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금을 깼다. 삼성전자 한 주를 사봤다. 주당 250만 원대였다. 그랬더니 그 녀석이 며칠 만에 270만 원대가 되었다. 달랑 한 주를 샀을 뿐인데 약 20만 원을 벌었다. ‘이래서 주식투자를 하라고 하는구나!’ 머리 위에서 불꽃이 터지듯 깨달음을 얻는 것 같았다. 20만 원을 벌고 나니 퇴근길 발걸음이 어찌나 가볍던지. 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잠들 때까지 배실배실 웃었다. 인터넷에 보면 ‘삼성전자 주주가 되고 나서 삶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고, 이상하게 밝아졌다’더니 내게도 그런 현상이 찾아왔다. 삼성전자 주가 그래프도 마음에 쏙 들었다. 이 추세대로라면 왠지 300만 원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전 세계 반도체 시장도 활황을 보이고 있다고 하고, 배당도 많이 해서 외국인투자자들도 삼성전자를 그리 좋아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바람직한 투자인가. 차익실현을 했으니 기회를 봐서 또 사야겠다 싶었다. ‘주식은 역시 삼성전자야!’라며 또 샀다. 10만 원만 벌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가졌다. 이번엔 270만 원대였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300만 원을 갈 주식이니까 사둘 만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p. 31-33
“삼성전자 주가 보셨어요? 전 정말 올해 주식이 이렇게 날아갈 줄 몰랐어요. 이거 참 주식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못살아요.” “사실 저는 반도체 업황이 좋을 거라는 걸 작년 말부터 알았습니다.” ‘알았다니! 이분을 좀더 일찍 만났어야 했어!’라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이지만, 좀더 일찍 이 얘기를 들었으면 삼성전자든 하이닉스든 뭐든 사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 남았다. “한국은행에서 발표하는 기업경영분석 있잖아요. 그거 보면 작년 하반기부터 반도체 업종 실적이 돌아서더라구요. 긴가민가했는데 2017년에는 플러스로 돌아서서 경제가 좋아지겠구나를 확신할 수 있었죠.” 2016년 하반기부터 반도체 업황지수가 돌아서기 시작했다는 것이 경제학 박사가 본 이유였다. 그 말을 듣고 ‘그때 어땠더라’ 생각을 되짚었다. 그런데 막상 반도체를 떠올리려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는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는 신뢰할 만한 데이터보다는 과거의 경험에 떠밀려서 경기는 살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미신 같은 믿음이 앞섰고, 데이터조차도 신경 써서 보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 p.50-51
첫 해외주식으로 아마존을 산 건 아니었다. 아마존은 주당 1,800달러 정도였는데 환전하면 못해도 190만 원이었다. 초보자가 살 주식치고는 비쌌다. 종잣돈은 약 80만 원이었다. 그래서 당시 애용하던 넷플릭스 주식을 샀다. 주가가 250달러대였으니 저렴해서 마음에 들었다. 미국 증시가 계속 호황이었기 때문에 사실 이름을 알고 있는 주식은 대부분 오름세였다. 아무거나 집어서 사도 크게 손해는 안 볼 때였다. 대세 상승장에 편승한 셈이다. 넷플릭스는 나름 이익을 주고 떠났다. 285달러대에 팔아서 소소하게 수익을 냈다. 넷플릭스를 팔고는 520달러였던 테슬라를 한 주 샀다. 미래에는 역시 전기차가 대세라고 생각했다. 이 선택은 정말이지 백번 옳았다. 테슬라는 그 후 승승장구해서 900달러대까지 치솟았으니까 말이다. 물론 초보투자자인 나는 이런 상승장에서 꼭 삐딱선을 탄다. 테슬라가 635달러까지 오르자 너무 기뻤다. 기쁜 나머지 매도에 나선다. 약간의 차익을 내고 테슬라는 그렇게 떠나갔다. 그동안 손해만 보던 내게 미국주식은 새로운 세계였다. 종종 예약 주문을 걸어놓고는 내 계좌에 들어온 주식을 구경하곤 했다. 그 주식들은 때때로 암탉이 알을 낳는 것처럼 플러스를 뜻하는 빨간 숫자로 나를 기쁘게 했다.
--- p.69-70
살다 보니 유로화에 투자할 만한 기회는 또 왔다.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또 생겼다. 그때로부터 딱 7년 후 브렉시트가 터졌다.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겠다고 손들고 나선 것이다. 유로화 환율이 또 떨어지기 시작했다. 2015년 4월에 유로-원 환율은 1,151원대까지 하락했다. 기회였다. 지난번에 실수했다 치더라도 이번에는 보였다. ‘유로화가 너무 많이 하락했구나. 이것을 지금 사두면 어디에 쓰더라도 쓰겠구나.’ 브렉시트 충격에 대한 기사도 수없이 썼다. 유로화 흐름을 토대로 기사로 쓰기도 했고, 시장 사람들의 전망도 모아서 쓰기도 했다. 매일 매일 유로화 환율을 보면서도 정작 유로화를 사지 못했다. 이번에도 또 못 산 것이다. 30대가 된 나는 브렉시트가 터졌지만 유로화말고도 살 게 많았다. 결혼을 한 터라 집도 사야 했고, 새로 이사한 집의 인테리어도 해야 했다. 돈 들어갈 곳이 너무 많아졌다. 유로화를 사더라도 또 여행자금일 뿐이었다. 2015년 연말에 터키 여행을 다녀왔으니 그나마 낮은 레벨에 유로화를 환전했다. 유로화와의 인연은 이렇게 끝이 났다. 말 많고 탈 많던 유로화는 어떻게 됐을까. 2020년 7월 5일 기준 1,348.54원이었다. 1유로 한 장의 가격이 우리돈 1,348.54원이다. 유로화를 못 사서 아쉬워하던 2015년 4월에 1,151원에 유로화를 샀으면 1유로당 197.54원의 이익이 났겠다.
--- p.106-407
외화예금을 활용한 휴가자금 만들기는 환차익이 크지 않은 이상 별로 효과적이지 않았다. 환전보다는 확실히 번거로운 방법이다. 외화예금에 있는 달러를 달러 현물로 받기 위해서는 당연히 직접 은행지점에 방문해야 한다. 이 경우 현찰 환전 수수료를 한 번 더 지불하게 된다. 그냥 환전이 나은지, 외화예금을 활용한 환전이 나은지 수수료를 계산해 꼭 따져봐야 할 대목이다. 환차익을 노린 투자 목적으로 외화예금을 가입한 경우라면 이후 차익실현 시 해당 은행의 원화계좌로 출금할 수 있는데, 전신환 환전 수수료가 한 번 더 나간다는 점에서 환전 수수료를 제외한 순이익이 얼마인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환전이 목적이었다면 최근 은행에서 제공하는 모바일 환전 지갑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 p.116
장롱에 잠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대만달러가 사라진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리 내가 관심을 끄고 있었지만 돈이 사라질 리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대만달러뿐만 아니라 여행 후 남았던 다른 통화도 모두 사라졌다. 가족에게 물어봤더니 2018년에 이미 한 차례 은행에 가서 원화로 바꿔왔다고 했다. 내 수중에 대만달러가 없었음에도 나는 대만달러를 쳐다보면서 쓰린 속을 달래고 있었던 셈이다. 심지어 가족이 대만달러를 환전했던 시기는 대만달러 환율이 가장 낮았던 때였다. 나는 졸지에 고점에 사서 저점에 매도한 어리석은 투자자가 되었다. 차라리 외화예금에 넣어뒀더라면 미미한 금액이었겠지만 이자라도 받았을 것이다. 외화예금, 외화지갑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귀찮다는 이유로 계좌 개설을 하지 않은 게 뒤늦게 후회되었다. 현금을 집에 두고 있으니 잃어버릴 위험, 그 돈을 원화로 바꿔서 다른 자산에 투자했을 경우 얻을 수익의 기회비용 등을 생각하면 내 손실은 더 큰 셈이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대만달러를 강제 청산당했다. 대만달러를 보유하면서 꿈꿨었던 대만 여행도 아직까지 가지 못하고 있다. 다시 여행을 가게 되면 그땐 꼭 외화예금이나 외화지갑을 미리 만들어야겠다.
--- p.132-134
1년에 1.4%도 안 되는 적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익률과 국가는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10년 만기 국채를 보유하는 동안 좋은 값에 채권을 매도할 수 있는 기회가 한 번은 오지 않겠느냐는 자신감이 나의 발길을 증권사로 이끌었다. 그 길로 나름 수수료가 가장 낮다는 증권사를 찾아 계좌를 개설하고 10년 만기 브라질채권을 샀다. 밑도 끝도 없이 브라질채권을 사러 왔다는 말에 증권사 직원이 더 당황한 모습이었다. 직원은 어떤 상품인지 알고 오셨냐며 나에게 반문했지만, 이내 상대의 의지가 강하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계좌 개설과 상품 가입을 도왔다. 상품 설명 중 직원은 브라질채권이 초고위험 상품이라(채권임에도 불구하고!!) 비과세 상품이라고 설명했다. 이론상 채권은 안전자산이라고 배웠던 채권 기자는 국채가 비과세 상품이라는 말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그만두려면 그때 그만둬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브라질, 그리고 나의 인내심과의 기나긴 싸움이 애초에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껏 투자를 결심하고 거기까지 갔는데 “초고위험이라 투자자 보호 같은 건 없다”는 설계사의 말에 “아, 몰랐네요. 다시 생각해보고 오겠습니다” 하고 다시 발길을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계획적으로 브라질채권을 충동구매해버렸다. 누군가의 투자 성공담이 내 귀에까지 들려오면 이미 늦었다고 했던가. 나는 또다시 막차 아닌 막차를 타야 했다.
--- p.151-152
채권을 안전자산이라고 하는데 다른 의미에서 안전한 점도 있다. 가격이 바뀌는 동안 찾아오는 매수?매도 고민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일단 잘 몰라서 가격 확인을 잘 안 한다. 가격이 올라도 장외거래가 많아 팔기가 어렵다. 그러니 애매한 레벨에서 매번 매도 고민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다보면 만기가 찾아오고 안정적인 수익률을 받고 마무리하는 식이다. 괜히 안전자산이 아니다. 갑자기 다른 이야기지만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오른다. 만기를 기다리고 있는 채권이 하나 또 있다. 회사채는 아니고 국채다. 그 채권에 투자했다가 고금리에 돈을 많이 벌고 있다는 동료의 말에 나도 슬쩍 발을 들였다. 최근에는 계속 악재만 들려오고 있다. 환율은 내동댕이쳐진 지 오래고, 유가마저 급락하면서 비상사태라고 한다. 정치 상황도 어지럽다나. 언젠가 여행 가서 삼바춤을 보고 싶다며 가입한 그 채권이 무사하길 기원해본다. 아마 우리나라에 그 나라가 잘못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밑도 끝도 없는 결론, 브라질 파이팅!
--- p.184-185
그는 경제를 들었다 놨다 하는 위치에 있는 고위공직자였는데, 퇴직하자마자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다며 강남의 집을 팔고 분당으로 이사를 갔다. 그때가 2010년이었다. 금융위기 이후 집값이 큰 폭으로 떨어지고 강남 한복판에서도 미분양이 속출하던 시기였다. 그때만 해도 강남 집값이 분당 집값과 지금처럼 엄청난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다. 막상 분당으로 이사를 갔는데 분당 아파트도 지은 지 오래되다보니 주거환경이 생각만큼 쾌적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분당 주변의 신도시를 알아보다가 근처의 신도시로 이사를 한 번 더 했다. 그때부터 부동산가격이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집값이 움직이는 요인 중 하나가 신축과 구축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반영되는 건 지역이다. 집값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던 2018년, 그는 집값이 가장 많이 뛴 강남 주민이 아닌 경기도 신도시 주민이었다. 신도시 집값도 상당히 많이 올랐겠지만 강남의 무서운 속도를 따라가지는 못했다. 10년 동안 두 번 이사했을 뿐인데 자산증식의 결과는 너무나 달랐다. 한국경제를 쥐락펴락했지만 정작 본인 자산을 쥐락펴락하지는 못했던 셈이다.
--- p.214-215
부동산거래가 주업이 아닌 이상, 지방에서 거주하고 활동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서울 집값이 오르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강남으로 진출하지 못한다. 살면서 내집 한 채 마련하기도 빠듯한 실정을 극복하고 강남에 덜컥 집을 산다고 해도 그 이후의 생계를 감당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지금이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한 지인은 서울 출생이지만 직장이 충청도로 이전하면서 결국 충청도에 집을 사게 되었다. 서울에 집을 사면 지방보다 더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충청도까지 매일 출퇴근하는 부담이 더 컸기 때문이다. 나 하나 희생하면 서울에 집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매일 왕복 3~4시간을 길거리에 버려야 하고, 가족과 함께할 시간도 그만큼 줄어든다고 생각하니 차마 서울에 집을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직장 근처에 집을 산 후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했다. 지방도 일반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서 살아가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가끔 서울에 직장을 잡고 집을 산 친구들을 만나면 속이 쓰릴 때가 있지만 직장 근처에 집 산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에 집을 사지 못했다는 박탈감만 잘 다스리면 그만”이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p.229-230
다음 날 은행에 가서 금을 사고 싶다고 했다. ‘이왕 사는 거 폼나게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금괴를 사야 모양이 그럴싸하지’. 그런데 세상에, 네모난 모양에 음각으로 몸무게인지 비중인지가 써 있는 그 금덩어리는 너무나도 비쌌다. ‘역시 금이구나.’ 사금을 채취하거나, 어디 금광 근처에서 조그만 가루만 주워도 돈이 된다더니 정말 그랬다. 한손에 쏙 들어오게 생긴 직사각형의 금괴는 도저히 투자할 형편이 안되었다. 그래서 금펀드에 들었다. 금값에 연동되어서 수익률이 오른다고 하니, 이거다 싶었다. 그 후로도 금값이 오름세를 이어갔으니 나는 마치 꿀단지라도 묻어둔 것처럼 든든했다. 금값이 꽤 올랐다 싶었을 때 펀드계좌를 열어봤다. 수익률이 3%였나? 너무 쥐꼬리였다. 금값은 20% 이상 올랐는데 이건 너무하다 싶어 은행에 가서 항의했다. “아니, 금값이 이렇게 올랐는데 왜 수익이 안 나요?!” 은행 직원은 너무 담담하게 말했다. “고객님, 이건 파생상품이에요.”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도대체 뭘 산 것인가. 내가 금을 사달랬지 파생상품을 사달라고 했을 리 없다. 심지어 나는 파생상품이 뭔지도 잘 모른다.
--- p.244-245
내가 비트코인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적어도 식당이나 카페, 심지어 버스와 택시기사님마저 비트코인을 이야기할 때가 로켓을 탈 수 있었던 기회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그 당시에도 비트코인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가 나오면서 거품에 대한 공포도 조금씩 커지고 있었던 만큼 결정은 쉽지 않았다. 나는 롤러코스터의 꼭대기는 어디일지, 너무 늦은 것은 아닐지, 10%만이라도 먹고 나올 수 있을지 등등 고민만 하다가 결국 타이밍을 놓쳤다. 광풍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쉬웠지만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민하다 진입했는데 비트코인이 곤두박질치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볼 뻔했다.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의 “일단 로켓에 타라(기회를 잡아라)”는 말은 나에게 일종의 교훈을 주었다. 전혀 그런 의도로 한 얘기는 아니었겠지만, 정신 못 차린 나란 사람은 ‘역시 진정한 한탕을 하려면 남들 관심 없을 때 뛰어들었다가 다들 몰려들 때 발 빼고 나와야 한다’는 진리를 여기서 깨우친 것이다. 3천만 원 가까이 올라갔던 비트코인 가격은 비트코인 과열을 우려한 정부 논의가 시작된 지 정확히 한 달 만에 600만 원대로 추락했다. 반토막도 아닌 반의 반토막이 났다.
--- p.254-255
유가 반등을 노리고 원유 ETN에 투자한다는 기사가 쏟아지는 가운데 코로나19의 영향이 아직 서구권에서 본격화되지 않은 만큼 ‘지금 유가가 바닥’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당시에도 원유 ETN에 대한 열기가 얼마나 과열됐던지 매수한 지 하루 만에 매도했음에도 6%의 수익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후 원유 ETN의 괴리율이 높아져 투자자 손실 가능성이 커졌다는 뉴스가 날마다 나왔다. 괴리율은 시장가격과 지표의 실제 가치의 차이를 나타내는 비율로, 이 비율이 커질수록 실제 가치보다 시장가격이 고평가되었다는 의미다. 한국거래소는 괴리율 30% 이상인 종목에 대한 거래를 정지하기도 했다. 괴리율이 600%를 넘어서는 원유 ETN도 있었다. 투자과열로 ETN의 시장가격이 실제 가치에 비해 6배나 높게 측정되었다는 것이다. 그 종목은 내가 투자했던 종목이기도 했다. 두 차례의 원유 ETN 투자를 통해 다시 한 번 투자는 아무리 준비하고 공부해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에는 언제나 변수가 존재하고 그 변수는 경제에서도, 정치에서도, 심지어 전염병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 특히 변수 중 가장 고약한 변수는 투자심리인 듯하다.
--- p.265-266
주요 생산국의 가뭄에 작황이 나빠지고, 인구가 많은 중국?인도 등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공급충격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갑자기 위기의식이 들었다. 먹을 것이 없는 극한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쓸데없는 절실함에 휩싸였다. 펀드에 가입하는 화면 메인에 소개되어 있던 곡물펀드 수익률을 보자 ‘바로 이거다!’ 하는 생각에 바로 가입하게 된 상품이었다. 그 후 은행직원으로부터 전화가 한 번 더 왔다. 은행직원은 사흘 내로 지점을 방문하지 못한 나를 못내 안타까워했다. “식량난이 올지도 모르니 조금 기다려볼게요.” 무덤덤하게 답하던 내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지만 식량위기는 오지 않았다. 곡물가격은 참으로 희한하게도 수요와 공급이 맞물리다 조금씩 조정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내 곡물펀드는 점점 마이너스 폭이 커지기 시작했다. 마이너스 10%, 20%, 30%….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금액이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처음에 5만 원씩 매달 넣기로 했지만 규칙적으로 넣지 않아서인지 손실은 별로 보지 않았다. 마이너스 폭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커졌지만 원금이 적어서 기껏해야 몇만 원이었다. 정말 수중에 돈이 없어서 다행이다.
--- p.271-273
연말정산에서 세금 폭탄을 맞게 되면서 나는 크라우드펀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게 소득공제가 된다는 설명을 읽고부터였다. 금융당국이 2019년부터 크라우드펀딩을 적극 허용하면서 투자금 3천만 원 이하인 경우 100% 소득공제가 가능해졌다. 벤처기업 투자를 장려하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벤처기업의 경우 2018년 이후부터 3천만 원 이하는 투자금액 100%, 3천만 원 초과 5천만원 이하는 70%, 5천만 원을 초과한 경우 30%의 소득공제가 적용된다. 세금 폭탄을 피하려고 찾은 크라우드펀딩이었지만 너무 신기했다. 소득공제가 된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투자 금액도 소액부터 가능해서 부담이 없었다. 최소 30만 원부터 투자하기 때문에 조금씩 분산 투자할 수 있었다. 게다가 문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해당 행사의 티켓을 준다거나 이용권을 주는 등 소소한 재미도 있었다. 츄러스 가게 투자에는 츄러스 교환권을 줬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가게에서는 그 교환권을 쓸 수 없다고 했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가게였기에 투자를 후회하지는 않았다.
--- p.283-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