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위티에서 나와 같은 혹은 비슷한 경험을 했을, 하고 있는 여성 청소년들을 정말 많이도 만났다. 그리고 위티를 찾아오는 사람들 역시 대부분 각자의 자리에서 싸우던 중 외로움에 지쳐 있거나, 당연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 도드라지는 자신의 ‘비정상성’에 의문을 품은 상태였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단체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들과 동료가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나 자신을 조금 덜 미워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기가 센 나를, 목소리가 큰 나를, 당연한 일에 의문을 품는 나를. 우리는 ‘여자애’답지 않은 우리를 존중하고, 당연한 일을 어렵게 생각하고 고민하며 ‘정상성’과 ‘기준’이 무효한 공간을 만들어 가고자 노력한다.
---「최유경, 〈우리의 말하기가 세상을 바꾸도록〉」중에서
‘왜 저 사람은 나에게 할 질문을 우리 엄마한테 하는 거지? 왜 나를 보며 혀를 찰까? 내 친구들은 왜 도우미라고 불리는 거지? 왜 모르는 사람이 자꾸 나한테 쉽게 말을 걸까? 이런 건 굉장히 개인적인 질문 아닌가? 내가 나왔던 방송은 왜 내 장면마다 감동적인 비지엠BGM이 나올까?’ 그때는 이런 불만을 가지게 한 사람들을 미워했던 것 같다. ‘어떻게 그런 무례한 말을……, 왜 저런 편견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많은,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부터 잊고 지냈던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어릴 적 가지고 있던 그 의문. ‘왜 여전히 텔레비전에는 장애인이 잘 나오지 않을까? 왜 텔레비전에 나오는 장애인들은 다 비슷할까?’
---「김지우, 〈내 일상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야〉」중에서
어떤 교사는 제 애인과 제가 “너무 붙어 다닌다”며 혼을 냈고, 다른 반에서 제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저희 둘이 ‘사귄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의 친구 하나는 제가 지역의 다른 학교들에서 ‘레즈’로 불린다고 알려 주기까지 했습니다. 제게 물어보기엔 ‘무섭고’ ‘더러우니’ 제 친구들에게 제가 레즈비언이냐고 묻는 학생들은 덤이었지요. 제가 특별해서 당한 일들이 아닙니다. 저의 성소수자 친구들은 정기 행사처럼 몇 주에 한 번씩 이런 혐오와 차별을 겪었습니다. (……) 사람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던 열일곱 살의 저는 점점 약해져만 갔고 제겐 누구보다 무엇보다 강인한 방패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차별받고 혐오당하던 열일곱의 겨울, 저는 결심했습니다. 우리 학교에 저의 방패가 되어 줄 성소수자인권 동아리를 만들겠다고요.
---「이호, 〈혐오의 산꼭대기에서 피어난 한 떨기 퀴어〉」중에서
민혁이 아버지의 재판을 위해서 학생과 교사의 탄원서를 조직했다. 아쉽게도 탄원서를 받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 민혁이 본인이 아니고 민혁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서명을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이기에, 제자이기에 그동안 우리 활동을 지지해 주었지만 그 이상은 할 수 없다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는 것 같았다. 며칠씩 탄원서 서명을 연기하다가 냉정하게 ‘난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라고?’, ‘나는 난민 수용에 반대야’라는 논리를 펴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보며 나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민혁이는 어땠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정체성이란 게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자, 봐라. 누구 못지않게 한국인 같았던 민혁이가 한국 사회에서 지금 이란인 난민으로 만들어지고 있구나”라고.
---「김지유, 〈이름은 잊히고 행동은 기억되어야 합니다〉」중에서
삭발 당시 나는 만 15세였고 선거권 연령이 18세는커녕 16세로 하향된다 하더라도 선거권을 갖지 못할 나이였다. 그럼에도 선거권 연령 고작 한 살 하향이 내 삶과 무관하지 않다고 느꼈던 것은, 청소년에게 선거권이 없는 것은 단순히 투표소에서 도장 하나 찍고 나오는 행위를 할 수 없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모든 사소한 참여들에서까지 배제되는 것과 맞물려 있는 문제이며, 그것이 당시의 내가 겪고 있던 불안전과 차별의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 될지도 알 수 없는 선거권 연령 한 살 하향으로 내 삶이 좋아질 거란 기대를 하진 않았다. (……) 하지만 내가 어른이 되고 청소년에게 당연하지 않은 권리를 당연하게 누리는 날이 온다고 해도 어린 시절에 겪었던 수많은 차별과 부당함은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김윤송, 〈선거권은 인권이다〉」중에서
나는 곧 노동당의 3년 차 당원이 된다. 만 16세인 내가 당적을 3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노동당이 청소년 당원을 정식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노동당의 당원이 된 것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를 넘어설 사회적·생태적 전환을 위해 탄생했다는 노동당의 정체성이 나의 마음에 와닿았고, 지역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연대하던 노동당 전북도당의 일원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그러던 와중에 내가 직접 ‘노동당의 후보지만 선관위는 인정하지 않는’ 후보가 되어 불합리한 〈공직선거법〉을 정면으로 어기는 퍼포먼스를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조민, 〈청소년의 이름으로 선거와 정치에 도전하다〉」중에서
우리의 운동은 다른 운동들에 비해 그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집회를 열어도, 기자 회견을 해도 적은 사람이 참여했기 때문에 ‘조례 제정을 주장하는 소수의 인원이 전체 청소년을 대변할 수 없다’는 폄하를 당하고는 했다. 그러나 내가 서명을 받으며 느꼈던 것은 많은 청소년들이 경남학생인권조례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교문을 지날 때 자기 검열을 하게 되는 게 싫다’, ‘머리 염색하고 싶다’, ‘교복 불편하다’. 서명을 받으면서 이런 생생한 학생들의 외침을 우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귀를 닫고 있는 저들에게 이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은 오늘도 24시간을 학교와 학원, 과외에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을 테니까. 목소리를 내더라도 철없는 일탈이라며 그 목소리가 짓밟혔을 테니까. 설령 그들이 학생인권조례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부정하게 한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하지현(하지), 〈학생이 잡을 밧줄이 없어서〉」중에서
시위의 마지막은 청와대를 향한 행진이었다. 미세 먼지가 가득한 누런 하늘에서 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부의 기후 변화 대응을 촉구하며 청와대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청소년 기후행동의 요구를 담은 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동료 몇 명이 청와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 “우리는 편리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편리에 비해 앞으로 짊어져야 할 짐이 너무나도 큽니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우리를 미래 세대라고 부르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미래를 만들어 나갈 책임은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현재를 바꾸기 위한 권리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청소년 기후행동, 〈외면은 그만, 이제는 직면할 시간〉」중에서
기억하고 함께한다는 건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순간에서 아무리 중요한 기억이라도 늘 생각하며 살지는 못합니다. 가족 관계 안에서 누군가 잘못한 것을 계속 의심하고 살지는 않는 것처럼요.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그때 이거 누구였지” 하며 기억을 되살리곤 합니다. “사실 그거 나였어” 하며 고백하기도 하지요. 살다 보면 그 기억이 무뎌질 때도 있고, 잠시 흐릿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기억합니다. 기억한다는 건 ‘내 삶에서 함께하다가 언젠가 다시 봤을 때 의미를 되새기고 잊지 않는 것’, ‘관심사를 찾아 내가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을 함께하는 것’, ‘그러다 보면 그 함께하는 것이 다시 내 삶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김수현, 〈“기억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중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타려는데 어떤 할머니가 나를 안아 주시며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와 줘서 고맙다. 정말 큰 힘이 됐다.” 그때 마음이 찡하고 울려 왔다. 할머니에게 너무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할머니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그때 들었던 죄책감은 밀양에 계속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계기가 됐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생각도 없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나는 고맙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 그럼에도 고맙다고 해 주시는 할머니에게 더 이상 죄송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밀양과의 연대가 시작되었다.
---「이미르,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내 마음속의 밀양〉」중에서
유기견들을 보호하고 입양도 보내는 ‘팅커벨 프로젝트’라는 단체에도 참여했다. (……) 그때 존스라는 이름의 웰시코기를 만났다. 녀석은 산책 도중에 점포를 보면 마구 돌진하곤 했다. 덩치도 크고 무거운 녀석을 안고 점포를 나와야 하는 당황스러운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그런 녀석을 볼 때마다 봉사자들과 스태프들은 존스의 전 주인은 아마 점포를 운영하는 사람이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존스는 매우 활발하고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전 주인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거였다. (……) 유기견들에게 하나의 세상이었던 주인과의 이별은 곧 다른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산책 하나도 서로 맞춰 가는 과정이니 말이다. 산책 봉사는 반려동물을 들일 때는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김은결, 〈유기 동물이 보여 준 세상〉」중에서
‘단지 자신의 고향을 빼앗기기 때문일까? 아님 다른 이유가 있을까? 찬성하는 마을 주민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나는 그동안 어떤 이유로 제2공항을 반대한다고 구호를 외쳤을까?’ ‘왜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맹목적으로 따른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자니 끝이 없었습니다. 내가 제2공항을 어떤 이유로 반대한다고 했는지, 반대하는 주민들은 왜 반대하는지, 찬성하는 주민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 이유를 찾겠다고 성산으로 5일 동안 무전여행을 떠나게 됐습니다.
---「이규헌, 〈평화를 위해 싸우는 제주〉」중에서