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차의 문이 양쪽으로 열리고 머리가 짧고 체격이 건장한 두 사내가 내렸다. 운전대를 쥔 C의 손가락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 똘지 마, 똘지 말라고!”
O는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스스로도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다. 그가 차문을 연 채 땅에 한발을 딛고 또 다른 발을 딛으려는 차에, 땅에 웬 커다란 망치 - 공사현장에서 흔히 ‘오함마’라고 불리며 기다란 손잡이 끝에 육중하고 뭉툭한 금속 덩어리가 달린 도구로 보통 망치보다 더 큰 힘을 가할 수 있어 콘크리트 거푸집 등을 깨뜨릴 때 사용한다 - 가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절묘하게도 차와 길가 밭 사이의 틈에, 박달나무 자루를 달고 금속의 몸체에 벌겋게 녹이 슨 채.
“아니, 이게 여기 왜 있는 거야?”
말을 하면서 O는 자신도 모르게 그걸 집어 들었다. 한 손으로 들기에는 약간 무거운 듯해서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가 오른손으로 바꿔들었다가 하면서 무게를 가늠했다. C를 돌아보며 “이게 왜 길바닥에 있을까?” 하면서 오함마를 이 손 저 손으로 주고 받기도 했다. C는 전화기에서 여전히 손을 떼지 못하면서도 “있을 만하니 있겠지. 상태가 나쁘지는 않네” 하고 대꾸했다. O가 앞을 바라보자 아까 차에서 내렸던 머리 짧은 두 남자가 5, 6미터 앞까지 와서 더 이상 전진도 후퇴도 하지 못하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었다.
“왜요, 아더씨들! 뭐 할 말 있드세요? 있냐고?”
O는 오함마를 머리 위로 빙글빙글 돌리다가 번쩍거리는 상대방의 승용차를 겨냥했다. 여차하면 때려 부술 수도 있다는 듯이. 그러자 두 남자 중 하나가 급히 “아녜요. 우리 그냥 지나가다가 하도 운전을 안전하게 잘하시는 것 같길래 좀 배우려고 그랬던 겁니다” 하고는 동료를 향해 눈을 껌벅거렸다. 그의 동료는 그만한 말주변조차 없는지 커다란 주먹을 서로 포갠 채 서 있을 뿐이었다.
--- pp.12-13
일주일이 지나도 도대체 뭘 파는 것을 보지 못하던 나는 더 참지 못하고 할머니에게서 참기름을 한 병 사고 말았다. 병에는 아무런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할머니가 직접 농사지어 읍내 기름집에서 짜서 팔 것이니 원산지나 제조자, 공급자가 표시된 공장 산과는 다르게 라벨이 없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는 김에 설악산 특산물이라는 취나물, 참나물, 말린 버섯까지 한 봉지씩 샀다. 그때 시인 O가 어딘가를 다녀오는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게 다가왔다.
“걸려들었네. 소설가들은 경제를 안다느니 하면서 세상 물정 다 아는 것처럼 큰소리를 치더니만.”
“뭐에 걸렸다는 거예요
“그거 중국산이라고. 중국산 참기름에 중국산 들기름이나 중국산 식용유 같은 게 적당히 섞인. 진짜보다는 좀 싸고 가짜보다는 많이 비싸지. 이익이 그만큼 크고. 그런 걸 ‘할매 장
사’라고 하지. 영악한 장사치들이 아침마다 승합차를 가지고 시골 마을마다 가서 할머니들을 모셔다 주요 거점에 떨어뜨려 놓고 어리숙한 뜨내기손님 걸리면 바가지를 씌우는 거야. 그게 요새 장사가 되는 유일한 아이템이라대. 저 할머니가 다 이야기해 줬어.“
할머니는 멀찌감치 앉아서 앞니가 두엇 빠진 잇몸을 보이며 웃고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그럼 이게 다 가짜라는?”
“가짜는 아니지. 먹을 만은 할 거야. 두고두고 배는 아프겠지, 좀 비싸게 줬으니.”
--- pp.33-44
되도록 화석연료로 작동되는 기계를 쓰지 않고 사람과 자연의 힘을 빌려 농사를 짓는다는 게 P의 신조지만 워낙 풀숲이 광대하고 풀이 웬만한 나무마냥 억세기까지 하니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시험 삼아 예초기를 가지고 풀숲으로 가서 몇 번 가동을 해본 결과, 그는 몇 가지 과제를 먼저 해결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풀을 베려면 풀잎이나 가시에 피부가 긁힐 수도 있고 뱀이나 벌집을 건드릴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가릴, 예컨대 반도체 회사 연구원처럼 방진복 차림을 하면 좋은데 농촌에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어쨌든 그는 장화를 신고 비옷을 입고 망사로 얼굴을 가렸으며 테이프로 망사와 비옷 사이 틈새를 단단히 막은 뒤 색안경을 끼고 밀짚모자를 쓴 채로(제법 안드로메다에서 온 우주인 티가 난다고 했다) 아주 이른 아침이나 해 지기 직전, 더위가 좀 수굿해질 때를 타서 풀을 베러 나갔다.
실전에 나가보니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모기가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대단히 많았다. 그것도 가정집 모기가 아닌 숲모기의 암모기가 상대였다.
산란을 앞둔 숲 속의 암모기는 생명체의 본성인 유전자 번식이라는 절대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일생에 한두 번밖에 주어지지 않을 기회를 기다려왔을 것이다. 밭에서 풀 한 번 베려면 수십 수백 마리의 모기들한테 피를 빨릴 각오를 해야 했다. 그래서 그가 초음파 모기 퇴치기, 줄여서 ‘초모퇴’를 주문한 것이었다.
--- pp.132-133
“완벽한 스피커는 있습니다. 사람이죠. 사람의 귀에는 사람의 소리가 가장 훌륭한 스피커일 수밖에 없거든요.”
C가 순순히 수십 년의 지론을 거둬들일 리 없는 데다 취기까지 거들어 난데없이 격한 토론이 벌어졌다. 오디오 - 과학 - 기계가 한 편이 되고 음악 - 사람 - 연주회가 다른 편이 되어 어느 편이 더 우월한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지더니, 그 ‘인간 스피커’의 완벽성을 당장 실험해보자고 C가 제안했다. P가 자신의 목소리, 곧 노래로 증명을 할 테니 경찰이 출동하면 책임지겠느냐고 되물었다.
“허허, 경찰이 출동하게만 하면 내가 오늘 술값은 무조건 책임지지. 경찰이 출동해 줄 때까지 밤새 불러도 좋소.”
C가 도발하듯 말하자 P의 얼굴이 싹 굳어졌다. S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휴지를 배배 꼬면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동네 사람인 내가 나섰다.
“누가 노래 좀 부른다고 경찰에 신고할 사람, 이 동네에는 안 살아요. 우리 동네 분들이 얼마나 수준이 높은데. 오늘 어디 공짜로 진짜 가수의 생음악 한번 들어봅시다.”
P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골목길 가운데로 나서서 팔을 벌리고 섰다. 사람이 달라 보였다. 전장에 선 영웅의 풍모 같은 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익숙한 아리아, 푸치니의 [토스카] 가운데 ‘별은 빛나건만’이었다. 처음에는 나직하게 읊조리던 곡이 뒤로 가면서 상승세를 타더니 마지막에는 폭풍이 몰아치는 듯했다. 창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탁탁, 하고 이어졌다.
“에 논 호 아마토 마이 탄토 라 비타! 탄토 라 비타.”
마지막의 절창이 끝났을 때 촤르르르 하고 박수 소리가 터졌다. 지나가던 사람들,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생
맥줏집 주인까지 꽃을 던지듯 갈채를 보냈다. 자연스럽게 “앙코르”가 나왔다. 창문마다 동네 사람들의 얼굴이 화분처럼 나타났다.
--- pp.119-180
사내는 후줄근한 점퍼를 걸치고 있었는데 안에 입은 셔츠는 헐렁하고 얇은 와이셔츠였고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에 한기를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김 주사가 조금 더 값을 낮춰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김 주사는 오기가 나서 장사를 끝낸 트럭들이 시동을 걸고 떠날 때까지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런 식으로 허기가 질 지경이 되었다. 마침내 사내가 김 주사에게 다가왔다.
“보소, 아재요. 거 티샤쓰가 한 개에 울맨교?”
“한 개는 절대로 안 팝니데이. 두 개에 만 원, 만 원.”
김 주사의 어투는 자동으로 그 지역에 맞는 사투리로 바뀌었다
“에이 그카지 말고 한 개만 파소, 사람이 몸뚱아리가 한 갠데 우얘 두 개를 한꺼분에 입는다고 그카는교.”
“그래는 몬하지. 그래마 혼자 남은 티샤쓰가 외로와 외로서 못 살제. 두 개 같이 가져가이소, 요일 따라 기분 따라 색
깔을 바까가미 입으시마 좋지.“
그들의 팽팽한 논전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누가 옳고 그른 것도 아니었다. 결국 장사에서는 시간을 등에 업은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김 주사는 이를 빠득 갈며 비닐 봉지에 티셔츠 하나를 담아서 사내에게 건넸다. 사내는 곧 닳아 없어져 버릴 듯 나달거리는 오천 원짜리 한 장을 김 주사에게 건넨 뒤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김 주사는 그의 등짝에 대고 “그 옷, 그거 담 장날 가지고 와도 반, 반 반…” 하는데 뒤의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반품 없다’는 말 대신 반토막, 반쪽, 반대, 반사, 반딧불 같은 단어가 초파리처럼 달려드는 바람에 머리를 흔들던 김 주사는 마침내 결정했다.
“담 장날에 돈 마이 벌어와서 나머지 반동가리도 꼭 사가이소, 어이?”
사내는 몸을 반쯤 돌린 채 서 있다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검은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
“그럼 또 보입시더!”
--- pp.207-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