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나오는 두 번째 음성은 제자(들)의 음성이다. 13:1과 같은 다른 서문들로 이 책을 구성한 이는 바로 그들이다. 우리는 그들이 이 책을 하나로 묶었다고 여길 것이다. 그들은 이사야의 말 속에 있는 야웨의 말씀을 깨달았고, 그 말씀을 보존하고자 했기에 미래 세대에게도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사야의 말을 각색하고 덧붙이며, 이 말씀이 어떻게 다가올 세대에게 말을 걸었는지 보여 주고자 했을 것이다.…1-39장에는 이사야의 말을 주해하는 방식을 보여 주는 부분이 있는데, 이 같은 부분은 이사야 당시에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요시야 왕 시절에 기록되었다는 것이 근래에 호평을 받는 학설이다. 우리는 이사야의 후대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런 작업을 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주 개략적으로 말한다면, 1-39장에 나오는 시적 계시는 이사야 본인의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 반면, 그 가운데 산문으로 쓰인 구절들은 그가 가르친 ‘본문’에 대한 제자들의 설교로 여길 수 있다.
_서론 중에서
야웨가 유다의 예배를 거부하시는 까닭은 그들의 언행과 제물이 의미하는 바가 그들의 마음과 일치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짐작건대 그들은 충분한 할렐루야와 충분한 아멘을 의도하였다. 문제는 그들의 진정 어린 예배가 그들의 삶과 사회 속에서 야웨에 대한 헌신으로 동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기도하며 펼쳐 든 손에는 공동체 안에서 희생된 자들의 “피가 가득”했다. 시온은 약자를 보호해 주어야 했지만(17절) 사회 속에서 그들의 필요는 무시되었다. 결국 그들은 잘 먹지 못하거나 땅을 빼앗기게 되었고, 생계가 막혀 생명도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다.…그들은 분명히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여야 한다(17절). 여기에는 역설이 나타나는데, 더 정확히는 정의에 대한 다른 이해다. 정의의 핵심 원리는 국법에 따라 모두를 동일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합법적인 결정이라 해도 권력자의 이익과 약자의 손해를 위한 일은 정의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_1. 서론: 예루살렘의 심판과 회복(1:1-2:1) 중에서?
심판이 불가피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닌 까닭은 거룩함에는 신실함의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까지니이까”는 주로 시편에 나타나는 물음으로, 답변을 듣고자 함이 아니라 긍휼을 바라는 탄원이다. 처음에 이사야는 단지 이 심판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암울하게 반복하는 응답을 받는다. 이는 앞에서 공언한 바를 다시 확증해 주며 그가 뒤에서 전하는 강력한 메시지에 대한 얼마간의 명분을 제공한다. 머지않아 주전 721년에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는 앗수르에 의해 멸망할 것이다. 유다는 그때 야웨의 백성 전체의 십분의 일이 여전히 남았다는 사실을 자축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가 끝이 아니다(13a절). 이것이 이사야가 받은 말씀의 전부가 아니다. 미리 깨닫지 않는 한, 백성은 극도로 처참한 파멸을 겪은 뒤에야 하나님의 거룩함 속에 있는 긍휼을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깨닫게 될 것이다. 심지어 베어진 나무도 다시 자랄 수 있다.
_4. 이사야의 사명: 백성이 듣지 못하게 하라(6:1-13) 중에서?
지혜가 ‘명철’한 자의 마음에 나타난다는 잠언의 이상을 야웨는 성취하시며(잠 14:33), 이스라엘 공동체에 그 가지를 위한 은사를 약속하신다. 그 가지는 이 세계를 하나님의 세계로 인정하며 살아가게 해주는 그런 종류의 지혜로 영원히 옷 입게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이 지혜가 약한 자와 없는 자의 편에 선 심판, 곧 공정한 심판을 이르게 한다는 잠언의 이상에도 부합한다(3b-5절). 이 구절에 나온 거의 모든 단어는 이전 장들의 어법을 택하고 있다. 그 가지는 공동체의 실패와 앞서 질책당한 그들의 리더십의 실패를 바로잡을 것이다. 그 가지는 앞 장들에 나타난 야웨의 관심을 반영할 것이고, 악을 처벌하는 야웨의 뜻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앗수르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 가지는 앗수르가 가졌던 가공할 힘을 가지게 되겠지만, 단지 친숙한 “공의”(righteousness)만 겸비해서가 아니라 “성실”(faithfulness)도 겸비하고 있다. 이 명사는 여기서 처음 나타나는데, 7:9의 믿음에 굳게 설 것에 대한 강조와 연관된다.
_8. 앗수르의 몰락과 한 가지의 성장(10:5-11:16) 중에서?
12장은 한 권의 책에 어울리는 훌륭한 결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이사야는 장차 있을 재앙을 유다에 경고했으며, 그들의 죄에 따른 처벌로서의 환난과 “그날에” 이스라엘을 위한 야웨의 약속의 성취로서의 환난 그 이면을 보았다. 그리고 이사야 13장은 새롭게 시작한다. ‘신탁’(oracle, 개역개정은 “경고”)이라는 말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린다. 이 독특한 명칭은 이사야서의 두 번째 큰 구분, 곧 13-23장의 주요 단락들의 시작이 될 것이다. 내용을 고려할 때, 히브리어 ‘마싸’(massa’)는 야웨의 실제 말씀이라는 좁은 의미에서의 신탁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다른 것들 가운데) 상상 속의 장면이나 애가, 또는 시가 될 수도 있다. 즉, 온갖 종류의 예언의 조합일 수 있다. 적어도 이사야서에서 이 어휘는 하나같이 야웨가 이방 국가들을 다루시는 일에 관한 자료를 보여 준다.
_10. 13-23장에 관한 서론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서정적인 장면은 어떤 구체적인 역사 경험 너머를 살핀다. 현재 상태 그대로의 35장은 34장에 비해 조금이라도 더 실현된 바가 없으며, 이에 따라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약속으로 남아 있다. 35장이 40-55장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라고 해도, 여기 각각의 모티브들은 거기서 다시 다루어진다. 후에 예수도 여기 나온 일부 모티브를 사용하여 자신의 사역에 적용시키신다(마 11:5). 35장이 다른 곳에서 사용되는 이 두 용례는 그것의 이상이 잠정적으로 성취된 모습을 보여 주며, 그 밖의 다른 잠정적인 성취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를 알려 준다.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황폐함을 풍요로, 두려움을 소망으로, 침묵을 외침으로, 사막을 시내로 바꾸시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찾고 그들을 향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 이상이 또 하나의 잠정적인 성취가 됨을 본다.
_22. 시내가 황무지로, 사막이 못으로(34:1-35:10) 중에서?
앗수르 사령관과의 대면에 나타난 두 번째 국면에서도 그는 마치 산헤립의 꼭두각시뿐 아니라 이사야와 야웨의 꼭두각시인 것처럼 말한다. 그는 “나를 반역하느냐?”고 말한다(5절). 여기서 “나”는 그의 주군 산헤립을 뜻하지만, 예언자에게는 이 “나”가 야웨를 뜻하는 말도 된다. 비록 다른 동사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1:2에서 이사야서를 시작하며 나온 고발이었다. 실제로 여기 사용된 구절은 비슷한 맥락에서 에스겔 2:3에 다시 나타난다. 앗수르를 거스른 반역은 바로 야웨를 거스른 반역이다. 이는 앗수르가 야웨의 대리자인 까닭이다(10:5). 이 논쟁은 한 세기 후에 예레미야가 바벨론을 야웨의 대리자로 보았을 때 다시 일어날 것이다. 만일 히스기야가 야웨를 거슬러 반역을 하고 있다면 그는 야웨를 의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다시 한번 이사야는 쓴웃음을 지을 법하다. 야웨를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히스기야에게 바라는 바였기 때문이다.
_23. 히스기야가 당면한 정치적 대혼란(36:1-37:7) 중에서?
하지만 무슨 공표를 할 수 있는가? 또 다른 음성이 또 다른 선언을 명하며, 야웨가 백성에게 보낼 누군가를 찾으시는 소리를 이사야가 듣고 보였던 반응과(6장) 같은 반응이 보인다. 그러나 내용적인 면에서 그 반응은 명령이 다른 만큼이나 이사야의 반응과 다른데, 역설적으로 그러하다. 이사야는 나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자원했다. 여기서 이사야의 후계자는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생각에 저항한다. 두 상황의 기저에는 유사성이 있다. 두 예언자 모두 그들의 메시지를 거역할 사람들을 마주해야 한다. 6b-7절의 말씀은 그 명령이 반갑지 않은 까닭에 대한 이 새로운 이사야의 설명이다. 예언자는 모든 사람은 “풀”, 곧 야웨의 뜨거운 입김에 시드는 풀임을 알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에게 반응을 기대하며 선포하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_26. 위로와 힘의 선물(40:1-31) 중에서?
히브리어 ‘마쉬아흐’(mashiakh)가 미래의 구원자, 곧 한 분 메시아를 향한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소망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단어가 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이 단어를 실제로 고레스에게 적용하는 것이 스캔들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구약 안에서 이 단어는 통상적으로 다윗 계열의 왕에게 적용되어 왔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아도 본문의 문맥 안에서 스캔들이 된다. 다시금 시인은 야웨가 한때 다윗 계열의 왕을 통해 뜻하셨던 바가 지금 이 이방 정복자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언한다.
_31. 고레스, 야웨의 기름 부음을 받은 목자(44:24-45:25) 중에서?
우리는 당연히 야웨가 그냥 백성을 용서하실 수 없었는지,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려고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부도덕한 일은 아닌지 물어볼 수 있다. 이 이상의 처음 강조점이 종의 주도성에 있다는 사실은 이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이 된다. 그는 억지로 희생을 강요받은 피해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사람이었다. 또 다른 관점에서, 야웨는 용서하려는 뜻을 오랫동안 피력하셨지만 어디서도 그런 사람을 찾을 수가 없으셨던 것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백성이 은혜를 당연시 여기는 성향은 약해지기는커녕 강해졌고, 그들은 여전히 샬롬을 찾지 못했다. 이는 간단하고 대가 없는 용서 같은 것은 불가하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용서는 보상을 요구하는 대신 잘못한 자의 과실 비용을 감내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야웨가 오랫동안 해오신 일이다. 야웨는 언제나 하늘에서 은유적 속건제를 바쳐 오셨다. 종이 한 일은 그것을 사람들의 목전에서 성육신화하여 외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로 인해 그는 야웨의 팔의 계시로 나타났다.
_36. 야웨의 팔의 새로운 계시(52:13-53:12) 중에서?
근본적인 갱신이 땅에 있을 것이라면, 하늘에서도 근본적인 갱신이 필요할 것이다. 바로 그때에만 18-25절의 이상이 성취될 수 있다. 바로 그때에만 야웨가 “즐거워”하실 수 있다. 야웨의 즐거움(하나님을 주어로 이 동사를 사용하는 일은 드물다)에 야웨의 망각이 동반된다(17절). 땅에서 야웨의 이상이 성취되기 전에 반드시 하늘의 전투에서 승리해야 한다면, 이는 40-66장의 약속들이 수 세기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던 까닭에 대한 신학적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그 약속들은 하늘 전투의 큰 승리와 연관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계 12:9-10). 다른 한편에서 이는 문제를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한데, 그 약속들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채이기 때문이다. 다른 의미에서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계 12:12-17). 그러므로 순교자와 남은 교회는 63:7-64:12의 기도를 하는 이들과 함께 계속해서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묻는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