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이 귀하디 귀했던 시절에는 그 약간의 쌀조차 섞어 먹을 수 없었다. 쌀 한 톨 섞지 않고 보리로만 지은 밥을 우리는 ‘꽁보리밥’이라 했다. 여기서 ‘꽁’은 ‘오로지 그것으로만 되었다.’는 뜻을 가진 접두어다. 때문에 이 ‘꽁보리밥’을 지역에 따라 ‘강보리밥’, ‘깡보리밥’, ‘꽁당보리밥’ 등으로 불렀다.
군산 지역에서는 이를 ‘꽁당보리’라 불렀다. 한국전쟁 무렵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꽁당보리밥’은 서민들의 주식 아닌 주식이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통일벼’가 처음 등장한다. 이로 인해 쌀 수확량이 급증하면서 ‘꽁당보리밥’도 그렇게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시나브로, 들판에 초록빛 물결이 넘실댄다. 화창한 봄날 저 멀리에서 바라본 보리밭은 새파란 잎사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어 상춘객들이 보리밭 사잇길을 걸으면서 싱그러운 추억을 남기는 모양이다.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온통 푸른빛으로 뒤덮여 있는 오늘에서는 겨우내 웅크렸던 보리가 따사로운 햇살을 머금고 어느새 한 뼘 넘게자라 가는 바람에 일렁인다.
--- p.33 「군산 꽁당보리」 중에서
운장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된 것은 조선 시대 정여립 사건과 관련이 있는 송익필의 자가 운장(雲長)이었던 데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송익필에 관련된 전설은 독제봉(운장산 서봉)과 오성대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송익필은 정여립을 체포할 당시 진안 현감 민인백과 같은 서인 계열이었다. 《진안지》에 따르면 산이 높아 항상 구름이 덮여 있다는 의미에서 운장산(雲藏山)이라고 한다는 기록도 있다.
상전면과 정천면 고랭지의 청정 지역에서 생산하는 떫은맛이 있는 생감을 완숙되기 전에 따서 껍질을 얇게 벗겨 대 꼬챙이나 싸리 꼬챙이, 또는 실에 꿰어 햇볕이 잘 들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 매달아 전통 제조 방법으로 건조시킨다. 건조된 곶감을 상자에 늘어놓고 밀폐된 상태로 두면 감이 완전히 건조되면서 표면에 포도당(글루코스)의 흰 가루가 생기는 바, 이를 꺼내 다시 한 번 건조시켜서 상자에 넣고 밀폐해 두면 곶감이 되며, 건시라고도 한다.
처마엔 어김없이 붉은 곶감이 달려있다. 햇살 한 줌 탐이 나서 하늘에 손뻗어 움쥐었다. 시나브로 손 안에 든 햇살에 맑은 가락이 흐른다. 오늘 햇살 한 줌, 바람 한 점이 하늘 담은 삶터에서 하늘 닮은 당신을 하늘거리게 만든다.
--- p.94 「운장산 씨 없는 곶감」 중에서
예부터 산에서는 송이, 밭에서는 인삼, 물에서는 순채를 제1의 건강식으로 꼽았다. 순채는 무미, 무색, 투명한 우무질에 싸여 있는 비단 띠 같은 금대(金帶)라는 풀이다. 허균은 《도문대작》을 통해 ‘호남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고 해서(海西) 것이 그 다음이다’고 했다.
‘순채(蓴菜)’는 저수지에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왔으나, 마구 채집해 지금은 찾아보기 드문 식물이 됐다. 수련과의 여러해살이 수초(水草)로, 줄기는 원뿔 모양이고 물에 잠겨 있으며 잎은 어긋나고 물 위에 떠 있다. 순채는 연못에서 자라는 수초이지만 옛날에는 잎과 싹을 먹기 위해 논에 재배하기도 했다.
김제는 500년 이상 순채의 명산지였다.
--- p.148 「김제 순채, 언제부터 사라졌나」 중에서
퇴기 월매의 딸 춘향과 남원 부사의 아들 이도령의 신분을 넘어선 사랑을 그려낸 〈춘향가〉는 판소리 다섯마당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그러나 월매가 이도령을 위해 영계찜, 어전, 육전, 신선로 등이 오른 화려한 밥상을 차려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월매가 예비사위를 위해 정성껏 차려낸 밥상은 산해진미로 가득할 뿐 아니라, 신선로와 같은 궁중음식까지 올랐다.
‘이 밥상, 월매가 이몽룡에게 차려줬죠.’
판소리는 우리 전통음식의 보고라 할 만큼 사설(노랫말) 속에 다양한 음식이 등장한다. 《춘향전》에는 국물 있는 탕만 해도 네 종류(외초리탕, 수란탕, 장국, 간장국) 나물은 무려 여섯 종류(청포채, 녹두채, 콩나물, 고사리나물, 미나리나물, 슉운채)가 나온다. 그런 음식들로 구성된 화려한 상차림이 ‘맛과 멋의 고장’ 전주에서 재연됐다.
--- p.208 「춘향전의 음식, 월매 밥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