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짝만 건너왔을 뿐인데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원시의 시간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다. 섬의 허리를 따라 길이 나 있고, 파도에 깎이고 패인 기암괴석은 유장한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지그재그로 나 있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하얀 등대 건물이 나온다. 공중부양 한 건물 아래는 망망대해를 앞에 둔 열린 광장이다. 세찬 바닷바람은 기묘한 소리를 내고, 은빛 바다의 일렁임은 경이롭다. 석양이 내릴 즈음에는 황홀경에 빠진다. 대자연의 위엄 앞에 작은 존재임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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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갈림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폐선이 된 동해남부선 철로와 바로 연결된다. 걸어가던 방향으로 계속 직진해서 가면 예쁜 포구마을인 청사포가 나오고,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걸으면 해운대해수욕장의 끝자락인 미포로 향한다. 문탠로드의 흙길 등산로 절반을 가다가, 갈림길의 반환점에서 미포 방향으로 걸어 돌아오는 것이 가장 매력적인 코스다. 너른 대양의 시원한 눈맛을 즐기며 걷다가, 서서히 바다와 어우러진 도시의 리드미컬한 조합을 보는 것은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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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숙도의 신비를 더 깊숙이 느끼려면 남단 끝 지점에 있는 탐방체험장까지 들어가야 한다. 이곳은 예전에는 도시에서 발생한 분뇨를 해양투기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저류시설이었다. 일종의 대규모 똥통인 님비시설이 바로 여기 천혜의 철새 낙원 바로 곁에 떡 하니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염 떼가 그대로 흔적으로 남아 있는 콘크리트 벽을 존치시키고, 나머지 남은 주변 환경은 멋진 조경으로 꾸며서 하나의 작은 공원으로 변신시켜 놓았다. 여기에 서 있다 보면 기묘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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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인에게 전파된 ‘파도타기’ 응원이 사직야구장에서 시작되었다. 신문지와 주황색 비닐봉지를 이용한 응원도구도 매우 창의적이고 이색적이다. 떼창과 독특한 응원용 구호는 상대 선수들이 두려워할 정도의 에너지를 내뿜는다. 특히 관중석이 꽉 찼을 때는 전율이 느껴질 정도다. 어떤 이는 게임 결과에는 관심이 없고 응원의 즐거움 때문에 야구장을 찾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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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제강의 옛 공장동이었던 건물이 문화와 상업 기능이 어우러진 복합건물로 대변신했다. 방치되어 있던 공장이었다고는 느낄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콘텐츠의 장소가 되었다. 오랜 시간의 거친 흔적을 지워내지 않으면서도 현대적 디자인과 기능을 가미함으로써 공간 곳곳이 풍성하다. 주 현관으로 들어가면 가운데에 하늘이 뚫린 마당이 있다. 우리 전통한옥에서와 같이 건물이 둘러싸고 있고 그 가운데에 마당을 배치한 것이다. 휴식과 여러 행사의 기능으로 활용되는 멀티 펑션 공간이다. 낡은 공장 부자재들과 사이사이 흐드러지게 핀 억새의 설정도 절묘하게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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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작용을 멈추고 관계들이 어떻게 조응하는지 세밀히 관찰하면 품격과 평온, 텐션과 밸런스를 가진 사물의 대화를 들을 수 있다. 여러 요소가 모여서 서로 공존함으로써 관계가 발생되고, 바로 이러한 관계 속에서 표현이 생성된다. 이우환 작가의 ‘절제적’인 차원은, ‘윤리적’이라는 관계론적 의미와 연결되고, ‘숭고성’ 혹은 ‘영원성’이라는 미적, 초월적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무한의 기다림이 몸에 배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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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전당은 거대 지붕을 두 개씩이나 가지고 있다. ‘빅 루프’와 ‘스몰 루프’라 하여 길이가 무려 162.5m와 120m이다. 지붕의 아랫면은 굴곡지게 휘어져 있고, 4만여 개의 LED 조명이 만드는 다양한 패턴 이미지들이 춤춘다. 그 아래에 있다 보면, 이것은 운동회날 하늘에 나부끼는 만국기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에 펄럭이는 듯한 조명 연출은 축제의 장을 더욱 들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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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대교 교각 주변에 요트를 세워놓고 내가 살던 도시를 역으로 바라본다. 신선하면서 묘한 느낌이다. 붐비고 바삐 움직이는 도시의 레이어들이 영화의 스틸 컷과 같이 겹쳐 보인다. 바다와 강, 하늘과 석양, 밤이 되면 별과 달까지 레이어가 겹친다.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들어오고 광안대교의 경관 조명이 켜지면 환상은 극대화되고, 바다 앞에 불쑥 솟아 오른 화려한 마린시티의 야경은 뭔가 뭉클함마저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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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분식집만큼 많은 부산돼지국밥의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이미 밀양에는 1940년대부터 돼지국밥 식당들이 있었지만 부산의 돼지국밥은 한국전쟁과 이북 피란민들의 영향으로 생겨났다.〈수요미식회〉에 나와 유명해진 할매국밥은 평양 출신 최순복 씨가 1956년 범일동 옛 삼화고무 공장 앞에 문을 열었다. 맑은 국물로 유명한 신창국밥은 서혜자(79) 씨가 1969년 국제시장에서 순대국밥 하던 이북 할머니를 어깨 너머로 보고 간판도 없는 국밥집 문을 열었다. 이후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시장과 교통 요지를 거점으로 부산 전역에 국밥집이 생겼는데, 피란민이 생필품을 거래하던 부평깡통시장, 조방 앞, 서면시장 등지에서 돼지국밥 노포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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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를 즐긴다면, 싸고 풍성하고,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떠오른다. 특히 부산의 횟집들은 여럿이 모여 푸짐하게 먹는 방식에 특화되어 있다. 그래서 정갈하거나 품격있는 분위기에 어울리는 식당을 생각할 때면 횟집보다는 늘 고급 일식집이 추천된다. 수정궁은 질 좋은 회로 귀한 이를 대접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코스로 먹을 수 있고 개별객실로 이루어져 있어 상견례와 같은 조용한 모임 장소로 좋다. 또한, 연회실도 있어 바다를 풍경으로 피로연이나 돌잔치 같은 모임도 적합하다. 수정궁의 이름은 동구의 수정동에서 유래한다. 부산의 역사를 담은 이름처럼, 부산의 깊은 맛을 귀한 이에게 대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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