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열두 살 무렵 소작인이 전부 부담하던 비료대를 지주와 절반씩 분담하자고 선동해, 다른 지주들로부터 비난을 당한 반면 농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 고백은 그가 “봉건적 착취자”가 아니라는 항변을 통해, 당국으로부터 동정을 얻으려는 전략을 구사했음을 보여준다.
---p..58
평양교원대학 화학과 학생 길성혁(18)의 자서전·이력서를 검토한 학과장 교수는 “빈농”이라 적혀 있는 그의 출신성분에 의구심을 품었다. 그는 같은 학과에 재학 중인 길성혁의 동향 친구 유강을 불러 사실관계를 따졌다. 유강은 그가 빈농의 아들이 아닌, 축출된 지주의 자식이라고 털어놨다.
---p..72
8월 15일, 학교에 나가 담소를 나누던 그들은 오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중대 발표가 예정돼 있다는 보도를 접했다. 오기혁은 두려움과 희망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 이윽고 “천황이 벌벌 떨며” 직접 전한 정오 속보의 요지는 다름 아닌 항복 선언이었다. 그와 동료 교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 부둥켜안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p.94
황수봉은 그들로부터 타이완 남부에 약 400명의 조선인 병사들이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 황수봉은 자신의 주도 아래 창설된 새 부대에 “인민의용군”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 독자적 세를 형성한 인민의용군은 일본군에 맞설 수 있었고, 그들에게 항의하여 식량·의복과 위생 물자를 나눠 가질 수 있었다. …… 황수봉은 1,300여 명에 달한 인민의용군의 총대장으로 선출되었다. 타이완에 중국국민당 중앙군이 진주한 시점은 1945년 10월 말이었다. 황수봉은 중앙군 사령관과 협상해 일본군 무장해제를 돕는다는 조건으로 귀국 시까지의 편의 보장을 약속받았다.
---p.107
와세다대학 이공학부를 졸업한 뒤 경성철도국에 취직한 신종립(25)은 “집집마다 조선의 장래를 걱정하며 정치를 논하는” 주변 분위기에서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수십 수백 개의 군소 정치단체들이 비온 뒤의 버섯처럼 솟아나고, 많은 정객들이 8월의 무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바삐 돌아다니는” 광경도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p.118
소련군이 송화군에 진주하기 시작했을 때, 한선일은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했다. 마땅히 그들을 환영할 줄로만 알았던 공산청년동맹과 적위대가 되레 사이렌을 울리며 주민들의 피신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소련군으로부터 재산과 부녀자들을 잘 간수해야 한다는 경고도 빠뜨리지 않았다. 좌익 단체들조차 불신했을 만큼, 해방 직후 소련군은 북한 주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p.124
해방 직후 치안 유지 활동에 가장 적극성을 보인 이들은 학생층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학도대”나 “학생대”라 불린 조직을 결성했다. 해방을 맞아 “학생대”에 참가한 황해도 해주 동중학교 학생 최광문(16)은 “무기를 들고 농촌과 지방으로 출동”했다.
---p.140
함경남도 함흥시 영생여자중학생 김경옥(17)은 공청이 해체되고 민청이 창설된 뒤, 가입을 촉구하는 교사들과 “상급생 언니들”의 집요한 설득에 시달렸다. …… 1946년 6월 24일 참다못한 담임교사가 가입 원서를 돌리며 작성을 강요하자, 그녀를 비롯한 반 학생들은 마지못해 민청에 가입했다.
---p.152
모든 북한 주민들은 연령, 성별, 직업에 따라 분류된 각종 사회단체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다. 어린이들은 소년단에, 청년들은 민청에, 여성들은 여맹에, 노동자·사무원들은 직맹에, 농민들은 농맹에 가입하여 조직생활을 했다.
---p.158
서울 영등포 소화정공주식회사 직원 조성준(23)은 …… 1945년 7월경 고향인 함경남도 신흥군으로 돌아왔다. …… 그의 눈에 비친 해방된 고향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특히 “신경찰”을 자처하며 “구경찰”을 비판한 청년단체인 “건국보좌회”의 결성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일제시기 관리 출신 청년들이 주도한 이 조직은 자신들의 과거 행적을 반성하기는커녕, “조선 민족을 위해 싸우겠다!”는 허울 좋은 선언문을 발표하며 해방 후 지역사회의 주도권 장악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다.
---p.180
친일파 재산 몰수는 법적 절차에 따라 엄정히 집행되지 않았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해 사복을 채운 이들 중에는 지역 내 “건달꾼들”이 많았다. 해방 직후의 혼란에 편승해 사리사욕을 채운 그들은 남한으로 도주하거나, 보안기구에 체포되어 교화소에 수감되었다.
---p.181
지주 토지의 몰수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단행되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산업국장 이문환(43)은 북한의 산업 부문을 총괄한 고위 인사였지만, 토지개혁 시에 2만 평(6.7정보)의 경작지를 몰수당했다. 그 탓에 그의 재산은 30만원에서 1만원으로 줄어들었다.
---p.251
토지개혁과 더불어 기존의 소작제가 폐지되고, 분여 받은 경작지에 한해 매매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이제 분여지의 임대와 매각은 불법 행위로 규정되었다. 따라서 자경할 여력이 없는 토지는 국가에 반환해야 했다.
---p.254
빈농들이 토지개혁의 혜택을 받은 반면, 일하지 않는 5정보 이상의 경작지 소유자들인 이른바 “불로지주들”은 법령에 명시된 “요이주자要移住者” 규정에 따라 토지와 주택을 몰수당한 뒤 다른 지역으로 축출되었다.
---p.254
토지를 분여 받은 빈농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 중 일부는 자서전에 그 기쁨을 생생히 묘사했다. 평양교원대학 지리과 학생 전순애(20)는 토지개혁의 혜택을 농민들이 “움 안에서 거저 얻은 떡”에 비유했다. 그녀의 가족들에게 토지개혁 이후의 나날은 “화창한 봄날” 같았다.
---p.263
토지를 분여 받은 빈농들은 감격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국가 건설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2,000평의 토지를 분여 받은 조선인민군 장교 태은섭(22)의 가족들은 하나같이 국가사업에 발 벗고 나섰다.
---p.266
악질적 친일 행위에 연루되지 않았다면 일제시기 전문직 종사자들은 그들의 기존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강원도 평강축산전문학교 교장 주범(40)은 일제시기에 각종 공직을 두루 거친 전문가였다. 그는 시학으로부터 “일제 전직자”라는 이유로 학교장에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시학은 그가 기술학교를 맡고 있다는 점을 들어 마지못해 그의 유임을 승인했다.
---p.295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 이한희(27)의 북한 정착 과정은 초빙 사업의 구체상을 잘 드러낸다. 1946년 9월 초 ‘국대안’에 반대해 사직서를 제출한 그는 북한의 초빙을 받아들여, 9월 19일 김일성종합대학 공학부 교수로 취임했다.
---p.301
해방 후 북한은 “입시 지옥”이라는 오명을 얻은 식민지 조선의 열악한 교육여건을 개선하고자 많은 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학교 증설사업은 교원 부족난을 더 악화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 사범학교나 교원대학 출신뿐만 아니라 중학교·전문학교 출신들까지 교원양성소에서 약 1∼2개월의 단기 교육을 이수한 뒤 교사로 발탁되었다. 20∼30대의 젊은 나이에 교장이 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p.326
해방 전 13년간 일제의 황민화 교육 보급에 앞장서온 강원도 김화군 통구인민학교 교장 박학영(35)은 지난날 자신의 직업에 비판의식을 품기는커녕, 그저 “밥 벌어 먹기에” 급급한 소시민일 뿐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그는 한 혁명가에게 사흘 동안 “사회 발전의 사적 고찰”에 관한 강습을 받고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되었다.
---p.339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습이 강조됨에 따라 전공 학습에만 몰두하는 태도는 더 이상 미덕이 될 수 없었다. 강원도 금화고급중학교 교사 유창술(20)은 “자기 전공 과목인 광물과에만 열중하고 있는 반면, 맑스-레닌주의로 무장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p.354
종종 노동 행위도 과오와 결점을 교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를테면 사업 중 과오를 범한 평양시 교육부 간부 이길선(31)은 북조선로동당 평양시당의 지시에 따라 7개월간 국영 연탄공장 노동자 생활을 했다. 1948년 말 교정을 마친 그는 평양 제12중학교 교장으로 복직했다.
---p.364
친일파 가정 외에 지주 가정, 월남자 가정, 기독교인 가정, 남한에 거주하는 가족·친척을 둔 가정 등이 억압을 받았다. 심지어 부농·기업가·상인 가정 및 노동당과 반목한 조선민주당·천도교청우당 가정도 경계 대상에 속했다. 그들 가족 성원들은 차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의 수직 이동기회를 제약 당했다.
---p.373
황해도 재령군 하성중학교 교무주임 황충환(22)은 단지 처갓집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은 탓에 당국의 주시를 받았다. 기독교 장로인 장인과 평양신학교에 재학 중인 처남을 둔 그는 “불순한 가정”과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처가의 오점에 대한 책임을 함께 떠안아야 했다.
---p.373
새로운 계급 질서는 노동자-고농-빈농-사무원-중농-수공업자-상인-기업가-부농-지주 등의 순으로 위계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곧 피착취계급으로부터 착취계급에 이르기까지 착취당하거나 착취한 정도에 따라 계급 서열이 고착되었다.
---p.392
평양의학대학 교수 김태하(31)는 큰돈을 벌 수 있는 의사들이 착취계급으로 간주되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과거 의료인들의 저열한 사상과 갖가지 죄악을 청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며, 자신이 속한 계급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다. 더 나아가 그는 의료기관 국영화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p.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