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당국의 집요한 간섭을 받으면서도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려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아버지의 생각은 굳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불안하면서도 자랑스러웠다. “공산주의 독재는 우리가 원하던 독립된 나라가 아니다. 남과 북이 갈라져서 살 수 없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하시던 해방자 모세의 이야기,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분단 이야기, 예수님이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이야기 등으로 평화와 통일 그리고 남과 북의 화합을 강조하면서 듣는 이들에게 해방과 통일의 희망을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듣는 이들은 공산당 정권의 독주와 강권 통제정치 그리고 기독교 탄압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다.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는 고민이 더해갔다. 남한으로 월남하기로 하고 평양까지 와서 그 기회를 살피고는 있었지만, 그 기회가 쉽게 오는 것 같지 않았다. 38선의 경계가 점점 더 강화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에 더하여 아버지는 교인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서 위로를 받으며 예배에 열중하고 목사의 설교에 실낱같은 희망을 키우고 있는 것을 보면서 “도저히 양떼를 버리고 우리 혼자 살겠다고 도망갈 수 없다”면서 한숨을 내쉬는 날이 많았다. (50쪽: 제2장 “공산 치하의 북한 교회” 中)
누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피난민은 서울에 있는 영락교회에 가면 된다고 해서, 나도 피난민들을 따라 걸어서 영락교회로 갔다. 그때는 서울역에서 고개만 넘으면 영락교회였다. 허물어진 건물들, 아직도 불타고 있는 집들 사이를 걸어서 영락교회 뜰에 도착했을 때 나는 놀랐다. 영락교회 뜰과 건물 안은 피난민들로 가득차 있었다. 나처럼 헤어진 가족들을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면 반가움에 눈물로 부둥켜안고 우는 아우성으로 교회 뜰은 아수라장이었다. 게시판에 붙어 있는 피난민 소식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우리 식구들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선 나는 그 게시판에 내 이름을 올리고 우리 가족 이름을 큰 글씨로 써 붙였다. 내가 부산으로 피난 갈 것이고, 멀쩡하게 살아서 서울까지 왔다는 글도 덧붙였다. 그리고 돌아서는데 “서 선생 아니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83쪽: 제3장 “남한의 해방 정국과 전쟁, 그리고 4.19” 中)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 주위에 가득히 타고 있던 승객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 혼자만 그 넓은 기차 칸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서 일어나 옆의 기차 칸에 건너가 보았다. 그 칸에는 흑인 승객들만 가득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내 자리로 돌아오니 백인 몇 사람이 내 칸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지나가는 차장에게 영문을 물었더니 아주 간단한 대답이었다. 이 칸은 백인들만 타는 칸이고 옆 칸은 흑인들만 타는 흑인 전용 칸이라는 것이다. 1953년 그 당시만 해도 미국의 흑백 인종차별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슨?딕슨선(Mason Dickson Line)이라고 해서 미 대륙의 북부와 남부를 갈라놓는 선이 있는데, 그 선의 북쪽에서는 흑백 차별 없이 기차도 같이 타고 버스도 같이 타고 화장실이나 식당도 같이 사용할 수 있지만, 남부에 내려가면 흑인들이 타는 기차 칸도 따로이고, 버스 좌석도 흑인들의 것은 뒤쪽에 있었으며 식당은 물론 화장실까지도 흑인용과 백인용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87~88쪽: 제3장 “남한의 해방 정국과 전쟁, 그리고 4.19” 中)
1969년 8월 말, 나는 구미의 언어분석 철학을 신학과 연결시키는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한국은 바야흐로 박정희 군사정권의 3선 개헌 획책이 전개되고 있었고, 기독교계는 이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기독교와 국가권력의 대결, 대한민국의 정치적 격동의 험난한 물결 속에 뛰어드는 것을 통감했다. 귀국 인사를 드린 자리에서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은 한마디 환영의 말씀을 주셨다. “잘 왔소. 이제 고생 많이 하게 됐소. 하하하.” 그의 쾌활하지만, 깊은 의미가 담긴 환영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하다. (126쪽: 제4장 “4.19 학생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 그리고 한국교회” 中)
억압당하는 민중을 말하고 신학화하는 한국의 민중신학자들은 노동현장과 노동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당시 민중신학을 주도한 서남동, 안병무, 현영학 교수들은 노동현장에서 해고당하고 “블랙 리스트”에 올라서 다른 공장에 취직도 못하고 있는 여자 노동자들과 대화의 시간을 마련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는 모두 해고 노동자들이 10대 후반, 집에서 재롱을 부리면서 학교에 다녀야 할 어린 소녀들이라는 데 놀랐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그들은 씩씩하게 열악한 노동 현장을 고발하면서 자기들의 투쟁을 진솔하게 또박또박 증언하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닦으면서……. 민중신학을 한다는 어른들도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분노하고 있었다. 한 어린 소녀 노동자는 “예수 믿고 교회 나가고 장로라는 공장 사장이 정말 예수쟁이인가 싶을 정도로 나빠요. 장로인 공장 사장의 부인이 일요일 아침 화려한 옷을 차려 입고 우리가 밤샘하며 일하고 있는 공장에 나타나서, ‘여러분 위해 교회 가서 기도할게요. 열심히 일하세요’ 하고 나가는 모습, 정말 눈물 나게 미웠어요”라고 말했다. (195쪽: 제6장 “유신시대의 폭압정치와 궁정동의 총소리” 中)
내 자술서 쓰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형사가 헐레벌떡 내 방으로 뛰어들어 오는 것이었다. 손에는 학장실에서 압수해온 내 일기장을 들고 있었다. 1980년 4월 어느 날, 내가 목포에 가 있었고, 김대중이란 사람과 점심 약속이 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업무용 일기장이었다. 왜, 무슨 일로, 목포에 가서 1박 2일을 했냐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한국 아메리카학회의 회장으로 서울에 있는 미 대사관 미문화원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미국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회를 이끌고 있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당시 목포에 있는 미문화원에서 개최한 “미국 민주주의의 역사와 정신” 비슷한 강연회에 강사로 갔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김대중이란 이름은 재야 정치인 김대중이 아니라, 당시 ≪조선일보≫ 기자로 주미 특파원으로 오래 근무하다가 귀국한 “미국통” 기자였다. 서울의 아메리카학회에서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강연회 연사로 그를 초청하기 위해서 만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국보위의 합동 수사본부에 끌려 와서 조사받는 것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참고인으로인데, 몇 달 전 4월엔가 그 거물급 김대중과 점심까지 같이 했다는 기록은 대단한 것이었다. 결국 내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느라고 며칠 더 그 방 신세를 지고 있어야 했다. (227쪽: 제7장 “신군부에 대한 저항과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 中)
에큐메니컬 민주화 운동세력은 전두환 정권의 폭력적인 탄압을 계속 받았다.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온 에큐메니컬 진영의 지도자들을 회유하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순화하지 않은 인물, 가령 박형규 목사 같은 교회 지도자를 회유하는 일에 실패한 정보당국은 박형규 목사를 그의 근거지인 서울 제일교회로부터 폭력으로 축출하는 음모를 자행했다. 1983년 8월 28일, 그동안 박 목사의 민주화 운동과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는 설교 등에 반대해오던 장로 한 사람이 예배 후 교회 안에서 박 목사를 구타한 일로 박 목사 축출이 시작되었다. 장로라는 사람이 박 목사의 멱살을 잡고 안면을 구타하여 어금니 한 개를 부러뜨리는 폭행을 감행했던 것이다. 1984년 한국 개신교 선교 100주년이 되는 해에 새해 벽두부터 시작하여 제일교회 예배를 방해하는 행위는 계속되었다. 제일교회 당회의 대응조치에 불복한 폭력배들은 가을까지 폭력 행위를 지속했다. 1984년 9월 23일 오후 2시 박형규 목사가 교회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마치고 교회 계단을 내려오는 찰나, 폭력배들이 박 목사를 구타하고 넘어지게 한 다음 복부를 무참하게 발로 차고 짓밟기 시작했다. 저지하는 교인들까지도 폭력배의 구타를 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269쪽: 제9장 “에큐메니컬 평화통일 운동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中)
1987년 6월의 숨 가쁜 어느 날, NCC 선교교육원 원장이 나를 불러냈다. 새문안교회에서 범교단 목사들이 반정부 집회를 열고 예배를 드릴 터이니 와서 설교를 하라는 것이었다. 시국 집회 예배자들도 마구 잡아가는 판에 설교자는 물론 각오를 해야 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각오를 하게 하고 새문안교회를 향했다. 천 명에 가까운 젊은 목사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전두환 정권의 폭력과 5.18 학살, 그리고 정당한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을 무차별 고문하고 죽이는 정부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전두환이 호헌의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조속한 시일에 민주헌법으로 개헌하고 새 정부를 수립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예배 끝에 축도를 하면서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오재식 원장은 경찰이 달려와 잡아갈지도 모른다고, 나를 교회 뒷문으로 빼내어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냈다. 그날 밤 새문안교회에 모여 함께 예배드린 목사들은 모두 근처 광화문 네거리까지 최루탄 세례를 받으며 행진했다. (282쪽: 제9장 “에큐메니컬 평화통일 운동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中)
우리는 얼마 안 되는 이삿짐을 싸서 배편으로 부쳤다. 그리고 나는 뉴욕의 재단 본부로 출근하면서 홍콩 사무실을 열고 거기서 일할 것들에 대한 안내와 교육을 받았다. 재단 직원들과 이야기하는 중 책임자 한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우리 재단 이사들이 너무 열렬히 홍콩 아시아 사무실을 두고 거기서 활동하자고 해서 마지못해 사무실을 두기로 했고, 미국 대학에서 잘 가르치고 있는 서 박사를 외지인 홍콩으로 가게 해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거기 얼마나 오래 있겠어요? 거기 사무실을 두고 일하는 것은 오래 못 갈 겁니다. 한 가지 실험입니다. 한 3년 고생하실 생각하시고 나가시면 됩니다.” 아주 친절을 베푸는 것 같은 말이었지만, 나는 당장 반발했다. “아니 내가 실험용 돼지(guinea pig)란 말이요? 그리고 겨우 3년 안에 다시 아시아 사무실을 폐쇄하겠다는 계획인가요? 그런 생각이라면 나는 홍콩에 안 나갈 겁니다. 그렇지만 난 나가겠습니다.” 아시아 사람들은 스스로 아시아의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은 다분히 아시아 지성을 무시하는 인종차별주의에서 오는 백인들의 잘못된 생각, 이른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중책을 맡고 홍콩으로 나가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리고 태평양을 건너 홍콩으로 이사했다. (328쪽: 제11장 “1990년대 기독교의 한반도 통일운동” 中)
촛불시위가 가열되고 있는 와중에 나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촉구 예장 목회자 시국기도회”의 강사로 초대되어 200여 명의 목회자들 앞에서 연설했다. “‘내가 이러려고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습니까?’ 촛불 광장에서 부르짖는 우리 민중들의 소리입니다. 내가 이 나라가 이 꼴이 되는 것 보려고 이렇게 오래 살았습니까? 나는 1987년 6월, 29년 전 새문안교회에 모인 우리 목사님들 앞에서 전두환은 물러가고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는 개헌을 하라고 주장했습니다. 나는 다시는 우리 목사님들이 비상시국 기도회 같은 거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 살아생전에 다시는 대통령을 탄핵하고 하야시켜야 한다는 설교나 연설을 두 번 다시 안 해도 되고, 안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나는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할 특검이 밝히고 있는, 이른바 “수사 대상”으로 신문지상에 발표된 죄목들을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376쪽: 제13장 “박근혜 정부의 침몰 그리고 촛불혁명”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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