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 관해 큰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우리는 전혀 안달할 필요가 없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가능성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 분명히 밝혀야 할 부분에 관한 한 하나님은 이미 분명히 밝혀 놓으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날마다 내리는 선택-말다툼 후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 퉁명스런 직장 동료를 존중하며 대하는 것, 무료 급식 시설에서 봉사하는 것, 기분 내키지 않을 때도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내용에 반응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1.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는 집착은 다분히 현대의 산물이요 서구의 특징적 현상이다. 제3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런 집착이 있을지 의문이 든다. 우리의 혼돈은 어느 정도 포스트모던 세상의 삶의 결과다. 현대 문화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지에 영향을 미친다. 대형 쇼핑몰에서 물건을 살 때처럼 우리에게 너무 많은 선택을 제시하여 그 수 자체에 압도당할 지경이다. 우리는 인생 전체를 염두에 둔 선택이 어려울 정도로 늘 이리저리 바쁘게 뛰고 있다.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현명한 조언을 들려줄 수 있을 만큼 나를 잘 아는 이들이 별로 없는 고립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런 특징, 곧 선택과 바쁨과 고립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에 더 혼란을 가중하는 듯하다.
---「3. 장애물」중에서
십계명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은 왜곡되어 있어서, 무언가를 금지하고 제한하는 내용이면서(어느 정도는 그렇다), 구시대의 현실성 없는 내용이라고 본다(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도 예전에는 십계명을 그런 의혹의 눈길로 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나의 타락한 본성에 제약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그런 제약이 얼마나 큰 자유를 줄 수 있는지도 알기 때문이다. 십계명은 단순한 금령에 불과하지 않아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생산적인 인생을 살 수 있는지 확인해 주기도 한다. 십계명은 우리가 선하고 고귀하며 진실한 삶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활 방식으로 바꾸도록 초대한다. 간단히 말해, 십계명은 우리에게 자유, 곧 순종의 자유를 준다. 십계명은 은혜의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십계명은 은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은혜는 율법보다 앞서고, 약속이 요구보다 먼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시기 전에 우리를 위해 행동하신다. 십계명은 은혜가 암시하고 요구하는 삶의 방식을 묘사할 뿐이다.
---「5.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중에서
지금 내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람은 삶의 과정을 즐기며 꾸준히 제 길을 가는 이들이다. 그렇게 시종여일한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지금도 돌아간다.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공들여 설교하는 목사들, 최선을 다한 후 제시간에 숙제를 제출하는 학생들, 직원들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경영자들, 나는 그들을 존중한다. 기록 못지않게 선수들을 중시하는 코치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경비원들, 회의에 정시 출석하는 동료 교수들, 나는 그들을 존경한다. 모든 것은 작은 일들에 충실한 우리의 태도로 귀결된다.
---「6. 작은 일에 충실한 삶」중에서
미래에 관해 기도할 뿐 아니라 우리는 미래를 준비할 수도 있다. 미래를 준비하는 한 가지 주된 방법은 현재를 잘 사는 것이다. 신앙 훈련에 힘쓰고, 성품을 개발하며, 지속적인 우정을 가꾸고,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연산능력과 대화술 같은 기술을 더욱 다듬고 자신의 자원을 책임 있게 관리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미래가 요구하는 모든 일을 더 잘 준비할 수 있다.
---「10. 미래를 준비함」중에서
우리는 어떻게 소명을 발견할 것인가? 아니, 비크너의 말처럼 소명이 어떻게 우리를 발견할 것인가? 우리는 여정에 오름으로 소명을 발견한다. 소명에 이르는 여정은 소명 자체의 필수 부분이다. 많은 경우 어렸을 때는 자신의 소명을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소명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소명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언 땅 속에 잠자고 있는 씨앗처럼 말이다. 봄이 오면 씨앗은 땅을 헤집고 나온다. 우리는 깊은 소명의식에 이끌려 발견의 여정에 올라야 한다. 그 길을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이르러야 한다. 꼭 따라가야 하지만 쉬운 길은 아니다.
---「12. 직업과 소명의 구분」중에서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는 것은, 그분이 영원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하시는 방식을 우리가 주어진 순간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작부터 끝을 보시며 모든 측면을 지배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 속에 들어가 그 내용이 서서히 전개되는 대로 경험하기 때문에 시야가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큰 그림의 작은 부분밖에 볼 수 없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은 확실히 믿을 수 있지만, 그 방법을 언제나 아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분이 끝내 영광의 목적을 이루실 것을 믿으며 그분의 주권에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15. 역설과 더불어 사는 삶」중에서
내가 믿기에 하나님은 일부러 자신을 조금씩 감추신다. 그분은 압도하거나 강요하기보다 감화로 이끄시는 쪽을 택하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과 반응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신다. 당신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우리 스스로 선택하게 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각자 독특한 존재로 만드셨다. 느끼는 마음과 생각하는 머리와 결정하는 의지를 주셨다. 하나님은 마치 별개의 독립적 존재를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거대한 블랙홀처럼 우리를 자신 속으로 흡입하지 않으신다. 요컨대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만큼은 그분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을 만큼 많이 알지는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과의 관계로 부르시지만 결코 협박하지 않는다.
---「17. 고난의 유익」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