지 성공한 부자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혁명가이자 선지자로 추앙된다.
--- p.135
자유가 절실할수록 자유의 의미를 분별하기 어렵다. 자유는 자유주의적 자유 로,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오해되는 것이다. 오랜 싸움 끝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다들 환호하는 사이, 즉 자본화에 대한 경계의식이나 견제가 해제된 사이 매우 빠르게 전면적인 물신사회로 치닫게 된다.
--- p.154
한국이 민주화 이후 불과 20여 년 만에 세계 최고의 자살률 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젊은 세대가 제 나라를 ‘지옥(헬조선)’이라 부르게 된 건 한국이 이전보다 빈곤해져 서는 아니다. 삽시간에 극단적 물신사회에서 살게 되었다는 데 있다.
--- p.156
지식인들은 온통 거대담론에 경도되다가 오류나 한계가 발견되면 다시 온통 미시담론에 경도된다. 그 전환 사이에 합당 한 비판과 성찰을 찾아보긴 어렵다. ‘거대담론의 시대’와 ‘미시담론의 시대’가 있을 뿐이다. 거대담론 시대에 미시담론에 주목하면 ‘반동적 자유주의자’로 치부하고, 미시담론 시대에 거대담론에 주목하면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라 치부하는 식이다.
--- p.193
역사가 알려주듯 어떤 지배계급도 사회를 위해 제 기득권을 먼저 양보하는 일은 없다. 아예 다 잃진 않기 위해 마지못해 타협할 뿐이다. 북유럽 복지사회는 자본주의 극복을 지향하는 강력한 혁명적 노동운동과,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노동운동에 참여한 많은 노동자들과 그에 위협을 느낀 지배계급의 타협으로 만들어졌다. 그 사회를 ‘계급 타협’ 시스템이라 부르는 이유도 그것이다.
--- p.214
변화는 ‘질문의 재개’로 시작한다. 예컨대 다들 ‘인공지능과 로봇의 시대를 맞아…’라 말할 때,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 인간이 그것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것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질문이다. 다들 ‘인간의 노동이 필요 없어지는 세상을 맞아…’라고 말할 때 ‘모든 인간은 노동할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줄어야 할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노동시간이 아닌가?’ 질문이다. ‘집이나 부동산이 사적 소유물이어야 하는가?’ ‘거대 독점자본(재벌, 대기업)은 공유되는 게 모두에게 좋지 않은가?’ ‘자본주의하에서 기후 위기를 막을 수 있는가?’ 잃어버린 질문들이 재개되고 새로운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 p.234
근래 주목받는 ‘커먼즈commons’는 바로 공유 사회를 지향하는 운동이다. 핵심은 이 운동이 공유의 가장 주요한 표적을 향하고 있는가, 일 것이다. 거대 독점자본의 공유를 회피한 채 일상에서 공유 실천을 말한다면 일부 중산층의 좋은 세상 만들기 놀이를 넘어서기 어렵다.
--- p.223
혁명은 인민의 자기해방이다. ‘자기해방’은 개인이 혼자 힘으로 해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누구도 그럴 순 없다. 또 한 다른 사람이 나를 해방해줄 수 없다. 자기해방은 내가 해방의 주체라는 의미다. 억압 상태에 있는 나를 다른 사람들이 빼내 줄 수 있다. 그것은 ‘구출’이지 해방은 아니다. 해방은 나를 억압하는 시스템 앞에 서는 일, 내가 그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 앞에 서는 일을 씨앗으로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결단에 이른다. 벼락같은 ‘메타노이아metanoia’의 순간이다. 메타노이아로 자기해방의 도정이 시작된다.
--- p.238
우리는 자본주의사회를 살아내는 일이 꽤 고단하지만 적어도 이전 사회보다는 낫다고 확신한다. 꼭 그렇진 않다. 13세기 영국을 기준으로, 농노는 주 31시간 노동했다. 오늘 식으로 말하면 농노는 하루 노동시간이 5시간쯤이고, 그 절반은 제 생산수단을 기반으로 자율 적으로 노동하며, 주택이 무상 제공되고, 평생 고용이 보장된 정규직으로서 주택과 고용을 자식에게 물려주었다.
--- p.13
착취는 자본주의에서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일이다. ‘착취 없는 세상을 바란다’는 말은 실은 ‘자본주의 폐지를 바란다’는 뜻이다.
--- p.38
자본가가 이윤 추구와 축적 활동을 무한 반복하는 이유는 그가 한 인간이기 이전에 ‘인격화한 자본’이라는 데 있다. 자본가의 영혼은 자본의 영혼이다.
--- p.44
인류 역사상 가장 부자라는 제프 베조스Jeff Bezos의 2019년 현재 자산은 170조원이다. 1년 임금 1억원인 사람이 제 임금을 한 푼도 안 쓰고 170만년 모아야 하는 돈이다. 베조스가 그 돈을 다 쓸 수 있는가, 혹은 그 돈이 진짜 필요한가는 자본가로서 그의 활동과 무관하다.
--- p.45
임금 노예는 ‘자본 대 임금노동’이라는 자본주의 사회관계에서 좌변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다. 안정된 임금노동을 할 수 없어 자신과 가족을 자가 착취하는 사장이 된 영세 자영업자도 임금 노예다.
--- p.79
전통적 노예제 사회에서 전체 인구 가운데 노예 비율은 30퍼센트 가량이다. 자본주의사회는 국민, 시민, 인민 등으로 불리는 대부분의 사람이 임금 노예인, 극단적 형태의 노예제 사회인 셈이다.
--- p.80
빈곤한 사람이 자유를 누릴 법적 권리는 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누리기 어려운 상황을 우리는 흔히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자유가 침해된 상태’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온전한 자본주의적 자유다.
--- p.83
자본은 산업 노동인가 서비스 노동인가, 물질적 노동인가 비물질적 노동인가 따위 ‘문명사적’ 변화나 구 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노동자계급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다.
--- p.84
정체성은 계급과 별개가 아니라 확장이다. 계급 착취와 억압은 자본과 임노동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도, 다수자와 소수자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또한 소수자는 정체성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하층 계급 인민은 주요한 소수자이기도 하다.
--- p.93
현재 자본주의 생산력은 대개의 사람이 적정한 삶을 유지하는 데 주 15시간 노동이면 충분한 수준이다. 그러나 ‘주 15시간 노동’은 여전히 꿈같은 이야기다. 왜 노동시간은 줄지 않을까?
--- p.106
원시인이 자연현상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도무지 해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원래 그런 것’이라 치부하는 습성이 있다. 물신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현대인에게 자본주의에서 삶은 해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 앞에 선 원시인 과 다를 바 없다.
--- p.131
자본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지만 개인으로서 삶은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앎과 삶의 분리’는 그의 윤리 문제라기보다는 그의 삶이 물신성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 p.134
계급사회로서 자본주의의 특별함은 지배계급이 주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일한 주인은 자본, 즉 물신이다. 지배계급은 물신의 명령과 의지를 따라 제 역할을 수행하는 ‘지배계급 역할을 맡은 노예’일 뿐이다. 인터넷 시대의 슈퍼 자본가는 단지 성공한 부자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혁명가이자 선지자로 추앙된다.
--- p.135
자유가 절실할수록 자유의 의미를 분별하기 어렵다. 자유는 자유주의적 자유 로,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오해되는 것이다. 오랜 싸움 끝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다들 환호하는 사이, 즉 자본화에 대한 경계의식이나 견제가 해제된 사이 매우 빠르게 전면적인 물신사회로 치닫게 된다. --- p.154
한국이 민주화 이후 불과 20여 년 만에 세계 최고의 자살률 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젊은 세대가 제 나라를 ‘지옥(헬조선)’이라 부르게 된 건 한국이 이전보다 빈곤해져 서는 아니다. 삽시간에 극단적 물신사회에서 살게 되었다는 데 있다.
--- p.156
지식인들은 온통 거대담론에 경도되다가 오류나 한계가 발견되면 다시 온통 미시담론에 경도된다. 그 전환 사이에 합당 한 비판과 성찰을 찾아보긴 어렵다. ‘거대담론의 시대’와 ‘미시담론의 시대’가 있을 뿐이다. 거대담론 시대에 미시담론에 주목하면 ‘반동적 자유주의자’로 치부하고, 미시담론 시대에 거대담론에 주목하면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라 치부하는 식이다.
--- p.193
역사가 알려주듯 어떤 지배계급도 사회를 위해 제 기득권을 먼저 양보하는 일은 없다. 아예 다 잃진 않기 위해 마지못해 타협할 뿐이다. 북유럽 복지사회는 자본주의 극복을 지향하는 강력한 혁명적 노동운동과,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노동운동에 참여한 많은 노동자들과 그에 위협을 느낀 지배계급의 타협으로 만들어졌다. 그 사회를 ‘계급 타협’ 시스템이라 부르는 이유도 그것이다.
--- p.214
변화는 ‘질문의 재개’로 시작한다. 예컨대 다들 ‘인공지능과 로봇의 시대를 맞아…’라 말할 때,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 인간이 그것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것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질문이다. 다들 ‘인간의 노동이 필요 없어지는 세상을 맞아…’라고 말할 때 ‘모든 인간은 노동할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줄어야 할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노동시간이 아닌가?’ 질문이다. ‘집이나 부동산이 사적 소유물이어야 하는가?’ ‘거대 독점자본(재벌, 대기업)은 공유되는 게 모두에게 좋지 않은가?’ ‘자본주의하에서 기후 위기를 막을 수 있는가?’ 잃어버린 질문들이 재개되고 새로운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 p.234
근래 주목받는 ‘커먼즈commons’는 바로 공유 사회를 지향하는 운동이다. 핵심은 이 운동이 공유의 가장 주요한 표적을 향하고 있는가, 일 것이다. 거대 독점자본의 공유를 회피한 채 일상에서 공유 실천을 말한다면 일부 중산층의 좋은 세상 만들기 놀이를 넘어서기 어렵다.
--- p.223
혁명은 인민의 자기해방이다. ‘자기해방’은 개인이 혼자 힘으로 해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누구도 그럴 순 없다. 또 한 다른 사람이 나를 해방해줄 수 없다. 자기해방은 내가 해방의 주체라는 의미다. 억압 상태에 있는 나를 다른 사람들이 빼내 줄 수 있다. 그것은 ‘구출’이지 해방은 아니다. 해방은 나를 억압하는 시스템 앞에 서는 일, 내가 그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 앞에 서는 일을 씨앗으로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결단에 이른다. 벼락같은 ‘메타노이아metanoia’의 순간이다. 메타노이아로 자기해방의 도정이 시작된다.
--- p.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