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하려는 것은, ‘헤이세이’라는 실패에 관한 일종의 박물관을, 한 권의 책 속에 구현하는 작업이다. 1989년부터 2019년까지의 ‘헤이세이’ 30년간은 한마디로 ‘실패의 시대’였다. ‘잃어버린 30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시대에는 여러 분야에서 수많은 ‘실패’가 되풀이됐다. 하지만, ‘실패’들을 열거하기는 쉬워도 그들 전체가 어떻게 연결돼 있었고, 우리들은 왜 30년씩이나 ‘실패’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가를 드러내 보이기는 쉽지 않다. 헤이세이의 ‘실패’는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필연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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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1980년대 말, 아시아 시장은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미일을 축으로 발전해온 일본의 전후 산업체제를, 아시아와의 관계를 축으로 하는 쪽으로 재편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얼마 안 가 일본기업은 아시아에 대거 공장을 짓게 되지만, 수요면에서도 아시아를 본격적으로 상대하는 체제로의 전환이, 1980년대부터 정책적으로 유도돼야 했던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런 구조전환은 뒤로 미뤄지고, 금리인하에 의한 대응이 우선시되면서 효과는 약하면서 부작용이 터무니없이 큰 결과를 초래했던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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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제1요인은, 일본의 주요 전기산업이 TV시대의 종언과 모바일형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점이다. (중략) 다른 하나는 1990년대부터 글로벌한 규모로 전개된 수평 분업구조에 일본기업이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새로운 체제는 ‘계열’ ‘하청’이라는 종래의 일본적 발상을 무의미하게 했다. 즉 일본 기업들은 오랜 기간 익숙해진 조직원리의 근본적인 변경을 요구받게 됐다. 이것이 전통적인 일본 대기업에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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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 전기의 정치사는, 선거제도 개혁, 특히 소선거구제 도입 여부를 둘러싼 공방으로 점철됐다. 이 점에서 자민당도 사회당도 ‘수구파’와 ‘개혁파’로 두동강 났다. ‘수구파’로 불린 것은 중선거구제를 기반으로 한 ‘보수’ ‘혁신’ 간대립구도라는 55년 체제 속에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한 정치가들이었다. ‘개혁파’란 그런 자민당 내 파벌정치와 자민·사회 양당의 보완관계를 뒷받침해온 선거제도를 파괴함으로써 자신들의 새로운 권력기반이 구축될 것을 기대한 정치인들이었다. (중략)
총평을 중심으로 한 관공노 계열 노동조합이 내부붕괴로 치달은 것은 사회당의 조직적 기반을 두드러지게 약화시켰다. 확고한 조직적 기반을 상실한 사회당은, 1990년대 들어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그 얼마 전 사회당에는 총평계 노동조합에 의존하는 좌파정당에서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처럼 풀뿌리적인 저변을 가진 리버럴 정당으로 전환할 최후의 찬스가 있었다. 쇼와에서 헤이세이로 전환할 무렵 일었던 도이 붐이 기회였다. (중략)
도이가 이 무렵 시도한 것은 사회당의 중심을 ‘계급’에서 ‘젠더’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이 전환 이후에는 ‘지역’과 ‘세대’ 즉, 지방과 고령화 문제를 축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당의 전략이 부상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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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정권은 민주당이 내건 래디컬한 정치주도를 부정하고, 이를 교활한 관저주도로 대체했다. 관저가 성청의 관료들을 뜻대로 움직이고, 예산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내각인사국과 경제재정자문회의로 충분했다. 관방장관은 성청의 국장급 인사를 관리함으로써 성청 전체에 대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고이즈미 정권처럼 포퓰리즘과 경제재정자문회의의 민간인 활용을 솜씨있게 조합하면 여론에 ‘정치주도’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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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1995년 한신·아와지대지진은 고도성장기 일본식 개발주의의 위험성을 근저에서 지적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지진은 원전이나 고속도로, 인공섬 같은 기술의 한계를 드러내 보였을 뿐 아니라 전후 흔들림 없을 것으로 여겨지던 사회의 기반이 의외로 무르고, 불안정함을 일깨웠다.
--- p.167
결국, 헤이세이 일본 사회가 향한 것은 비정규고용의 청년과 여성, 외국인 노동자를 사회 전체가 착취하는 체제의 고착화였다. 이를 정당화한 것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이고, 여기에 동원된 것이 ‘구조개혁’이라는 캐치플레이즈였다. 이런 체제가 침투하면서 등장한 것은 ‘전후’의 총중류화를 뒤엎은 ‘포스트 헤이세이’의 계급사회이다.
--- p.195
돌이켜보면 찬스는 있었다. ‘소자화’라는 말이 정부백서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92년이지만 이 무렵이라면 아직 단카이 주니어는 출산적령기 이전이었던 만큼 꽤 효과적인 수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사회는 버블붕괴의 뒤처리에 필사적이었고, 동시에 정치는 ‘정치주도’에 매진하고 있었다. 사회복지 정책이 의제화되더라도 고령화 대책이 많았고, 소자화 대책은 뒷전으로 밀렸다. 고령자는 표가 되지만, 청년도 유아도 표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 p.208
아무로 나미에는 1990년대 음악 신에서 ‘아이돌’로서 도약한 것이 아니다. 그의 도약을 가능케 한 것은 동시대 남성들이 아니라, 젊은 여성들의 ‘멋짐’에 대한 선호, 그것도 남자들이 아니라 여성들이 바라는 멋짐에 대한 욕망의 실현이었다. 아무로의 돌연한 결혼과 출산, 1년간의 육아휴직이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그를 수용하는 중심층이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 p.241
헤이세이의 일본이 불운했던 것은, 이 글로벌화와 넷사회화에 의한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용이, 때마침 경제와 인구구조의 쇠퇴기와 일치했다는 점이다. 중국 등 신흥국처럼 경제, 인구 확장기와 이런 변화가 일치할 경우에는 변화를 발전의 기초로 삼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고도성장기 정치경제의 골격이 확립됐고, 버블로 정점을 찍었던 일본사회는, 버블붕괴와 인구감소, 글로벌화, 넷사회화가 한꺼번에 덮친 헤이세이 시대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p.271
지정학적 변화 속에서 헤이세이 일본의 미국에 대한 종속은 갈수록 깊어졌다. 자신을 잃어가니 강한 미국에 갈수록 의지함으로써 중심성을 유지하려 한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격차를 확대하고 분열을 강화하고 있는 일본에 미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외적으로는 이미 그 패권에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한 미국에 계속 의존하면서 아시아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축하려 하지 않는 일본에도 미래는 없다.
--- p.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