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3단계 개혁ㆍ개방〉
중국의 개혁ㆍ개방은 3단계의 변동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제1차 구조변동, 달리 말하자면 ‘탈사회주의’의 시기이다. 그 무렵부터 중국에서는 사회구조가 2원 구조에서 3원 구조로 이행하기 시작하는 것이 관찰되었다. 예를 들면, 1980년대 중반에 시작된 촌민자치운동은 중국의 중앙권력이 말단까지에 대한 지배를 단념한, 이른바 말단을 방임한 것을 의미하고, 중국ㆍ지방ㆍ말단의 3원 구조로의 이행이 시작되었다. 또한 소성진(小城鎭, small town)에 작은 기업이 일어나 거기에 농민을 흡수하는 이토불리향(離土不離鄕, 농민은 농업을 떠나도 농촌은 떠나지 않는다) 방식으로 생활했던 것은 도시도 농촌도 아닌 중간물(中間物)이며, 농민도 노동자도 아닌 사람들이었다. 한편, 도시화로 커지고 있는 것은 특히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민간기업이라기보다 영리화(營利化)한 국유 독점기업이며 국가와 사회 사이에 쌍방이 침투하는 국가와 사회의 공존 영역이 기세를 얻고 있다. 요컨대, 다양한 영역에서 3원적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p.33
〈덩샤오핑의 권력 변용〉
덩샤오핑의 권력은 10여 년간 변해왔다. 전환점은 1987년에 후야오방 총서기를 보수파의 압력으로 사임에 내몰면서부터이다. 1982년의 제12차 당대회에서 현대화의 리더십을 확립했을 때 덩샤오핑과 동년배 천윈 등과는 협력과 분업의 관계가 있었으며, 그들이 후야오방 총서기와 자오쯔양 총리의 제2세대를 밑받침하는 체제였다. 그렇지만 1986년 말 학생운동을 계기로 하여 지도자들 사이의 의견 차이가 결정적이 되었을 때, 덩샤오핑은 자신이 발탁한 후야오방을 버렸다. 의견 차이는 경제의 시장화를 추진할 것인가의 여부, 그리고 정치제도의 민주화를 추진할 것인가의 여부에서 발생했다. 그 이후 덩샤오핑을 둘러싼 체제는 협업 체제에서 덩샤오핑의 권위에 의해 지탱되는 집권체제로 변모했다. 1987년 9월에 덩샤오핑이 중앙위원의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된 바로 그 시점부터 덩샤오핑의 ‘권위주의 체제’가 가능해진 것은 역설적이다. 그것을 연출했던 것이 후야오방의 ‘사임’을 보고 덩샤오핑의 권위가 없으면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자오쯔양이었다는 것도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p.137
〈장쩌민-주룽지 체제〉
장쩌민-주룽지 시대는 덩샤오핑의 정치적 유언, 즉 “개혁ㆍ개방을 가속하라”는 1992년 1월 ‘남순강화’의 방침에 따라 당의 기본노선을 확정한 1992년 10월 제14차 당대회로부터 후진타오에게 권력을 넘기는 2002년 제16차 당대회까지의 10년이다. 이 10년간 장쩌민과 주룽지 모두 화려한 시책을 제기하거나 업적을 보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중국경제의 탈(脫)계획, 시장화 그리고 재집권화(再集權化)는 이 시기에 진행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1994년에 재정권(財政權)을 중앙에 다시 집중하는 등 수완을 보인 주룽지 총리의 공적은 크다. 이 시점에서 이 10년간에 대해 전면적인 검토를 하는 것은 아직 무리지만, 정책결정의 방법과 리더십의 특징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pp.165-166
〈대외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행위자〉
중국 외교에서도 현저한 변화가 1990년대 말부터 관찰된다. 외교활동, 외교정책의 결정에서 외교부의 영향력이 점차 감소하고 그 대신에 경제와 관련된 관청, 국유기업, 금융자본, 석유자본, 지방정부 등 ‘새로운 관여자’가 출현하고 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이용하는 네티즌도 ‘새로운 관여자’이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2010년 보고서는 신중한 논조로 중국의대외관계, 외교정책, 외교행동이 명백하게 변질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특히 외교부가 ‘쇠퇴’하는 양상이 현저하며 지도자의 리더십 부족이 중국의 외교활동에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 모습이다. 2010년에 센카쿠 열도(尖閣諸島)를 둘러싸고 중ㆍ일 간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의 상황은 이러한 SIPRI의 관찰이 들어맞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SIPRI 보고서는 71차례에 걸쳐 많은 관계자들에게 인터뷰를 해 얻은 결과물이다. ‘새로운 관여자’에 대해서 진찬룽(金燦榮, 중국인민대학)은 왕민(網民: 네티즌), 구민(股民: 주주), 군민(軍民: 군인) 등의 ‘삼민(三民)’에 주목하고 있다.--- p.310
〈변화하는 통치 스타일과 제5세대 리더십의 향배〉
한편 통치의 스타일, 정치의 스타일은 변하고 있다. 1980년 8월 덩샤오핑은 ‘국가 영도체제의 개혁’, 특히 권력의 계승을 규칙화하고자 했다. 1986년7월 완리 부총리는 ‘결정의 민주화와 과학화’를 정치개혁의 중요한 내용으로서 제시했다. 제13차 당대회(1987년 8월)에서는 자오쯔양 총서기가 당 그룹의 폐지 등 ‘당-정 관계’에 메스를 들고 총공회(總工會) 등 사회집단의 자립화에 손을 댔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제16차 당대회에서 장쩌민이 ‘정책결정 메커니즘’의 개혁을 주장했고, 제17차 당대회에서 후진타오 총서기가 투명성 확보와 공민(公民)의 정치참여도 제고를 제안했다. 제3장에서 논한 바와 같이 마오쩌둥(제1세대), 덩샤오핑(제2세대), 장쩌민(제3세대), 후진타오(제4세대)로 세대에 따라 리더십의 통치 스타일은 대중에 대해서 동원, 방임, 교육, 안무(安撫)로 각각 변하고 있다.--- p.352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의) 리더십은 그 ‘온화함’에 두드러진 특성이 있다. ‘강한 사람’이 아니라 ‘선한 사람’으로서 대중에게 접근해왔다. 이것은 후진타오-원자바오의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대가 변화한 탓일 것이다. 시장화가 추진됨에 따라 다양한 문제가 인민 차원에서 분출하고, 다수의 ‘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출현한 가운데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모두 대중을 ‘위로’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모든 정책은 관료기구로부터의 제안으로 책정되었고,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문자 그대로 협의체가 되었다. 이와 같이 리더십의 속성과 정치(혹은 통치) 스타일 모두 변해왔다. 그렇다면 2012년에 출범할 제5세대 리더십은 어떤 속성을 갖고 어떤 통치 스타일을 취할 것인가?
--- p.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