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해주는 ‘집밥’의 시대는 갔다!
현대의 한국인, 조리를 책으로 배워야 하는 당신을 위한 조리 도구 가이드!
좁은 공간과 넉넉지 않은 예산 안에서 도전하는 요리에 도움을 주는 도구를 고르는 요령을 담는 데 주력했다. 다시 말해, 계속 늘어가고 있는 1~2인 가구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리라 믿지만 특히 사회. 경제적으로 이제 막 자신의 부엌을 꾸려나가는 상황에 처한 20~30대에게 이 책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 P.7
일회용품에 대한 이 책의 입장을 밝힌다. 현대인으로서 환경에 대한 우려를 안 할 수 없으니 일회용품에 대해 늘 경각심을 품고 살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조리 생활에서 일회용품의 지분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양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또 쓰지 않더라도 잘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런 생각으로 일단 가장 많이 쓰는 것 위주로 소개했다. 첨언하자면, 모든 비일회용품이 부엌에서 우위를 점하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섬유 행주로, 이는 싱크대 및 수세미와 더불어 부엌에서 가장 더러운 물건의 불명예를 놓고 각축전을 벌인다. 따라서 일회용품이라 부담스럽더라도 위생을 위해 종이 행주를 쓰는 게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바람직하다.
--- P.7
어쨌든 손부터 준비시켜야 한다. ‘눈썰미’와 더불어 재능을 가졌다는 표현으로 ‘손재주’라는 말을 쓰지만, 이 책에서 다룰 도구의 담론은 그런 수준의 숙련도를 전제로 깔지는 않는다. 이 모든 도구의 존재 의미가 수렴하는 하나의 점이 있다면 바로 ‘두려움을 극복하자.’다. 일단 손을 적극적으로 쓰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조리를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도구를 손의 확장 수단으로, 달리 말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손의 쓰임새 혹은 맥락에 따라 도구를 짝지어줌으로써 조리의 효율이 오르고, 기술 아닌 마음의 두려움을 극복해 요리의 수준으로 승화될 수 있다.
--- P.17
모든 음식의 조리 시간을 정하고 또 측정하는 데 쓸 수 있지만, 한국 식문화의 울타리 안에서 타이머에게 최선의 쓰임새를 찾는다면 역시 라면이다. 즉석 용기면도 그렇지만 봉지 라면 또한 제조업체에서 엄격하고도 체계적인 실험을 무수히 거쳐 찾은 최적의 조리법을 봉지 뒷면에 담는다. 따라서 조금 뒤에 살펴볼 물의 양도 잘 맞춰야 하지만 시간을 정확히 재는 게 사실은 더 중요하다. 대부분의 조리 타이머는 분 단위를 기준으로 만들어져 1~60분, 혹은 99분까지 측정이 기본으로 가능하다. 여기에 10초 단위로 좀 더 세심하게 맞출 수 있는 제품과 한 시간 이상의 단위로 큰 그림을 짤 수 있는 제품이 있는데, 하나만 고른다면 분 단위 제품을 권한다.
--- P.33
저울은 음식과 조리의 감정적인 측면에 큰 가치를 두는 이들에게 때로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도구다. 딱딱 떨어지게 식재료의 무게를 측정하는 행위가 음식에서 중요한 정이나 손맛을 떨어뜨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정서를 십분 이해하는 가운데, 아예 조리의 기초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정말 최소한의 가늠을 위해서라도 저울이 꼭 필요하다. 재료를 원하는 상태까지 조리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마저도 양에 대해 전혀 가늠을 잡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파스타 1인분 100그램이 얼마만큼인지 가늠할 수가 없어 처치 곤란할 정도로 많이 삶았다면? 울며 억지로 다 먹을 수도 있지만 저울로 불상사를 미리 막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다. 일단 저울로 기준을 잡는 연습을 해야 언젠가는 눈대중으로 재료를 가늠해 손맛(이라는 게 정녕 존재한다면)을 내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 P.35
말하자면 조리 도구 가운데서도 진지한 투자의 대상인 셈인데, 그렇다면 더더욱 이유와 용도 및 빈도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나는 왜 비싸고 강력한 블렌더를 사고 싶은가? 늘 단단한 얼음을 갈아 스무디나 셰이크, 혹은 마르가리타 같은 칵테일(슬러시류)을 즐겨 만들어 먹기 때문인가? 사시사철 그런가? 그렇다면 과연 하루에 몇 번이나 쓰는가? 평일에는 아침과 저녁 각각 한 번씩 두 번, 주말에는 세 번씩? 그럼 일주일에 열여섯 번, 1년이면 832번이 최대다. 만약이 정도로 쓴다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이 효율 좋고 자동차의 미학까지 깃든 멋진 블렌더를 사서 열심히 쓰면 그만이다.
--- P.147
일회용품을 쓰기 싫다면 ‘실팻(Silpat)’류의 반영구적인 대체품이 있다. 이름, 즉 고유 상품명이 말해주듯 실리콘 재질에 종이보다 좀 더 두꺼운 ‘매트’ 상태로, 보편적인 오븐과 제과 제빵 팬의 규격에 딱 맞춘 완제품의 형태로 출시되어 있다. 구매 전 치수를 확인한다. 한편 한국에서는 종이와 거의 두께가 흡사한 테플론지가 있다. 팬에 맞춰 가위로 잘라 까는데, 실팻만큼의 내구성은 없고 일정 기간 이상 되풀이해 쓰면 기름에 절어버리므로 주기적으로 교체해준다. 한편 실팻이나 테플론지도 내구성은 좋지만 오래 쓰면 냄새가 밴다는 점에서는 유산지보다 불리하다는 사실또한 염두에 두자.
--- P.207
꼭 필요한 도구들, 있으면 좋은 도구들, 불필요한 도구들
나의 라이프스타일에 꼭 맞는 도구들은 어떤 것들일까?
어떤 기준으로 도구들을 구비하고 사용해야 할까?
레스토랑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의 강도 및 빈도와 요리사의 숙련도를 생각해보면 장갑 대신 행주를 쓰는 그들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따라서 자신의 요리 숙련도를 감안해 장갑을 껴 안전에 더 초점을 맞출지 아니면 행주를 대안으로 삼아 효율을 좇을지 생각해보자. 물론 중간 지점에서 움직이는 타협안도 있다. 완전히 조리를 처음 시작하는 상황이라면 일단 장갑을 상황에 맞게 철저히 쓰는 습관을 기르고, 익숙해지면 서서히 행주를 쓰는 방향으로 간다.
--- P.22-23
유니태스커, 즉 단목적 도구는 대체로 예쁘게 생긴 나머지 ‘없으면 이 도구가 맡을 과업이 매우 불편해질 것이다.’라는 암시를 주며 충동구매를 부추기지만 99.99999퍼센트의 확률로 후회를 안길 것이다. 왜 100퍼센트가 아니냐고? 유일하게 의미 있는 단목적 도구로서 소화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 P.27
세상만사는 시간의 축 위에서 벌어지며 조리와 맛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재료의 상태 변화가 시간의 흐름에 맞게 정확히 벌어지고 있는지 또는 우리가 꼭 필요한 시간만 조리에 쓰고 있는지 확인해줄 도구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타이머의 존재 자체에 회의를 품을 수도 있다. 휴대용 무선 전화기에서 스마트폰으로 넘어온 지도 한참이니 시계라는 단일 목적의 도구가 유명무실해진 현실 아닌가. 그런데 시계도 아니고 스마트폰에 앱으로 딸려 나오는 타이머를 따로 산다고?
--- P.31
물이 섭씨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는다는 사실을 안다고 온도계를 등한시하면 안 된다. 그 사이 100, 혹은 최소 소수점 이하 한 자리까지 헤아리자면 1000단계의 지점 모두가 조리의 완성도와 직결되어 있는데, 온도계가 없다면 측정을 아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저온 조리(수비드)의 대중화로 심지어 소수점 이하 한 자리까지도 따져가며 조리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온도 측정의 대상이니 온도계도 그만큼 다양하다.
--- P.39
레스토랑 조리의 세계에서는 ‘잘 드는 칼이 안전한 칼’이라는 말이 있다. 두 갈래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일단 잘 드는 칼일수록 재료를 쉽게 썰 수 있다. 따라서 무리하게 힘을 주다가 칼이 미끄러진다거나 놓치는 사고를 더 잘 막을 수 있다. 한편 베이더라도 상처가 깔끔하게 나서 좀 더 빨리 낫는다.
--- P.54-55
(식)칼의 세계는 제조 공정과 소재의 조합만으로 무한에 가까운 확장이 가능하다. 따라서 들여다보면 끝이 없고 예외도 많은데, 일반론만을 최대한 압축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류는 대대로 단조 공정을 통해 (식)칼의 세계를 벼려왔다. 대장간과 대장장이의 일이라면 조건 반사적으로 떠올릴, 달군 강철을 망치로 내려쳐 모양을 잡는 방식 말이다. 탄소 함유량이 높은 강철, 즉 (고)탄소강을 단조 공정으로 가공한 칼은 고급 제품군에 속한다. 칼에 인생을 바치는 장인의 산물부터 식칼의 대명사처럼 통하는 독일출신의 대량 생산 제품까지, 다양한 제품군이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대에서 층층이 포진하고 있다. 비싼 가격만큼이나 절대적인 능력치도 좋아 썰고 베고 깎고 다지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각자의 손과 호흡을 맞춰보면 그림이 달리 보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무거운 데다가 우리의 신체 조건에 꼭 맞춰 만들었다고 볼 수 없는 제품이 많은지라 다루기 불편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고탄소강 식칼은 유지 및 관리도 만만치 않다. 물기에 민감해 녹이 슬기 쉬운 편이라 쓰고 바로 닦아 물기를 완전히 말려서 보관해야 한다. 이모저모 살펴보면 많이 쓰고 유지 관리도 열심히 하는 음식점 주방이 가정의 부엌보다는 자기 자리다.
--- P.56-57
식칼이 주연으로서 모든 썰기를 맡는다면 과도는 그 외 모든 재료 손질에 쓸 수 있는 조연이다. 우리는 ‘과도’라 부르지만 긁어내고 껍질을 벗기고 뿌리를 잘라내는 등 약간의 불편함만 감수할 수 있다면 전용 도구가 존재하는 거의 모든 과업을 떠맡을 수 있다. 따라서 최소한의 도구만으로 부엌살림을 꾸릴 때의 필수품이다.
--- P.61
칼질을 많이 할 일이 없는 가정 요리사라면 채칼이 훨씬 효율적이다. 게다가 채칼로 썬 식재료 표면의 질감도 사뭇 다르다. 일반적인 칼질과 달리 채칼은 훨씬 얇은 칼날에 좀 더 빨리 재료를 통과시키기 때문에 세포벽이 더 적극적으로 파괴된다. 그래서 질감이 달라지고 수분과 더불어 재료의 향도 더 빨리 배어 나온다. 같은 두께로 썰더라도 채칼을 쓴 오이 조각이 훨씬 더 흐물거린다.
--- P.65
칼은 유지 관리도 중요한데, ‘닦고 바로 말리기’의 기본 원칙만 지켜주면 된다. 세제를 묻힌 부드러운 스펀지로 문질러 닦고 따뜻한 물로 헹군 다음, 즉시 행주로 물기를 완전히 닦아낸다. 이때 다치지 않도록 칼등은 날을 닦는 손 바깥쪽을 향해야 한다. 거친 알갱이의 전용 세제가 칼날을 손상시킬 수 있으므로 식기세척기는 피한다. 또한 너무 자주 날을 갈아줄 필요도 없다. 평소에는 미세하게 한 방향으로 틀어진 날 끝의 각을 잡아주고, 1~3개월에 한 번 정도 전문가의 손에 맡긴다. 직접 가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다면 숫돌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지만 품이 많이 든다. 물을 축여 가는 ‘물숫돌’이라면 거친 입자에서 고운 입자로 갈아타며 적어도 2단계, 정석이라면 3단계에서 6~8단계를 거쳐 갈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 P.77
게다가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가위가 정확하게 조리용도 아니다. 조리용 가위는 재료를 효율적으로 끼워 자를 수 있도록 ‘자르는 날’과 ‘받쳐주는 날’로 구성된다. 명칭 그대로 재료를 자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맡는 ‘자르는 날’은 식칼의 날과 흡사한데, 날의 각도가 좁을수록 날카로우면서도 식재료가 쉽게 잘린다. 한편 받쳐주는 날은 자르는 날이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식재료를 받치는 한편 잡아주도록 날에 깔쭉깔쭉한 톱니(serration)가 나 있어야 한다. 현재 우리가 쓰는 조리용 가위가 이 조건에 맞게 서로 다른 두 날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여태껏 의식하지 않고 써왔다면 한번쯤 부엌으로 가 확인해볼 때다. 이렇게 두 날이 구분되어 있고 세척을 위해 분리가 가능한 제품이 조리용 가위다.
--- P.81
그런데 단 한 점의 도마로도 모든 조리 준비를 할 수 있는 걸까?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이는 재료를 손질하는 순서 혹은 요령과 맞물려 있다. 흔히 교차 감염을 우려해 식물성·동물성 재료를 별도의 도마에서 손질한다. 하지만 공간 등이 넉넉하지 않다면 단 한 점의 도마로도 모든 작업을 할 수 있다. 일단 도마 한쪽 면에서 채소 등 식물성 재료를 모두 손질한 다음 뒤집어 육류 등 동물성 재료를 다룬다. 실제로 요리사의 요령이기도 하며, ‘미장플라스(mise en place)’, 즉 요리 전체 밑준비의 가장 효율적인 순서이기도 하다. 도마와 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든 준비 과정이 사실은 요리의 순서와도 맞물려 있으니, 이후의 본격적인 조리 또한 염두에 두고 재료 손질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말이다.
--- P.91
마지막으로 도마를 쓸 때에는 바닥에 물기를 적셔 짜 펼친 종이 행주 등을 깔아준다. 그래야 도마가 칼질에 휩쓸려 움직이지 않는다. 이 과정이 나에게는 언제나 본격적인 조리의 출발점이었다.
--- P.92
따라서 요리에 쓰는 숟가락은 흔한 밥숟가락과는 조금 달라야 한다. 대가리는 끝이 뾰족하고(계란을 생각하면 편하다.) 또 오목하게 파인 가운데 균형을 잡기 쉽도록 손잡이는 짧은 게 좋다. 면면을 늘어놓고 나니 특별한 것 같지만 그저 서양식 숟가락일 뿐이다.
--- P.97
생선 가시 발라내기처럼 섬세한 젓가락질을 요구하는 식사의 과업은 애초에 손질이나 조리 단계에서 식사로 책임을 떠넘겨 벌어진 부작용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굳이 젓가락이나 쓰는 이가 애를 쓸 필요가 없다. 게다가 젓가락의 과업 대부분을 포크의 활약으로 해결할 수 있다. 무엇보다 포크는 젓가락에게 능력 밖의 일인 찢기와 뜯기에 능하다. 떨어지는 섬세함을 뒤집어 장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 P.101
나는 고민 끝에 스패출러의 번역을 포기하고 그저 외국어 ‘스패출러’로 표기했다. 번역의 세계에서는 이렇지만 실생활에서는 스패출러의 적극적인 활용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부엌에서 가장 쓰임새가 많은 도구이기 때문이다. 일단 모든 섞기에 유용하다. 가루부터 샐러드드레싱, 발효 반죽까지 그릇에 담기는 웬만한 것을 섞는 데 스패출러만 한 것이 없다.
--- P.117
일단 용도와 빈도, 그리고 부엌의 현실(면적) 등을 모두 감안해 가장 부피가 작으면서도 두루 쓸 수 있는 손 블렌더를 하나 갖춘다. 그리고 나머지 둘, 즉 블렌더와 푸드 프로세서 가운데 하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용도를 재분류해 검토한다. 얼음을 부수는 수준의 강력함을 일상적으로 쓴다면 일반 블렌더, 썰기나 채썰기 등 일반적인 조리의 영역에서 소위 밑준비의 인력을 절감하고 효율을 좇는다면 푸드 프로세서를 선택한다.
--- P.150
두툼한 고기를 얇게 펴야 할 때가 있다. 돈가스 혹은 커틀릿의 세계가 대표적이다. 고기를 두들겨 얇게 펴줌으로써 어느 정도 고기가 연해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의 두께를 고르게 맞춤으로써 같은 비율로 익고 조리 시간도 줄여준다. 닭 가슴살이라면 그대로 구웠을 때 두께의 차이로 인해 뾰족한 끝부분이 말라버리는 불상사를 막을 수도 있다. 닭 가슴살은 지방이 거의 없다시피 해 과조리가 팔자인 식재료니 먹는 것 자체가 불상사일 수 있지만, 고기 망치로 얇게 펴 짧게 익히면 통으로 굽거나 삶은 것보다 덜 끔찍하게 먹을 수 있다.
--- P.163
미국의 유명 셰프 토머스 켈러는 “의심이 간다면 체로 한 번 더 걸러라.”고 말했다. 미슐랭 별을 단 프렌치 레스토랑의 완성도가 목표가 아닌 이상 그만큼의 신경은 쓸 필요가 없겠지만, 좋은 체를 적재적소에 쓴다면 음식의 맛을 결정적으로 망칠 수 있는 쓸데없는 수분이나 건더기는 확실히 잡을 수 있다. 국수를 삶거나 나물을 데치는 등 재료와 수분을 분리해야 하는 상황은 일상 조리에서도 잦으니 차지하는 공간을 감수하더라도 체는 여러 개 갖춰둘 만한 조리 도구다.
--- P.169
한국의 식문화에서 공기류는 밥이나 국 등 완성된 음식을 담아내는 데에 주로 쓰이지만, 사실 조리 과정에서도 제 몫을 톡톡히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조리의 접근 및 절차와 관련이 있다. 우리는 조리에 어떻게 접근하는가? 끓이든 굽든 볶든 일단 냄비나 팬을 불에 올려놓고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하는가? 그렇다면 비효율의 정도를 큰 보폭으로 허둥지둥 급하게 걷는 셈이다. 열을 쓰고 간을 하는 조리의 본격적인 과정에 더 잘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식재료는 식물에서 동물 순으로 미리 손질해 준비해두어야 한다. 껍질을 벗기고 씻고 물기를 걷어내고 조리에 적합한 크기와 모양으로 썬다. 그리고 종류별로 담아둘 때 공기가 제 몫을 한다.
--- P.187
공짜거나 저렴한 물건을 마다하고 투자한 지퍼 백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다음의 요령을 참고하자. 첫째, 용도에 맞는 크기와 용량의 지퍼 백을 고른다. 1인분의 사골 국물을 냉동 보관 한다면 1리터짜리 지퍼 백을 살 필요가 없다. 미리 자주 쓰는 용도와 용량을 찬찬히 살펴보고 그에 맞는 지퍼백을 둘, 많으면 세 종류 정도 사서 쓴다. 둘째, 냉동이든 냉장이든 식재료를 보관할 때는 반드시 내용물과 개시 일자 등을 지퍼 백에 기록한 뒤 내용물을 채운다. 돈이 아깝지 않은 제품이라면 이러한 정보의 기록을 위한 자리를 확실히 만들어두었으므로 적극 활용한다. 다소 귀찮지만 특히 냉동 보관의 경우 오래되면 내용물도, 보관 개시 일자도 기억 못해 공간과 전기만 허비한 뒤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수 있다. 따라서 잠깐 품을 들여 몇 달 뒤의 안심이라는 결실을 맺어주는 기록을 생활화하자. 냉동 및 해동 과정에서 온도 차로 인해 표면에 맺히는 공기 중의 수분에 지워지지 않도록 유성 펜을 권한다.
--- P.197-198
알루미늄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냄비의 세계는 스테인리스를 차출한다. 알루미늄을 가운데, 즉 ‘코어’에 두고 안팎을 스테인리스스틸로 한 겹씩 감싸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부각시켰다. 따라서 이 지점, 즉 알루미늄을 감싼 스테인리스가 새로운 냄비의 출발점인데 다만 유사품을 경계해야 한다. 요즘도 인터넷 오픈 마켓을 뒤지면 심심치 않게 나오는 ‘통삼중 바닥’ 말이다. 정말 센티미터 단위로 헤아려야 할 정도로 두툼한 바닥을 자랑하는 냄비가 눈에 심심치 않게 들어오지만 결코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열효율도 차이가 나지만 사실 바닥만 통인 냄비 또한 가벼워서 엎어질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닥뿐만이 아니라 전체가 통으로 삼중 처리가 되었는지 반드시 확인하자.
--- P.197-198
팬은 뭐고 스킬렛은 또 무엇인가? 여태껏 팬, 즉 프라이팬의 세계만 존재한다고 믿고 살았다면 헷갈릴 수 있다. 사실 둘 다 가지고 있더라도 헷갈린다. 우리가 팬이라 믿는 조리 도구는 사실 스킬렛이기 때문이다. 둥글넓적하고 우묵하지만 냄비보다는 얕으며 벽이 경사졌으면 스킬렛, 흡사하지만 벽이 직각이라면 소테 팬이다.(둘 다 기본적으로 편수다.) 이렇게 분류하다 보니 지금껏 상식 차원에서 알고 있었던 지식 체계가 흔들리는 느낌이지만 교통정리를 하자면 또 간단하기 그지없다. 팬이든 스킬렛이든, 지금까지 쓰던 조리 도구를 앞으로도 똑같이 계속 쓰면 된다. 스킬렛은 벽이 경사졌으므로 재료를 뒤적이며 볶는다거나, 다 익힌 계란 프라이를 접시에 미끄러트려 담는 데 편하다. 따라서 언제나 기본이었으며 앞으로도 기본으로 갖출 조리 도구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며 먹고 살면 된다.
--- P.223
오븐에도 넣어 쓸 수도 있으므로 사실 웬만한 가정의 조리는 논스틱 팬이 전부 감당할 수 있다. 밥도 볶고 생선도 굽고 한국식으로 얇게 저민 고기도 잽싸게 익혀 먹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너무 여러 조리를 맡기면 안 된다. 되풀이해 쓸수록 효율이 떨어지고 소모도 빨라져 결국 가정 경제에 부담을 안긴다. 따라서 식재료의 속성과 조리의 목표를 분석해 과업의 부담을 줄여주는 게 바람직한데, 그게 바로 스테인리스 스틸(이하 스테인리스) 스킬렛의 자리다.
--- P.226
또한 스테인리스 팬은 식재료가 들러붙는 현상 자체가 사실 핵심 정체성이다. 스테이크의 예를 들었듯 섭씨 200도 이상의 온도에서 표면과 식재료가 접촉을 해야 마이야르 반응이 일어나고 식재료의 소위 ‘본연’에 가까운 맛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데, 논스틱 스킬렛은 접촉의 원천 봉쇄가 목적이므로 맛이 진하게 드는 것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따라서 쓰는 논스틱 팬이 마이야르 반응을 끌어내기 시작했다면 제 역할을 못한다는 징후이니 교체를 고려하자.)
--- P.228
한두 술 더 떠 아예 오븐 토스터를 고려할 수도 있다. 너무나 예상 가능하게도 오븐과 토스터를 합쳐놓은 도구인데, 요즘은 토스터보다 오븐 쪽에 방점을 찍어 2킬로그램 안팎의 닭 한 마리쯤은 통구이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만든다. 1인 가구라면 통닭구이뿐만 아니라 제과 제빵 등 웬만한 오븐 조리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용량이므로, 오븐을 향한 욕망을 잠재우면서 토스터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 P.269
맞다. 에어 프라이어의 정체는 소형 컨벡션 오븐이다. 따라서 오븐을 가지고 있다면 굳이 살 필요는 없는데, 아무것도 갖추지 않았다면 오븐보다는 공간을 훨씬 적게 차지하고 냉동식품 조리에 탁월한 에어 프라이어를 선택하는 게 한국의 현실에서는 현명할 수 있다. 심지어 간단한 수준의 제과 제빵도 가능하니까.
--- P.273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식기세척기도 가만히 듣고 있지만은 않는다. 2~3인용의 식기세척기가 등장했음은 물론(대형과 달리 세척에 필요한 물을 채워주는 방식이라 설치가 필요 없다.), 한국의 음식과 그릇에 특화된 세척기도 개발되었다. 따라서 이제 마음을 먹는 일만 남았는데 세척, 그러니까 설거지 그 자체보다 식기세척기의 장점은 살균과 소독에 더 방점이 찍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아기를 위한 젖병이나 수유 도구, 잼이나 반찬 등을 담을 병(메이슨 자(Mason Jar)) 등을 냄비에 따로 물을 끓여 소독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또한 보통 낮고 얕아서 설거지에 고통을 한 켜 더 불어넣는 싱크대와 싱크 볼로부터도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 적극적으로 권한다.
--- P.285
조리 도구들의 기능과 예쁨을 간결하고 정확하게 묘사한 일러스트
각 조리 도구들의 핵심을 짚어주는 키 센텐스
영영 사라진 도구들이 있다. 2009년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짐을 배편으로 부쳤는데, 그때까지 모았던 제과 제빵 위주의 조리 도구를 담은 상자가 사라졌다. 약간의 배상도 받고 조금씩 다시 사서 모으기는 했지만 상실감이 매우 컸다. 그들은 정말 아무것도 할 게 없어서 독학으로 요리를 익혔던 시절, 거듭된 시행착오의 동반자로 내 삶에서 큰 의미를 차지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음식 평론가로 전업도 안 했을 것이며 이런 책도 쓰지 않았을 테니, 이 기회를 빌려 한 번은 이름을 불러주는 게 예의라 믿는다.
--- P.8-9
롯지를 포함해 열 점 가까이 무쇠 스킬렛을 가지고 있지만 자주 쓰는 건 둘이다. 2013년 가을에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칼 수선점에서 충동구매한 그리스월드의 스킬렛으로 지름 20센티미터 안팎 크기 두 점에 80달러였다. 롯지를 필두로 무쇠 스킬렛이 재조명되면서 야드 세일 등에서 찾은 묵은 것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내가 쓰는 그리스월드처럼 미국이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철강 강국이었던 시기(1950년대까지)에 만든 스킬렛은 비교적 흔한 편이고, 100년이 넘은 것들도 어떻게든 발견되어 현역으로 속속 복귀했다. 무쇠는 유지 관리를 잘못하면 바로 녹이 슨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복원 또한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다시 현역으로 제 몫을 할 수 있다. 일단 사포 등으로 녹을 말끔히 벗겨낸 뒤 기름을 둘러 굽는 길들이기 과정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면 세월의 흔적 같은 건 전혀 내비치지 않은 채 다음 100년 동안 쓸 수 있다. 내가 산 두 점도 전문가가 복원한 것들로 요즘 생산되는 것들에 비해 가볍고 표면이 유난히 매끄러워 쓰기가 덜 번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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