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알고나 있니? 엄마 나이도 이제 70이 넘었거든!” 요코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나오는 대로 싫은 소리를 쏟아냈다. 이런 일은 마흔 넘은 딸들이 대신 해줘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도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영어와 전자음이 흘러나오고 나서 “아버지 생일 파티를 할 거야. 자세한 이야기는 나나한테 들어”라는 메시지를 겨우 남겼다.
--- p.19
“왜 아버지를 혼자 다니시게 해? 같이 가면 되잖아.”
“혼자 다닐 수 있다면 지나치게 보살피려 하지 말라고 의사가 당부했대.”
“그렇긴 해도 이제 혼자서는 안 되는 시기가 온 거 아냐?”
“아니야, 혼자 전철도 타고 모르면 사람들한테 길도 곧잘 묻고 그러셔.”
셋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의 병명이 명확해진 것은 3년 전이다.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고 착각하는 일이 잦았던 어느 여름, 쇼헤이는 수 십 년간 2년에 한 번씩 같은 곳에서 열리는 고등학교 동창회 장소를 찾지 못했다. 제대로 옷을 차려입고, 버스를 타고, 전철로 갈아타고, 모임 장소가 있는 오차노미즈 역에서 내린 순간, 그곳에서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진 쇼헤이는 그대로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 p.24
“도대체 어디 가는데 그러나?”
히가시 쇼헤이가 곁에 있는 아내에게 물었다. 아침 일찍부터 부산하게 재촉당하며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타고 전철을 타고 나리타공항에 도착한 쇼헤이가 아내에게 “어디 가는데 그러나?”라고 열 번도 넘게 따져 물었지만, 아내 요코는 지치지도 않고 참을성 있게 계속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샌프란시스코에 가. 마리가 공항에 나올 거야.”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던 쇼헤이는 불만에 가득 찬 채 목소리를 높여 또 물었다.
“도대체 어디 가는데 그러나?”
“이제부터 수하물 검사, 출국 심사를 거쳐 탑승 게이트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쁘장한 젊은 여자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 공손한 느낌이 좋았는지 쇼헤이는 예의 바르게 “아, 그렇습니까?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요코와 후미는 눈을 크게 뜨고 마주 보았다.
“웬일이야, 아버지. 조금 전까지 집에 가겠다더니.” 후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모르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점잔을 빼는지 몰라. 저렇게 장단을 잘 맞추니 아버지 상태를 상대가 못 알아차리는 경우도 많아.”
--- pp.50-54
“도대체 어디 가는데 그러나?”
쇼헤이가 곁에 있는 아내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재촉당하며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사위가 운전하는 밴에 억지로 올라타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도착한 쇼헤이는 이날도 몇 번이나 “어디 가는데 그러나?” 하고 따져 물었다.
“집에 가.”
요코가 말했다.
“아니, 어디 간다면서 왜 집에 가?”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엄마를 대신해 딸 마리가 대화를 이어받았다.
“여기저기 갔잖아요. 샌타크루즈에도 갔고, 몬터레이 해안가 레스토랑에도 갔고, 굴도 매일 드셨어요. 또 카멜에 맛있는 브런치를 먹으러도 갔고, 수족관도 구경했잖아요.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엄마랑 아빠가 오셔서 정말 좋았어요.”
“그랬나.”쇼헤이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간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돌아가나. 어쩐지 허무한 여행이군.”
--- pp.82-84
홀로 조용히 정원을 바라보고 있던 쇼헤이는 뭔가를 찾으려는 듯 고개를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컴퓨터에 푹 빠진 형이 상대해주지 않아 심심해진 다카시가 할아버지한테 다가가 붙임성 있게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뭐 찾으세요?”
“응, 글쎄다. 그걸 뭐라고 하더라? 저기, 뭐냐? 저걸, 으음, 학교를 들고 와줄 수 있겠니?”
“네? 뭘요?”“학교.”“학교는 못 들고 와요!”“그런가.”쇼헤이는 흠, 하고 난처하다는 듯 코로 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양팔을 비볐다.“할아버지, 추우세요? 학교가 아니라 옷이 필요하셨던 거였어.”
--- p.113
의미가 연결되지 않는 말들이 늙은 아버지에게서 새어 나온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른 단어가 나와버린 걸까? 아니면 말하려는 내용 자체가 이미 무너져버린 걸까? 후미는 알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말할 수 없어 답답한 마음을 상상만 할 뿐이다.
--- p.178
“자, 쇼헤이 씨, 저를 꼭 잡으세요. 지금부터 욕조 가장자리에 앉아주세요. 준비되셨나요? 갑니다. 하나, 둘, 셋!”
남자 스태프가 그렇게 말하며 쇼헤이의 양쪽 팔꿈치를 잡으려 하자 그때까지 멍하니 있던 노인의 반항심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싫어!”이 ‘싫어!’는 무슨 뜻일까? 요코는 종종 궁금했다. 자기 의사로 뭔가 하는 게 불가능해진 남편에게 거부는 가장 명확한 자기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없게 되어버린 그에겐 ‘NO’만이 확실한 의사 표시이고, 그 필사적인 ‘NO’에 눌려 상대가 요구를 철회하면 뭔가 달성한 것 같고 이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코는 유아기의 세 딸이 반항하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 p.219
“엄마가 퇴원한다고 해서 지금까지처럼 둘만 놔둘 순 없잖아. 치매 4등급이랑 실명할 뻔했던 할머니를.”
앞으로 엄마 아빠의 생활이 어떨지 생각하니 문득 두려워졌다.
3개월쯤 전부터 아버지의 상태가 악화되어 휠체어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씹어서 삼키는 능력에 문제가 생긴듯 형태가 있는 음식은 좀처럼 먹을 수 없게 됐다. 밤에 침대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그전에도 몇 번이나 들었다. 요즘 자주 듣는 이야기는 거실 소파에서만 자려고 하고 침실로 가기 싫어해서 난처하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케어 매니저인 다카하시 씨의 권유로 고령자 긴급 연락 서비스에 등록했다. 24시간 대응 체제여서 연락하면 즉시 간병 스태프가 달려와준다. 짊어지고 침대로 옮겨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요코는 우선 나나에게 전화해서 한바탕 푸념을 늘어놓은 다음 24시간 서비스를 부르곤 했다.
아버지가 온몸의 힘이 쑥 빠진 채 작은 체구의 엄마에게 기대는 상황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사정사정하다가 질질 끌어당겼다가’는 일상일 것이며, ‘짊어지듯 화장실로 데리고 가는 일’도 물론 많았을 것이다. 엄마는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이 모든 일을 해왔다. 눈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노령의 엄마가 여태까지 다치지 않은 게 기적이다.
--- pp.240-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