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여 대리적 속죄를 이루셨다는 점에서 십자가는 분명 대속적 사건이지만(3:13), 이 대속 개념이 현 문맥의 강조점은 아니다. 십자가를 통한 구속적 희생의 목적은 “현재의 악한 세대로부터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였다. ‘현재의’(개역개정: ‘이’)로 번역한 단어는 생생한 존
재감을 암시한다. 다소 강하게 ‘위압적인’이라고 의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악으로 규정되는 현 세대의 위압적 지배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3:13; 4:5; 4:9; 5:1, 13; 6:14; 롬 6:6-7, 17-19; 8:1). 물론 이는 신자들 편에서도 자신들의 악한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표현된다(5:24).---p.53
유대교 전통에서 칭의란 본래 마지막 심판을 배경으로 한 사상이다. “의롭게 한다” 혹은 “의롭게 여긴다”는 것은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충실히 지킨 이들을 ‘의로운’ 자로 인정해주신다는 뜻이다. 복음서의종말 비유들에서 볼 수 있듯,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신실한 종들에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며 그 삶을 인정하고 받아주시는 것을 말한다(마 25:23, 34-36; 눅 12:42-44; 19:17, 19). 우리는 먼저 로마서에서 칭의개념을 배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에 익숙한데다, 조직신학적으로 칭의를 현재적 개념으로 규정하기에 미래적 칭의 개념을 낯설어 한다. 하지만 사실 바울 당시의 상황에서 어색한 것은 오히려 현재적 칭의 개념이다. 마지막 심판 때의 사건이 현재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모순된’ 개념이기 때문이다.---p.102
율법에 대한 죽음이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한 결단이었다는 이 진술은 믿음의 논리가 ‘행위’곧 올바른 삶의 필요성을 상대화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참조. 롬 6:11-14, 15-23). 우리를 의의 소망에로 인도할 방편이 되려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율법(의 행위들)에는 그럴 능력이 없고, 그래서 율법(의 행위들)은 칭의의 수단이 아니다(3:21).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삶을 얻기 위해서는 오히려 율법과의 관계를 단절해야만 했다(19절). 반대로 칭의를 가능케 하는 이런 새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20절은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진술한다.---p.123
바울은 그들이 회심과 더불어 받았던 성령을 상기시키며, 그 성령이 어떻게 주어졌던 것인지 묻는다. “여러분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서입니까, 아니면 듣고 믿어서입니까?” 물론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뻔하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 듣기 이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듣고 믿었으며, 이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바울은 칭의에 관련된 혼란을 해결하면서, 무엇보다 바로 이 결정적 사실을 지적한다. 바울이 이를 상기시키는 의도는 분명하다. 다름 아닌 성령이 칭의 문제에 관한 논란을 해결하는 가장 결정적인 관건이라는 것이다.… 134
아브라함 전통 속에서 우리가 읽게 되는 여러 사건들은, 율법의 행위들에 의존하여 육체의 한계에 머무는 자들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성령으로 태어난 자들이 바로 이 의의 소망이라는 유업의 상속자들임을 증언한다. 다름 아닌 율법 자체가, ‘율법의 행위들’이 아닌 ‘믿음-성령’이 약속된 의의 소망에 이르는 길임을 천명하는 것이다(4:21). 바로 이어지는 5:1-6에서 바울은 바로 이 결론을 더욱 분명한 언어로 요약함과 동시에, 이 길을 벗어나는 성도들에게 대한 엄중한 경고를 내린다.---p.196
율법에 대한 바울의 긍정적 묘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율법언약에 대한 바울의 비판이 율법 행함에 대한 비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우리가 계속 강조해온 것처럼, 바울의 율법 비판은 오히려 율법의 도덕적 무기력함을 겨냥한다(3:2, 5, 21; 5:16-18). 율법언약 아래서는 참된 사랑의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에서 해방되어 믿음과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것이 사랑을 이루는 방법이라는 것은, 바울의 복음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 중 하나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 죽어야만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 수 있었다(2:19). 율법이 사랑의 계명 속에 성취되어 있다는 것은 율법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사랑으로 집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사랑은 율법 아래 종속된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 속에 드러난 이 사랑은 오히려 율법에서 해방되어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게 됨으로써 나타난다.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에서 해방됨으로써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게 된다는 것이다(참조. 롬 8:1-4).… 217
논증을 마무리하면서 바울은 다시금 믿음과 은혜의 논리가 ‘행위 없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선언한다.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 곧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간 삶 그대로 심판하신다는 신념은 구약과 신약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드러나는 사상으로, 하나님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신념 중 하나다.6) 따라서 이 원리를 무시하는 것은 그 원칙을 세우신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착각한다고 해서 그 원칙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미래가 위험해질 뿐이다. 여기서 바울이 농사의 그림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심는 것과 거두는 것 사이의 필연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우리말 속담처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필연성이며, 그 어떤 논리로도 상대화할 수 없다. 이 신념을 상대화하는 것을 소위 ‘믿음’으로 간주하는 분위기는, 교회의 영적 긴장을 깨뜨리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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