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핵심은 내러티브에 있다. 제국의 신들이 합법화한 착취, 상품화, 폭력 이데올로기의 내러티브에 가담할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 전승 가운데 계신 분, 곧 해방과 언약의 하나님이 옳다 하시는 현실을 이웃을 위해 성실히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에 참여할 것인가? 제국의 신들에게 전지전능과 무소부재의 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다. 물론 야웨께서도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아니 계신 곳이 없다. 그러나 저 신들의 흔하디 흔한 속성 따위가 어찌 야웨의 진면목을 드러내겠는가. 야웨께서는 제국의 우상들과 다르시다. 야웨께서는 신실하시며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기에 찬양과 칭송을 받기 합당하신 분이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 및 모든 창조물과 맺은 언약을 성실히 지키심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신다. 야웨의 신실함이 이스라엘의 텍스트에 담긴 복음을 밝히 드러내고 착취와 상품화 이데올로기를 갈파한다.
---「서론」중에서
신실은 공동선과 통해 있다. 공동선은 하나님, 나, 이웃이 하나로 이어진 전망을 드러낸다. 공동선은 ‘샬롬’(평화)의 기치 아래서 생동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샬롬을 이루고, 그분을 성실하게 신뢰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 길 외에는 이스라엘이 행복을 만끽하거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이 공동선에서 야웨가 감당하신 몫은 이스라엘에게 안전과 식량을 제공하시고 이스라엘이 스스로 만들 수 없는 삶의 기초 자양분을 제공해 주시는 것이었다. 공동선은 양측 모두를 놀라게 하며 이렇게 촉구한다. 이웃 관계에 투자하라. 유독 연약하고 보호받지 못하며 궁핍에 처한 이웃을 돌아보라! 샬롬의 기치 아래 있는 공동선은 누구도 함부로 배제되거나 업신여김을 받지 않아야 하며, 그 누구도 낙오될 수 없음을 말해 준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들도 마찬가지다. 공동선이란 야웨께서 숭고한 자기 존재로 자유로이 귀환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돌보아 달라는 비속한 요구에 불려 나오신 분임을 뜻한다. 아울러 공동선은 이 신실이라는 내러티브에 몸담고 있는 어떤 지체도 자신의 안녕에만 탐닉할 수 없음을 말해 준다. 모든 지체는 공동체라는 현실로 재차 소환된다.
---「1. 하나님의 본성과 일하심」중에서
이스라엘의 상상력이 담아낸 정의에 관해 이렇게 질문해 보자. 모든 것을 전체로 흡수해 버리는 불의의 내러티브가 제어될 수 있을까? 달리 말해, 이 불의한 체제 밖에서도 정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요충지가 있을까? 이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된 핵심적인 질문이자 공공의 삶을 살리는 핵심적인 질문이며,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시급한 질문이다. 처음부터 복음은 전체주의 체제가 중단되었고 또 그렇게 되리라는 소식을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결단과 인간의 행함이 연대하여 기존 체제를 중단시킨 사건을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체제를 중단시키는 것은 다채로운 갈래로 전개되지만, 출애굽 내러티브는 우리에게 체제를 중단시키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 무엇인지 일러 준다. 모름지기 불의한 체제 한가운데서 정의를 실천하려면 책략을 써야 한다. 출애굽 내러티브를 계승한 예언자들은 약탈적 경제 정책과 예루살렘 엘리트의 악행에 맞서서 실상 기예(技藝)에 가까운 대안을 끊임없이 창조한다.
---「2. 정의」중에서
한때 정의를 ‘변화시키는 관계’라고 메모해 두신 야웨께서 시간이 지나 다시 그 메모를 꺼내 읽으시는 것만 같다. 야웨의 정의는 흔하디흔한 보응의 법칙과 무관하다. 언약에 뿌리내린 정의는 그분의 넘치는 관대함에 힘입어 살고 유지된다. 이스라엘이 이것을 알게 된 것은, 이웃 사랑을 사회에서 지속시키는 일이 넘치는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자비를 모르는 인색함은 항상 선한 이웃 관계를 무력화시켰고, 우리도 늘 이런 맥락에서 출발했기에 이스라엘과 동일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스라엘은 진실로 깨달았다. 넘치는 은혜를 구현하려면 그토록 넓은 은혜를 베푸신 창조주 하나님, 그분의 기꺼운 마음에 뿌리내려야 한다. 이 정의는 뻔하고 완고한 제재 조치의 한계를 극복하고, 회복하는 정의로까지 나아간다. 그러므로 교환적 정의는 회복적 정의로 바뀐다. 진실로 말하건대, 회복적 정의는 하나님의 길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표현이다. 굳이 다른 표현을 찾는다면 ‘은혜’, 곧 ‘광야에서 발견하는 은혜’와 절망 및 무력이라는 터에서 발견한 은혜일 것이다. 이 일을 능히 이루신 하나님이 우리를 신실함으로 다시 초대하신다.
---「3. 은혜」중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계속해서 계명을 통해 말을 걸어오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더 많은 계명을 받을 것이므로 들음을 중단할 수 없다. 야웨의 토라는 한곳에 고정되거나 갇힐 수 없으며, 특정한 의미로 확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메대와 페르시아의 법과 달리, 야웨의 토라는 항상 미지의 터로 나아갈 수 있게 열려 있고 준비되어 있다. 이스라엘과 유대교 전통은 새로운 담화를 낳는 해석을 시도한다. 이 해석 행위야말로 토라의 역동성을 보증해 주고, 얼핏 보면 폐쇄적으로 언급된 십계명을 미지의 해석을 향해 활짝 열어 준다. 그러한 점에서 해석이란 십계명이 특정한 상황 속에서 무엇을 뜻하고 요구하는지를 치열하게 논쟁하는 행위를 말한다. 비평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구약의 토라가 어떤 책인지 알고 있다. 토라는 대전(大典)과도 같아서 다양한 환경에서 나온 여러 문서를 전용하고 통합했다. 그러나 토라가 선택한 전용과 통합은 상황을 감안한 해석 작업이었으며, 기존 문서의 요구를 확장하고 변경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따라서 토라의 본질은 규율을 늘어놓는 데 있지 않으며, 새로운 시대와 환경, 새로운 시대정신을 고려하는 지속적인 대화에 있다.
---「4. 율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