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국가에게는 분단 자체가 생존 제약의 조건이다. 분단을 극복해야 분단의 다른 주체에게 통합되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통일은 국력의 증진이기도 하지만 흡수통일 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존의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은 국력 증진과 같은 국제정치게임의 문제가 아니라 주권국가 형성과 관련된 주권게임의 문제이다. 주권게임은 경험적 주권을 극대화하고 다른 국가들과의 국제정치 관계에서 권력과 이익을 확대하는 국제정치게임을 통해 성과를 거둘 수 있지만, 주권게임과 국제정치게임은 개념적으로 구별해야 한다.
통일된 한국과 통일된 중국, 보통국가화된 일본이 서로의 승인과 축복 속에 탄생해야 주관적 불만족이 극복된 근대 이행의 완결이 이루어진다. 그때까지 주권게임은 지속될 것이다. 주권의 완성을 추구하는 과정은 구체적인 정책 사안에서 영토문제, 국민의 범위와 귀속문제, 국제사회의 승인 획득 문제, 국력 증진의 문제 등 주권게임과 국제정치게임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주권게임과 관련된 이익과 목적은 다른 국제정치게임의 이익과 목적들에 비해 단순히 중요성이 더한 정도가 아니다. 국제정치게임의 근간을 이루는 단위의 성격과 자격에 관한 것이므로 차원을 달리하는 목적인 것이다.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이익이 아니라 이익의 주체인 국가의 자격과 성격에 관한 구성적이고 형성적인 목적과 이익이라고 하겠다.
동북아 국가들의 주권게임은 한편으로는 서로의 주권을 인정하는 무정부상태를 만드는 것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주관적으로 생각해 온 주권의 기본요소들을 실현하는 상태를 이루려는 경쟁으로 나타난다. 영토분쟁이 격렬하게 전개될 수도 있고, 남·북한과 두 개의 중국은 자기중심의 통일을 위해 경쟁과 충돌을 야기할 수도 있다. 일본은 군사적 보통국가화를 추진해 보통국가로서의 위상을 회복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여타 국가들은 완전한 주권국가가 되어가는 타국이 제국으로 변하지 않도록 계속 견제와 균형을 취할 필요를 느낀다. 서로를 온전한 근대적 주권국가로 안정적으로 인정해 본 역사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유럽의 국가들은 근대주권국가체제를 성립하는 과정에서 전쟁을 치러 문제를 해결했다. 그 같은 과정 끝에 주권국가 성립 과정이 완결되고 무정부상태 조직원리가 정착된 것이 유럽이 밟아온 역사적 순서이다. 동북아 국가들 역시 군사력에 의존하는 혼란의 과정을 거칠 수도 있지만 피해야 할 길이다.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과 우익 세력이 추구하는 주권게임은 타국의 동의를 얻기 힘들 것이다. 이들은 과거 제국의 역사를 정상적인 역사로 복원해 메이지 유신 이래 강대국 일본의 정체성을 되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의 한국 식민지지배가 당시 실증주의 국제법하에서 합법적인 조치였다고 주장하는 것도 일본 주권게임의 한 부분이다. 우익 세력은 일본의 서구 지향 개인주의를 비판적으로 보고, 애국주의·민족주의·집단주의에 기반한 강대국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고 전쟁범죄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한국은 일본의 우익세력에게 정체성의 위협자일 수밖에 없다.
남과 북은 서로 한반도와 한민족 전체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는 분단의 주체들로, 비록 UN에 각각 주권국가로 가입되어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았지만 여전히 불완전 주권국가들이다. 남·북한 공히 자신을 한민족과 한반도를 대표하는 유일의 주권체로 정의하는 상황에서 주관적으로 상정한 주권국가의 요소들, 즉 영토, 국민, 효율적인 정부, 대외적 정당성 모두에서 이상적인 주권국가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의 통일을 이룩하기 전까지는 국제법적 주권국가로 승인받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존재론적 안보에 결손이 있으며 주권을 완성하기 위한 주권게임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남·북 관계가 일반적인 주권국가들 간의 관계와는 달리 주권게임을 수행하는 불완전 주권 상태의 분단국가로 존속하는 이상, 군사력을 매개로 한 경쟁, 안보딜레마, 평시의 정치적 경쟁 등 다양한 상황에 관한 새로운 분석 틀이 필요하다.
북핵 문제 해결 과정에서 대북 경제제재 해제 시기와 방법을 둘러싸고 한·일이 의견을 달리하는 것도 양국의 주권게임 속도를 둘러싼 갈등에 기인한다. 강제징용 사태 이후 불거진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문제 역시 단기적으로는 역사와 경제 문제로 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존의 한일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외교·안보 노선을 구상해 나가겠다는 일본 우익의 전략적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미국의 정책은 매우 중요하다. 미국이 어떠한 한반도 정책, 더 구체적으로는 어떠한 북핵정책과 대북정책을 추구하는가, 그리고 한·미·일 협력을 어떻게 유지하는가에 따라 한·일의 주권게임 균형이 변할 수 있다.
트럼프 정부 등장 이후 미국은 국제정치게임의 목적을 극대화하는 외교 전략을 추진하는 한편, 한국이 추구하고자 하는 주권게임이 미국에 큰 이익을 주지 않는 한 한국으로부터 대가를 요구하는 계산적 패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동맹 유지 비용을 한국이 최대한 분담하기를 원하고, 한반도 이외의 지역에서 미국의 안보 이익을 한국이 지원하기를 요구하며, 북핵·북한 문제에서도 양국의 이익이 미묘한 편차를 보일 때 자국의 이익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존에는 한국의 주권게임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미국의 장기적 이익도 함께 증진된다는 전제가 확고했지만, 패권조정기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주권게임은 각 사안별로 미국 국제정치게임과 세부적으로 조율되어야 하는 국면에 진입했다.
미국은 단극체제라는 압도적인 미국 중심 세계에서 한국이 추구하는 주권게임이 미국 국제정치게임의 판도를 거의 바꾸지 않는다는 인식하에 한국을 지지했고, 대표적인 예로 한국 주도의 북방정책을 지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소련과 수교 직전인 1990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소정상회담을 통해 수교와 경협을 논의할 때, 미국이 이를 지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훗날 역사가 밝혀주겠지만, 한국의 주권게임이 북한에 위협이 될 만큼 우호적 환경 속에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북한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핵 위기 창출이라는 대안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한·일 간 주권게임에서 한국의 목적은 일본이 식민지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도록 하고 국가 차원의 책임에 대해 합의를 이루는 가운데 배상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이는 과거 회귀적 목적이기보다는 미래의 평화적 관계를 보장받으려는 목적이다. 보통국가로 전환된 일본을 진심으로 승인하고, 한·일 간에 주권국가로서 상호 존중하면서 협력해 나가려면 이러한 목적을 가진 주권게임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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