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교리정해(聖經敎理精解)의 시대적 요청
1. 신학자 칼빈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존 칼빈(Ioannes Calvinus, Jean Calvin, 1509-1564)은 ‘오직 성경에 따라서(sola Scriptura)’ 개혁신학을 선구적으로 수행한 성경의 교사요, 해석자요, 수호자였다.
칼빈의 신학과 삶은 그와 신학적 대척점에 서 있었던 로마 가톨릭신학자들, 재세례주의자들, 유니테리언주의자들, 이성주의자들, 은사주의자들, 자연주의자들, 실존주의자들, 그리고 기독론과 성찬론을 비롯한 근본교리들에 있어서 첨예한 대립을 보였던 루터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왜곡되게 그려져 왔다.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칼빈의 신학에 의해서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났던 만큼 비신학적인 칼빈 혹은 탈신학적인 칼빈을 그려내기에 몰두했다. 과연 칼빈은 신학적 주견 없이 그저 논쟁만을 일삼던 한 종교주의자에 불과했던가?
칼빈의 칼빈다움은 그가 신학자였다는 사실에서 가장 뚜렷하게 부각된다. 그는 신학자로서 설교자였으며, 신학자로서 기독교 저술가, 목회자였다. 칼빈은 자신의 시대에 일어났던 첨예한 신학적 논쟁들의 중심부에 있었으며, 그러한 논쟁들을 통하여서 생애의 후반부로 갈수록 신학자로서의 명성을 더하였다. 그는 1509년 7월 10일에 났으며 1535년 8월 23일, 불과 스물여섯 살을 갓 지났을 즈음, 기독교사에 길이 남을 한 권의 책을 써서 당시 철권(鐵拳)을 휘둘렀던 불란서 국왕 프란시스 1세에게 『기독교 강요』라는 이름으로 헌정했다. 그것은 당대 교황주의 신학자들을 겨냥한 신학적이며 교리적인 서책이었다.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에게 칼빈이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첫 계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주장하여 사제 중보주의에 찌든 중세주의자들을 통렬하게 비판한 콥 총장의 연설문을 쓴 신학자로써였다. 당시 흥기했던 재세례주의자들 역시 자신들의 영혼수면설을 아주 엄밀하게 조목조목 반박한 신학자로서 칼빈을 인식했다. 칼빈과 동시대를 살았던 루터란들은 이신칭의 교리에 있어서는 자신들의 견해와 합치하나 기독론과 성찬론에 있어서는 뚜렷한 이견을 보인 신학자로서 칼빈을 기억하였을 것이다.
칼빈의 생애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읽혀져야 한다.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직무는 정치적이거나 사법적이었다기보다는 오직 신학적이며 목회적이었다. 칼빈은 한 번도 세속 정치인의 자리에 선 적이 없었으며 단지 성경의 선포자요 교사로서 제네바를 영적으로 지도했을 뿐이다. 칼빈의 권위는 제네바 목사장로회의 수석목사로서 권징에 대한 신학적 판단을 하는데 국한되어 있었다. 당시 권징은 아주 제한적이어서 수찬정지가 출교를 대신했는데 그나마 제네바 의회의 간접적인 후견 가운데 시행되었다. 칼빈은 항상 신학적 논쟁들의 중심에 있었다. 이러한 논쟁들은 많은 경우 정치적인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자신의 입장을 정립된 교리로써, 문건으로써, 책으로써 개진했을 뿐 어떤 정치적인 대응도 한 적이 없었다.
2. 칼빈의 중심교리
칼빈의 신학을 일의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이성적 전제나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계시하는 다양한 관점에 따라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모든 성경 구절의 가치를 차등 없이 주석하고 설교하였으며, 오늘날 교의신학의 논제가 되는 거의 전 교리를 신학적으로 가르치고, 선포하고, 변증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신학의 요체(要諦)는 다음과 같이 포괄적이며 통전적으로 제시됨이 마땅하다.
첫째, 성경의 가르침이 존재적, 지식적, 도덕적 관점으로 고찰된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시며, 스스로 진리이시며, 스스로 의로우시므로, 뜻하신 즉 이루시고 이루신 즉 옳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 그분의 어떠하심을 아는 앎, 그 앎에 따라서 사는 삶이 동시에 함께 추구되어야 한다.
둘째, 한 분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시고 일하심, 즉 삼위일체 교리가 존재적이며 경륜적으로 파악된다. 무한하고 절대적인 영으로서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며, 스스로 계시하시고, 스스로 역사하신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뜻하심과 역사하심에 대한 진리를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
셋째, 특별은총과 함께 일반은총이 강조된다. 일반은총은 모든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일반계시적 은총이다. 특별은총은 택함 받은 백성만이 인식하는 특별계시적 은총이다. 하나님을 바로 앎으로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중생자의 지식은 오직 특별계시로만 말미암는다. 일반계시는 유기된 백성이 무지를 핑계할 수 없는 조건이 될 뿐이다.
넷째, 계시와 은총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역사한다는 사실이 부각된다. 그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 때문이다(요 1:14, 17). 주님께서 말씀 자신, 말씀의 성취, 말씀의 해석자시다. 은총이 없는 지식은 거짓이며, 지식이 없는 은총은 헛되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길, 생명의 진리이시다(요 14:6). 그러므로 주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요 17:3).
다섯째,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으로 조명되어 감화 받은 심령이 믿음으로 받아들임(受納)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과 지혜의 부요함에 이르게 됨이 강조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 객관적 진리로서 영원히, 스스로, 실재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지닌 사람에게만 이 말씀을 인격적으로 계시하셨다.
여섯째, 언약의 두 요소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가 논해진다.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율법의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우리의 거룩함과 생명이 되셨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을 내어주시고 그 대리적 속죄의 공로를 값없이 우리에게 전가해 주심에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의 의로부터 시작된다.
일곱째, 다 이루신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심으로써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의롭다 삼고 받아주신다는 이중적 은혜가 역동적으로 논의된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단회적이나 법정적이므로 성도의 전체 구원 과정을 통하여 계속적이며 반복적으로 역사한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참 믿음은(갈 5:6) 필히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이신칭의의 법정적 은총 외에 그 어디에서도 성화의 조건을 찾을 수는 없다.
여덟째,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그분과 연합한 성도가 그분의 중보로 말미암아 그분께로 자람을 성화의 핵심으로 여긴다. 구속의 사역을 다 이루신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여전히 성도를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에 성도는 “예”가 되신 그 분께 “아멘”하여(고후 1:20) 그 분의 공로를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된다. 성도의 의는 오직 자신 속에 사시는 그리스도께 구하여 그 분께서 친히 자신의 일을 행하게 하심에 있다(요 14:13-14). 성령의 임재는 곧 주 내 안에 사심이다. 성령의 임재는 절대적, 인격적이므로 각자에게 단회적이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을 더하여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서 마음껏 사시도록 회개하고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는 것이다.
아홉째,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가 제시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 된 성도는 그 분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롬 8:17). 언약의 은혜는 영생의 삶으로 열매를 맺는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영원히 함께 사시기 때문이다.
열째, 뜻을 다하여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본질로 여긴다. 성도는 죄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세상의 멍에는 벗어 버렸으되 이제 주님의 멍에를 멘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 주님의 멍에는 은혜의 멍에이다. 그것은 새의 날개와 같아서 오직 그 멍에를 멘 사람만이 멀리, 높이 날아서 신령한 것을 누리게 된다.
열한 번째,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는 성도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성도의 표지로서 부각시킨다. 구원의 확신은 말씀과 성령의 역사 가운데 전인격적으로 주어진다. 공로 없이 주어지는 선택의 은혜를 감사하는 자는 날마다 감사하는 삶을 살고 그 삶을 영적 산 제물로 하나님께 되돌려 드린다. 부르심을 확신하며 좇아가는 성도의 삶 그 자체가 곧 예배이다.
열두째, 교회의 본질은 그것이 한 분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아 지체된 백성들의 연합체라는 사실에서 파악된다. 교회의 본질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에 있다. 이러한 본질은 동서고금을 통하여서 택함 받은 백성의 총수로서 이루어지는 비가시적 교회를 지시한다. 지상의 가시적 교회는 비가시적 교회와 함께 유기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지상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하고 성례를 합법적으로 거행하는 표지로써 그 참됨이 제시되며 몸의 힘줄과 같은 권징의 합당한 시행을 통하여서 그 순결함이 유지된다. 교리는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이 된다. 교회의 교리는 비가시적 교회의 비밀이 가시적 교회 가운데 교훈이나 규범으로 나타나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수립된다.
열셋째, 성례를 통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의 연합이 제시된다. 세례는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시작의 표이다. 그것은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중생의 은혜를 표한다. 성찬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계속의 표이다. 그것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중보에 의지하여 날마다 머리되신 그분께로 자라가는 삶을 사는 것을 기념한다. 성례는 의의 전가와 함께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가 되는 삶을 사는 성도의 즐거움을 제시한다. 이렇듯 성례의 수직적 성격과 함께 수평적 성격이 부각된다. 칼빈이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 가운데서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함께 일어남을 성례신학의 핵심으로 여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열넷째, 시민 국가의 삶의 원리를 사랑과 절제와 공평에서 찾음으로써 자연법과 하나님의 법과의 본질적 일치를 추구한다. 위정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법을 집행한다. 법은 국가의 힘줄과 같다. 시민법은 지상의 삶에 맞추어주신 하나님의 일반은총적 은혜의 질서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서 존중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법과 무조건 배치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율법이든 자연법이든 실정법이든, 모든 법의 궁극적인 수여자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법수여자의 뜻을 이루는데 있다.
칼빈신학의 중심 주제를 일의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며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도 획일화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칼빈이 성경 전체를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삼위일체론의 관점에서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존재와 경륜이 전제된다. 기독론의 관점에서 그 말씀이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리를 위한 계시라는 사실이 확정된다. 스스로 계시고(in se) 역사하시는(per se)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pro nobis) 하나님이시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 하나님의 주권 신학이 자리 잡고 있다. 이로부터 겸손의 신학이 배태된다.
칼빈의 신학은 개혁주의의 기초, 본질, 정수로서 작용했다. 칼빈의 신학은 칼빈신학자들에 의해서 비로소 ‘신학화’ 된 것이 아니었다. 칼빈은 성경의 진리로써 자신의 신학을 고유하게 수립한 신학자였다. 역사적 칼빈주의는 칼빈신학의 역사적 적용이었다. 그러므로 후대의 관점에서 칼빈을 이용만 할 것이 아니라 칼빈의 관점에서 칼빈을 읽도록 해야 한다.
3. 기독교 강요: 순수한 경건의 가르침
기독교 강요는 그 초판에서부터 교훈적, 고백적, 변증적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었다. 성경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교리로서 삼았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교훈적이었다. 칼빈은 본서의 목적이 참 경건에 대한 근본적인 교리들과 함께 그것들을 가르치는 형식을 제시하는데 있다고 천명하였다. 본서의 고백적 성격은 그것이 성령의 내적인 감화를 통하여 믿음으로 수납한 계시의 진리를 충실하게 진술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본서는 또한 참 교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변증적 서책이었다. 로마 가톨릭의 형식주의와 계급주의, 제세례파주의자들의 신비주의가 거침없이 비판되었다. 당시 철권 국왕 프란시스 1세에게 본서를 헌정하며 그가 참 진리로 돌아설 것을 권고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러한 변증적 취지를 잘 예시한다.
1535년에 탈고되어 1536년에 출판된 기독교 강요 초판은 루터의 대. 소요리 문답의 영향을 받아서 전통적인 신앙교육서(catechism)의 순서를 기본적으로 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칼빈은 종교적 관용, 카톨릭의 잘못된 성례들,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 등 민감한 변증적 주제들을 함께 다루었다. 초판은 신약 성경의 사분의 삼 정도가 되는 분량으로 절의 구분이 없이 여섯 장으로 구성되었다.
초판 제 1장은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율법 교리에 할애되었다. 제 2장은 사도신경의 해설을 통하여서 신앙의 개념과 조목을 다루는데 집중되었다. 제 3장은 기도에 관한 바른 이해를 제시했다. 제 4장은 성례를 개론, 세례, 유아 세례, 성찬의 순으로 다루었다. 제 5장은 잘못된 로마 가톨릭의 성례를 비판하는데 할애되었다. 마지막 제 6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교리에 돌려졌다. 여기에서는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가 입법권, 사법권, 재판권이라는 측면에서 자세하게 전개되었다.
기독교 강요는 칼빈의 생애를 통하여서 라틴어와 불어로 계속 증보 편집되었던 바, 라틴어로만 5판이 나왔다. 저명한 칼빈신학자 브노와(Jean-Daniel Benoit)에 의하면 기독교 강요의 발달은 “유기적”이었다. 그것은 한 지체가 자라면 전체 몸이 동시에 자라는 생물체의 성장과 같은 것이었다.
1539년 제 2판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새로운 주제의 장들을 신설하거나 초판의 본문들을 여러 장으로 분할해서 더욱 조직신학적인 체계를 갖추게 했다. 제 2판에서는 하나님의 지식에 관한 초판의 언급이 독립된 장으로서 발전했다. 회개에 대한 논의가 한 장으로서 칭의의 장 앞에 들어갔다. 그리하여서 이후 전형적으로 전개되는 ‘회개-칭의’의 구조가 확립되었다. 또한 예정론과 섭리론에 관한 독립된 장이 새로 생겼다. 그리고 신구약의 일치와 차이에 대한 장이 새롭게 수립되어서 언약신학의 단초를 제시했다. 뿐만 아니라 후에 “황금의 작은 책”이라고 불렸던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라는 이름의 장을 신설하여 “미래를 묵상하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으로서 그것의 요체가 제시되었다.
1543년에 출판된 제 3판과 1550년에 출판된 제 4판에서 칼빈은 교부들의 작품들로부터 다양한 인용을 추가하여 교회론과 시민정부론을 획기적으로 심화시켰다. 특히 주목할 것은 초판 이후부터 여러 곳에 흩어져 논의되던 믿음에 관한 논의들이 많은 분량으로 증보되어 새로운 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1559년 마지막 판 기독교 강요는 무려 80장에 달하는 큰 책이 되었다. 장을 묶는 ‘권’을 넷으로 했다. 그리하여서 처음으로 권-장-절의 구조를 취하게 했다. 그 분량으로는 성경 전체와 맞먹게 되었다. 여기에서 칼빈은 전체 교리체계를 사도신경에 따라서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다루었다.
제 1권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 대한 개괄적 고찰을 한 후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다룬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삼위일체론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논구한다.
제 2권에서는 먼저 타락한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다루고 이로부터 중보자 그리스도의 필연성을 논한다. 여기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바로 다루지 않고 먼저 율법과 신약과 구약의 일치와 차이에 대해서 몇몇 장들을 할애한다. 이로써 칼빈은 전체 성경의 실체가 그리스도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제 3권에서 칼빈은 먼저 성령에 관한 논의에 한 장을 할애하고 이어서 믿음-회개-기독교인의 삶-이신칭의의 원리를 순서대로 다루고 있다. 이 부분에서 칼빈은 따로 장을 두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의 교리를 전체 구원론의 기초로 삼고 있으며 그 위에 이신칭의의 원리를 세우고 있다. 그리고 이신칭의의 장 바로 다음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다룬 장을 두고 이를 “칭의의 부록”이라고 불렀다. 제 3권의 나머지 부분은 예정론과 기도론 그리고 최후의 부활이라고 제목을 붙인 종말론에 할애된다. 예정론이 은혜의 한 방편인 기도와 함께 다루어졌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칼빈은 예정론을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면서 살아가는 감사의 영역에서 이해했다. 종말론적 언급이 구원론과 교회론 사이에 나타나는 것은 마지막 판 기독교 강요가 사도신경의 순서를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칼빈에게 있어서 종말론은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지금’ 의미 있는 교리로서 이해된다.
제 4권은 교회론과 시민국가론을 다루었다. 교회와 국가 모두 입법, 행정, 사법의 관점에서 논구되었다. 특히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를 함께 논의하면서 참 교회는 양자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을 통하여서 그 일치를 추구해야 함을 전체 문맥 가운데서 도도하게 강조하고 있다. 교회는 수직적인 진리와 수평적인 사랑이 모이는 바로 그 점으로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서 성례의 언약성과 공동체성이 함께 강조되었다. 마지막으로 한 장을 할애하여 다룬 시민국가에 대한 교리도 이러한 가시성과 비가시성, 수직성과 수평성에 기초해서 전개되었다.
4. 칼빈-개혁신학
칼빈의 사상은 그를 잇는 개혁주의자들에 의해서 더욱 정치(精緻)하게 교리화된 것이 사실이나 단지 개혁신학의 효시(嚆矢)로서만 의의를 갖는 것은 아니다. 칼빈의 후예들 가운데서 칼빈에 필적할 만큼 성경의 진리를 심오하고 부요하게 다루었던 신학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칼빈은 성경의 가르침 자체가 교리적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신학을 가르치는 길이 이미 제시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칼빈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칼빈을 풀어내는데 그들의 사명이 있음을 깨달았다. 역사상 개혁주의는 칼빈의 신학이 각각의 상황에 고유하게 토착화되면서 여러 양상으로 수립되었다. 칼빈의 가르침이 제네바에서는 베자로부터 프란시스 뚜레틴에 이르는 제네바 개혁주의로, 불란서에서는 불란서 개혁주의로, 독일에서는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에 기초한 독일 개혁주의로, 화란에서는 걸출한 언약신학자들을 거쳐서 카위퍼와 바빙크에 이르는 화란 개혁주의로, 잉글랜드에서는 펄킨스와 오웬 등으로 대표되는 청교도주의로, 스코틀랜드에서는 녹스와 러더포드의 장로교로 전개되었다. 미국의 장로교는 잉글랜드의 청교도주의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가 역사적으로 어우러져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서구사회에서 토착화된 개혁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개혁교회로서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미국의 장로교가 한국 개혁주의의 씨앗으로서 심겨졌다. 그것이 자라는 과정에서 화란 본토와 미국의 개혁교단으로부터 전해진 화란 개혁주의 신학이 함께 작용을 했다. 한국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와 대, 소 요리문답서의 가르침을 채택함으로써 언약사상에 기초한 구원의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를 중시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특별은총과 함께 일반은총의 교리를 심화시킴으로써 교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 있어서의 삶의 헌신이 강조되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